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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영생’ 이란 무엇인가? (6)Fam Worship 2024. 4. 14. 22:10
그 다음에 두 부류의 사람이 딱 나타나요. 마태복음 20장 20절을 보세요.
17~19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꺼야. 3일만에 살아날꺼야.” 이런 정말 힘들고 처절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보세요. 제자들이 있었어요. 제자들이 주님에게 먼저 부름을 받은 자들이에요.
예를 들면 아침 일찍이 나를 좇으라고 해서 포도원에 들어간 자들이라고 봐도 되요.
들어갔는데.. 자기들이 따라 다니면서 보니까 예수님이 굉장한 일들을 하시거든요.
귀신도 쫓아내고, 병든자도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하고.. 굉장한 일들을 하시거든요.
그리고 이분이 분명히 저렇게 하다가 이렇게 이렇게 되면 굉장한 보좌에 앉을 것 같애..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는 말을 하는 그 현장에서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 엄마를 딱 보내서 치맛바람을 일으켜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가서 우편에 요한, 좌편에 야고보 앉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 어떤 영광을 취할지를 알고, 그 분이 굉장하신 분이야. 그 자리에 갈꺼야. 알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서 그분을 높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아니까 거기에 붙어서 나도 그 자리에 들어가서 그 영광의 한 귀퉁이에 있겠다.
아침에 일찍 들어온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이 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선하게 하는 그 주인을 보면서 ‘그렇게 선하게 해? 그럼 나에게는 5 데나리온 떨어지겠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에요. 주님의 영광을 봤거든요. 주의 선하심을 봤거든요. 그래서 그런 분이 어떻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거기서 자기가 어느쪽인가가 결정이 나는 거에요.
거기서 1. 내가 내 유익을 구해서 내 것을 취하기 위해서 주님을 따를 건지..
아니면 2. 주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주님을 따를 건지.. 둘 중에 딱 결정이 나는데..
요한과 야고보는 여기서 그 앞편을 택한 거에요. 일찍 들어온 자처럼..
그런가하면요 29절을 한번 보세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더라.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더라. 예수님이 능력이 있더라. 근데 그 분이 다윗의 자손이야. 근데 그게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그분이 왕이 될 분이야.” 다 들은 거에요. 맹인이지만..
근데 거기서 맹인이 처한 자기의 그 위치가 있었어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근데 이 맹인이 취한거는 뭐냐면요?
“맞습니다. 당신이 그 다윗의 자손입니다. 당신이 그 귀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당신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니까 그 능력으로 나를 고쳐주세요. 나를 고치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당신은 정말 귀한 분입니다. 나는 처절한 맹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하는 건요.. 바로 ‘당신이 너무나 선한 분입니다.’ 하는 것에 거꾸로 고백이에요.
그러니까 이 바디매오.. 이 맹인의 모습과 요한과 야고보의 모습이 동에서 서에요.
그들은 먼저 예수님에게 좇아옴을 받으라고 아침에 데려온 자들이나 마찬가지에요.
바디매오는요 길거리에서 지금 얘기 다 주워듣고 끄트머리에 들어온 11시에 들어온 사람이나 마찬가지에요.
이 바디매오는 들어와서 “당신은 선하십니다. 당신이 선하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당신의 선하심을 높입니다.” 하고 있어고요..
요한과 야고보는 “당신의 선하심 맞아요. 당신의 영광 맞아요. 당신의 능력 맞아요. 그러니까 나도 거기 한 귀퉁이 끼게 해주세요. 그 유익을 나도 보게 해 주세요.” 하는 자리에 가요.
먼저 된 자였지만 나중 된 자리로 가요.
그림을 한 번 그려보세요.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고 돌아서서 가는데 바디매오가 있었거든요.
바디매오에게 가서 “너 뭘 원하냐?” 눈을 떴어요. 눈을 뜨고 예수를 좇으니라.
그럼 예수 바로 뒤에 누가 섰어요? 바디매오요.
나중된 자가 먼저 됐어요.
그럼 요한과 야고보는 저 뒤에 있죠 지금. 아까 얘기해가지고 시험 들어서 저 뒤에 있을거거든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누가 결정되는지 아버지께서 하실꺼야. 나한테 그러지마.”
그리고 저 뒤에 서서 둘이서 “안되네..” 그러고 있었을 것이고.. 바디매오 앞에 가서 예수님이 말했고 눈 떳고, 바디매오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좇았어요.
그러면 예수님 앞에 맨 앞에 줄서서 좇아가는 자가 누구에요?
바디매오 에요. 나중된 자가 먼저되요.
어린 아이들에게 얘기해도 이해할만한 이야기에요.
어떻게 바라보느냐?
주님의 선하심 자체를 그걸 인정하고 그분이 선하다고 그분을 높이고 내가 그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분을 올리고 경배하고..
“당신은 선하십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이 어떻게 하든지 좋아요. 나에게 눈을 뜨게 하든지 아니든지.. 어쨌든지 당신은 선하십니다.” 하고 있는 자체..
그게 이 맹인의 기도였어요.
근데 주님이 오셔서 물어보죠. “내가 너한테 뭐 해줄까?”
우리가 주님 앞에 앉아 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뭐 해줄까?” 하고 물어보는게 더 낫지 않아요?
“하나님, 하나님! 이거 주세요 주세요” 난리 했는데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내가 줄께 아니다 아버지께서 줄 사람 줄꺼다.” 그말 듣는 것 보다 .. 안 그래요..
근데 우리가 기도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거에요. 우리 기도는 정말 해야되요.
기도하는 자체가 지금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그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높이는 그런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뭐해줄까?” 라고 까지 물어보시는 자리까지 갈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내 유익을 취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 자체도 응답이 안 되는 거죠. 이해가세요?
근데 이 모든 것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는 거에요.
말씀을 볼때요.. 이 말씀이 편지잖아요. 주님 자체거든요.
말씀을 펴고는 주님 앞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기도하죠.
에베소서 1장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너희가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길 기도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대하면서 “하나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세요. 말씀속에서 당신을 보게하여 주세요.”
우리가 아침에 큐티묵상이나 이런 걸 할 때도 “주님! 나에게 이것을 가지고 나를 가르쳐주세요.” 가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을 보게 해주세요. 내 눈을 열어 주세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세요.”
사도바울이 그래서 교회에 제일 필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얘기해요.
말씀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허공을 치게 되요. 느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말씀을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그 말씀 속에서 방법만을 찾으면 헛되게 믿게 되요.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5장에 나와있는 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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