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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벤트 셋, '오병이어 이야기'Fam Worship 2024. 4. 22. 09:19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또 하나 주목하여 볼 것은 돌 항아리입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던 돌 항아리, 거기에 주님이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 돌 항아리에 무엇인가 이미 들어 있었다면 물을 가져다 채울 수 없습니다. 물이 어느 정도 이미 차 있을 때 채우라 하신 물을 계속 갖다 부으면 주님이 채우시는 물은 항아리 밖으로 흘러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틀이 고정되어 있다면 주님께서 무엇인가 비밀을 알려주시려고 해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꽉 차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새로운 것이 들어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깨달음과 지식을 내려놓고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새롭게 우리에게 비밀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제게는 어떻게 조명되었는지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6장 5~9절
빌립과 안드레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빌립은 “사서 먹이라 하시면 돈이 있어야 하고 이 정도의 돈이 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또한 안드레는 “여기 오병이어가 있긴 있는데 이것으로 무엇이 되겠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드레가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으므로 그 어린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안드레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빌립의 불신과 안드레의 (큰) 믿음을 비교하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오히려 안드레가 빌립보다 더 믿음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빌립은 오히려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라고 물어 보셨을 때 빌립은 자기의 판단 하에서 실질적인 답변을 합니다. 주님께서 떡을 사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니 떡을 사려면 얼마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어디서’ 살 것인지를 물으셨지 ‘어떻게’ 혹은 ‘얼마가 있으면’ 살 것인지를 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디서 살 것이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답은 주님께서 이미 이사야서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사야 55장 1절
예수님의 질문에 늘 동문서답하고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주님께 바쳤다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수많은 무리를 보니 남자, 여자 또 어린아이를 다 포함하면 약 이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도시락을 싸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중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도시락을 싸왔습니다. 그래서 안드레가 그것을 보고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가 있긴 하나 이것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라며 예수님께 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원하는 대로 주시니라
요한복음 6장 10~11절
즉 어린아이의 떡을 안드레가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렸거나 어린 아이가 직접 가져다 드려서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떼어주시어 먹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이가 들고 있는 오병이어를 친히 가져 오셔서 축사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도시락을 본 안드레는 “이것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라고 말하였고 그 어린아이도 그것을 주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직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어떤 누구도 나의 몫을 하였다고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예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믿음으로 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있었던 아이도, 안드레도, 하물며 오병이어 자체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병이어를 바치면 주님이 역사하신다. 우리가 그 오병이어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만족을 얻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당하실 때 마귀는 예수님께 돌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빈들에 있는 그들을 먹이는 것에만 목적을 두고 계셨다면 주위에 있는 돌을 하나씩 들게하여 축사하셔서 그것이 떡이 되게 하여 먹이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먹이셨듯이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게 하여 먹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오병이어를 가져다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병이어를 가져가서 사용하신 것의 의미가 과연 예수님께서 “너희도 오병이어처럼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고 와라, 그러면 축사할 것이다.”와 같은 것일까요? 주님께서 오병이어가 없으면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시나요?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던 분인데, 오병이어가 없어도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만나가 내렸을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오병이어를 가져가셔서 축사하셨을까요?
우리가 아끼는 무엇인가가 다른 곳에 가 있으면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말로 어디에 관여되어 있으면 내가 말한 그것이 지금 어떻게 될까하고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집중하고 살펴보게 되어 있습니다.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남자의 수를 세어서 오천 명에게 떡을 먹였는데 그중에 그 떡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어쩌면 빌립과 안드레와 어린 아이 세 명뿐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 말씀을 잘 전하시던 예수님이 어느 날 자신의 도시락을 가져가시더니 축사하시고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을 보고 “와~” 하며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오천 명을 먹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돈 없이 오병이어로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역사를 본 빌립 또한 “와~” 하며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이 오병이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하던 안드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것을 보고 놀란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이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가까이에서 바로 목격하면 그분의 능력과 아름다움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 감격을 통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분의 사랑하심 때문임을 이해할 수 있고 거기서부터 그분과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분이 사랑임을 바로 이해하게 되면 주님이 사랑이시라고 전하는 주님의 참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가장 가까이에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항상 보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요한계시록에서 자신을 증거하시기를 ‘충성된 증인'(계 1:5)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빈들에서 떡을 먹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내용과 해석이 다 각각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풀밭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떡이 공중에서 떨어졌나 할 정도로 갑자기 떡을 나눠 주시는 거야!” 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마 선생님이 큰 배에다가 떡을 실어 왔나 봐” 라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은 떡을 먹었을 뿐이지 그 과정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립과 안드레와 어린아이는 압니다. 그 현장에 주님과 가까이에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님이 하신 일에 관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병이어 이야기에는 ‘내가 너에게 이 일에 한 부분이 되게 하여서 내가 행하는 일을 보게 하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여 너를 증인으로 세우겠다.’ 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접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 찌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에스겔 36장 33~38절
36절 후반부부터의 말씀이 Complete Jewish Bible에는 “I,Adonai have spoken; I will do it. Adonai ELOHIM Says, ‘In addition, I will let the house of Israel pray to Me to do this for them to increase their numbers like sheep like flocks of sheep for sacrifices, like the flocks of sheep in Yerushalayim at its designated times, in this degree will the ruined cities be filled with flocks of people. Then they will know that I am Adonai” 라고 씌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결정하였고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다시 말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이렇게 회복하리라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무엇에도 앞서는 나의 뜻이 이 일을 이룰 것이다. 너희의 기도와는 무관하게 이미 나는 결정하였고 나의 뜻을 정하였고 그리 행할 것이며 그 약속을 너희에게 말하여 알려주는 것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37절에 ‘In addition’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내가 이미 결정한 그 일을 이루는 것과 그것에 대한 나의 확증에 더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이 일에 대하여 기도를 하면 지금껏 말한 회복의 내용과 더불어 또 다른 축복을 더하여 줄 텐데, 그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의 숫자가 양 떼 같이 많게 하여 주는 것이니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보며 그들이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찾아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도 그것을 위해 함께 기도로 동참할 은혜를 베푸시고, 기도로 동참한 그들에게 원래 주시기로 한 약속에 더하여 주시는 축복을 그들로 경험하게 하시며, 이것을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기도제목이 있어서 그 제목을 놓고 기도를 하는 동안 그 기도제목에 관여된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기도제목을 구하는 것 외에 어떻게 더하여 이루어 주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그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 주님의 소원 안에서 주님의 이루심과 더하심의 목격자가 되며 주님이 선하신 분이신 줄을 알게 되어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하실 떄 “너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내가 이룰 수 없다” 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가 이룰 것인데 너희들을 그 일에 동참시킴으로 내가 어떤 하나님인 줄을 알게 할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 36장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한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 특별히 그 자리에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현장에 있게 하심으로 그분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확실히 보고 그것에 감격하게 하고 그 감격으로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한 그 이야기를 증거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일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요한복음 6장 11절
떡을 가져다가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 목적, 즉 주님이 떡을 떼어주시면서 무엇을 기대하셔서 그리하셨는지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누가복음 24장 30~31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11절에서 떡을 가지고 하신 일과 동등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 결과로 눈이 밝아져서 주님이신 줄을 알아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가운데 그분이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떡을 먹음으로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통하여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이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 될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자!” 혹은 “나 자신을 오병이어로 드리자” 하며 예수님의 원래 심정과 원래 소원과는 동떨어진 이해와 감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을 알고 우리의 눈이 뜨여져서 말씀을 바로 깨닫고 주님을 바로 본다면 그 사건 속의 주인공은 우리들이 아닌 예수님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사건 속에, 그 기적 속에, 주님의 선하심으로 우리를 동참시키시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려 하심을 알게 됩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우리가 주인공이 되려 하면 그분의 심정과 마음과 소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고 내가 그려놓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보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그대로 둘 수 없이 안타까우셔서 때로는 광야로 내몰기도 하시고, 때로는 가진 것들이 빼앗기는 것을 용납하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그 사람 곁을 떠난 것 같이 하기도 하시면서 계속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더욱 치열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한 없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이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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