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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나무의 관점Fam Worship 2024. 4. 17. 16:31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세계는 위기로 치닫고 있어요. 위기.. 말도 못하는 위기이고..
우리가 눈으로 귀로 듣는 뉴스 말고도 사람들의 심령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학교가서 친구들을 보면 알거에요.
학교가서 친구들을 보면 알거에요.
친구들이 교회를 나가 안나가.. 예수를 믿어 안 믿고를 떠나서 아이들의 심령 가운데 정말 위기처럼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이 강팍해지고 있고..
어른들의 마음도 강팍해지고 있어요.
상황을 보지 않고 사람들을 보기만하면 벌써 알 수 있어요.
‘아~! 이것이 위기구나. 이제 정말 끝으로 치닫고 있구나.’
그러면 위기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되며.. 어떻게 살아야 되고..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나.. 그런 갈등이 있어요. 그런데 성경 속에는 위기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은 처음부터 위기였어요.
우리들 가운데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를 죽이려고 많은 사람들이 작정했던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태어나기를 기다렸고.. 태어나면 아! 축하해서 생일잔치를 하고 그러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죽이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그런 위기 가운데 태어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33년 반동안 계속해서 위기 속에 이 땅에서 사셨어요.
그분은 계속해서 위기 였어요.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그 설교가 뜻에 안 맞는다고 죽이려고 하고..
계속해서 그런 위기 속에서 살아가시던 그분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면 우리는 그 가운데서 우리가 앞으로 닥치는 이 위기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되나를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 계시는 어른들이 사는 위기와 여기 청소년들이 앞으로 당할 위기와는 비교가 안되요.
우리는 쪼금 어려워요. 여기는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어려움을 당할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잘 될꺼야” 라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는 점점 어려워져요.
어려운 가운데서 어떻게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사느냐가 사는 길이에요.
세상사람들처럼 그 중에서 탁월하고, 잘 살고, 돈 잘 벌고, 이렇게 살겠다고 하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어요.
그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 살아야 되요.
그 다른 존재가 뭐냐면?
하나님의 사랑에 메인자로 살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이 없어요.
세상을 이기고 위기에서 승리하는 건.. 온전한 사랑 밖에는 없어요.
다른 건 길이 없어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위기일 때 어떻게 했는지가 나와 있어요.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금 아버지께로 갈 때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돌아가실 때란 말이에요. 돌아가실 때..
아버지께로 갈 때니까..
일단 돌아가시고 무덤에 들어가셔야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실 돌아가실 때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장 큰 위기에요.
근데 이 위기의 때에 예수님이 뭘 하기로 결정하냐면?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정을 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행하시는 거에요.
위기 때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는 건..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
그런데 어떻게 끝까지 사랑하느냐? 그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양이에요.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내가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함으로 보여주냐면..
발을 씻음으로 보여주겠다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근데 이 발이 어떤 발이냐 이 말이에요?
그 제자들의 발이 과연 어떤 발이냐 말이에요?
과연 그 발이 어떤 발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법정에 서시고 이제 성경대로 시험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지금 씻으신 발이 이제 곧 자기를 버리고 도망할 그 발이에요.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 발이 더러우니까 발을 씻어야 깨끗해지니까’ 이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은..
이젠 나를 버리고 법정에서 다 도망가버릴 그 발..
그 발을 씻으므로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이는 거에요.
근데 그 발 가운데 무슨 발이 있냐면?
그냥 도망간 발도 있고.. 마가처럼 무서워서 자기의 겉옷을 홑이불을 입고 있다가 홑이불을 벗어서 발가벗고 도망간 발도 있고.. 불을 쬐다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베드로의 발도 있고.. 그런가하면 입맞춤으로 예수를 파는 가롯유다의 발도 거기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니까 그 발들이 앞으로 어떻게 갈건지를 다 알아요. 다 알아요. 근데 그 발을 씻으세요.
만약에 그 발이 도망갈 발로만 보이면 그 발을 절대로 씻을 수 없어요.
근데 주님의 눈에 보이는 발은 도망갈 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그 다음 차원의 발이에요.
그게 뭐냐면? 로마서 10장에 나와 있는 발이에요.
예수님께서 지금 그 제자들이 나를 다 버리고 도망갈 그 발을 보면서 그 현재의 발을 보고 발을 씻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 발이 아름다운 그 발.. 복음을 전할 그 아름다운 발이 되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그 발을 씻어요.
주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주님은 무엇을 행함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어떻게 어떤 존재로 보는가 부터 사람을 사랑하세요.
그러니까 발을 씻으신거는.. 그렇게 보는 것의 결과이지.. 발을 씻음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런 초보적인 차원이 아니에요.
정말 나를 버리고 도망갈 그 발.. 그 발을 그 도망갈 발이라고 생각하면 그 발을 씻기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복음을 들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산을 넘을 발.. 그 발.. 그 발이 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운 발을 씻기시고 계신 예수님이세요.
그런데 유대인의 문화에 보면 종들의 위치가 있어요.
상전을 섬기는 종들이 있는데..
어떤 종은 상전의 옷을 챙기고, 어떤 종은 상전의 밥을 챙기고, 어떤 종은 집을 청소하고, 어떤 종은 자기의 종의 레벨..
그 등급에 따라서 자기 종이 하는 일이 달라요.
유대인 문화에서.. 가장 낮은 것 바로 위에 종이 뭐냐면?
들어오는 사람의 그 샌들의 신을 푸는 거에요. 신들메를 푸는 거..
그게 세례요한이 자기가 그렇다고 얘기했어요.
가장 낮은 종은 뭐냐면?
신발을 풀어 놓으면..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의 발을 씻는 종이 가장 낮은 종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지금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행한 것은 뭐냐면?
이렇게 도망갈 발.. 그렇지만 가장 아름다운 발이 될 것을 보고 그 발을 씻으시면서 또한 동시에..
자기가 가장 낮은 종임을 지금 보여주시는 장면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종이 아니라..
가장 종 중에 가장 낮은 종이라는 것을 지금 보여주시는 모습이에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지금 17절의 말씀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발을 씻으면이 아니라..
너희가 이것을 알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자보다 크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이 모든 것을 행하면.. 그런 존재가 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뭐냐면?
“아버지가 나를 보냈어. 그리고 나는 보냄을 받은 자야. 우리 아버지가 나의 상전이야. 나는 종이야.”
그런데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게.. 아버지가 상전이잖아요.
제자들의 발을 씻겼어요. 그러면 제자들의 발을 씻겼으면.. 지금 제자들의 종처럼 보여요 안보여요? 제자들의 종처럼 보여요.
그런데 집에 유대인 문화에 손님이 오면요.. 그 종이 손님들의 발을 왜 씻겨주는지 아세요?
그 손님들의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집 주인의 종이기 때문에 발을 씻겨요.
이 집의 어떤 종이 있으면.. 그 종이 손님들이 들어오면 그 손님들의 발을 씻겨요.
근데 발을 씻기는 이유가..
이 손님들의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 집 주인의 종이기 때문에 발을 씻긴단 말이에요.
지금 주님이 그 말을 하는 거에요.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는데.. 사실은 너희의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상전..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거고..
나는 보냄을 받았을 뿐이고 그분이 나를 보낸거야..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렇게 살면 복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발 씻는 것을 비유로 해서 주님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계신거에요.
근데 예수님이 얼마나 그분은 상전이고, 나는 종이라는 것이 철저했냐면..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20장에 나와 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완전히 종으로 오셨기 때문에 종의 일을 할 뿐 아니라 종으로 왔기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모든 권위가 없어져 버린 거에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세요. 하나님의 본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내 우편에 누구 앉고, 상급을 주고.. 이런 걸 원래는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에요.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그 특권을 가지시고 그 영광을 가지셨어요.
다 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내신 자보다 크지 못하고,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해. 너에게 상급을 줄 수 있는 분은 아버지고.. 나는 종으로 나에게 맡겨진 것만을 나눌 수 있어. 그게 뭐냐면? 고난의 잔이야. 그 이상은 내가 할 수 없어.”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너! 나를 위해서 죽어야 돼. 나처럼 너도 죽어야 돼.” 그 얘기가 아니라..
“나는 끝까지 종으로 남아 있는거야. 그분이 상전이고, 나는 종이야.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줄 수도 없고.. 내가 줄 수 있는 건.. 내가 받은 몫.. 그게 뭐냐면? 고난의 잔이야. 그것만 줄 수 밖에 없어.”
처절하게 완전히 종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 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 그래. 내가 올라가서 하나님 옆에 앉으면 그때 내가 아버지 옆에서 너희들에게 이걸 줄께.” 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주님은 지금 “나는 그렇게 할 권리도 나에겐 이제 없어.”
종으로써 섬기고 있는 게 아니라 종 자체가 되어버린 거에요.
종으로 오셔서 섬기는 일을 하고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종 이라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권이나 어떤 상급을 줄 수는 없고..
내가 줄 수 있는 건.. 나에게 맡겨진 몫..
그게 뭐냐면? 고난이거든.. 그거 밖에 줄 수 없어. 이해가세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에요.
이걸 더 나아가서.. 완전히 아버지만이 상전이고, 나는 종이라는 것이 누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나오죠.
나는 무얼 너희를 섬기는 게 아니라.. 섬기는 존재.. 그 종으로 있는거야. 이게 지금 기가막힌 말이거든요.
하나님하고 동등한 에수님께서 완전히 존재 자체가 종으로 되어버렸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하나님으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는 거에요.
그러고 종으로써 줄 수 있는 것만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거에요. 이 땅에서는..
출애굽기 21장 보세요.
도대체 그 모습이 어디까지 가는 모습인지 보세요.
종이 되고, 종이라는 존재가 됐는데 예수님이..
무슨 말이냐면요?
상전이 있고, 종이 있어요. 그리고 종이 거기서 자기가..
옛날 이스라엘의 법은 뭐냐면.. 6년 동안 섬기면 7년째 자유해질 수 있어요.
이 종은 얼마든지 자유해질 수 있어요.
근데 이 종이 자유해지고, 자기가 갈 자리로 가길 원하지 않아요.
왜냐?
상전을 너무 사랑하고.. 내가 종으로 있는 동안에 삼은 나의 가족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종으로 그냥 남겠다.
남는데 영영히 종신토록 종으로 남겠다.
그래서 그 귀를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어서 종 된 표시를 하고, 영원히 종으로 사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여기서 이 종을 예수님으로 본다면..
이 상전은 하나님 아버지에요. 그리고 이 처자(아내)가 우리에요.
주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건.. 이 땅에서의 생활이 다 끝났지만.. 다 끝났지만..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이 가족들을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영원히 종으로 남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잠깐 33년 종으로 삼고 그 다음에 야! 하고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셔서
십자가에 귀가 문설주에 송곳으로 뚫은 것처럼 십자가에 못을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종으로 영영히 살겠다고 내려오신 거에요.
왜 그랬냐면?
사랑때문에..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고,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게 한거에요.
예수님의 원래 이름은 예수가 아니에요.
요한복음 1장에 보니까 예수님은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원래 이름은 예수가 아니라고요.
예수님이 예수라는 이름을 얻은 건 땅에 오셨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가셨어요.
예수님은 우리 같이 이렇게 생기신 분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은 하나님하고 똑같이 생기신 분이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하나님의 모습이.. 보좌에서 홍보석과 백옥같이 빛이 나고.. 막 그런 그 찬란한 모습으로 계신 분인데.. 그 분이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고요.
그러고 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으로 사셨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들을 하나님의 가족 만들려는 걸 알고..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죄값을 치름으로 종의 위치에 오셨는데..
문제는.. 그가 33년 반 그렇게 사신 후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
원래의 모습을 찾아서 올라가신 게 아니라.. 그대로 인간의 모습으로 올라가셨단 말이에요.
그리고 지금도 요한계시록 4장에 보니까 인간의 모습으로 계셔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요한이 봤더니.. 인자같이 생기신 이가..
그분이..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계셨던 그 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모습을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종의 모습.. 인간의 모습으로 영원히 사신단 말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이름이 말씀이었는데.. 말씀이였고.. 하나님과 동등된 이름을 가졌던 그 분이.. 예수라는 이름을 취해서.. 예수와 어린양이라는 이름을 취해서..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결국 그 이름으로 계속 사신단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예수라고 부르는데.. 그분의 원래 이름은 예수가 아니란 말이에요.
땅에 오셨을 때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으니까 그분이 포기한 건.. 그냥 보좌만 포기한게 아니라.. 자기의 이름도 포기했고, 자기의 모양도 포기했고, 자기의 권리도 다 포기한 그 종의 상태로.. 영원히 사시겠다고 지금 결정을 하신 거에요.
왜? 사랑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다 끝나서.. 예수와 얼굴과 얼굴을 맞댈 때.. 우리가 .. 그분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인자의 모습으로 계실 껄 보면.. 우리가 놀랠꺼에요.
“아직도 이 모습으로 계시네요.”
왜?
출애굽기 21장.. “내가 상전을 너무 사랑하고,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종의 위치에 계속 남겠습니다.” 하는 그 결심 때문에 그러죠.
이렇게까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종으로 너희 가운데 있는데.. 내가 종이 상전을 섬기는 것처럼 너희가 종과 상전의 비밀을 알고, 그 가운데서 너희가 행하면.. 너희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 라는 그걸 그냥..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차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감격이 없어요.
예수님이 버린게 무언지.. 예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한 게 무엇인지를 알면.. 우리가 지금처럼 냉냉하게 예수 앞에 앉아있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히브리서나 빌립보서에서 나오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시나 자기가 그것을 동등히 여길 것을 바라지 아니하고 종으로..
그게 그냥 시시하게 읽을 이야기가 아니라..
이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이 종의 모습이 바로 그건데..
문제는 뭐냐면? 그분이 영영히 내가 종으로 남겠다.
왜? 상전을 너무 사랑하고, 내 가족을 너무 사랑하니까..
주 너희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것이 그분의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을 하기 위한 것이.. 모든 것을 포기한 이유이기 때문에요.
그분이 포기하신 것이 바로 그거죠.
종으로 영영히 남겠다. 내가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남는게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영영히 남도록 지금 본인이 선택하신 거에요.
말이 안되는 이야기에요.
주님이 이 정도까지 우리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향한 감격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야 되요.
그런데 우리가 이런 걸 모르고 있는 거에요. 모르고 있는 거에요.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까지 부모와 옆에 사람을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나와보세요. 한 사람도 없을거에요.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 보좌에서 인자의 모습으로 계시다는 거.. 이게 이해가 안가면 예수님께서 어떤 종을 이야기 하는지 모르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가진 성경에는요.. 제가 가진 Complete Jewish Bible 에는 뭐라고 나와 있냐면?
십자가라고 안하고 막대기라고 이야기해요. stake 막대기.
그 막대기가 뭐냐면?
바로 이 문설주가 든 판대기에요.
십자가가 아니라 판대기에다가 송곳으로 귀를 뚫고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내가 영원히 종으로 남겠어요. 내가 상전을 너무 사랑하고, 내 가족을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아버지 당신을 너무 사랑하고, 내 가족을 너무 사랑하니까..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그 자리에 내려와서.. 내가 영원히 종으로 살겠어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에요.
사랑은요.. 값을 치루는 거에요. 값을 치루지 않는 사랑은 없어요.
주님이 지금 값을 치룬 것은 자기의 이름.. 예수가 아니란 말이에요 원래는..
예수가 그분의 이름이 아니란 말이에요.
원래는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을 취해서 그 예수로 그냥 살아가시고.. 지금도 그 이름으로.. 그 이름 아니면 어린 양으로 계신 거에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그 이름으로 계속 가실 거에요.
자기 이름을 포기했어요.
둘째는 자기의 보좌를 포기해서 땅에 내려와서..
우리는 생각하죠.. ‘자기의 보좌를 포기하고 내려왔으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이 가장 높은 자리에 모든 것에 밟을 수 있는 자리에 두셨어.’
맞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아직도 인자의 모습으로 계시단 말이에요.
종이 되기 위해서 취했던 그 옷..
종이 되기 위해서 취했던 그 육체의 형상으로 지금도 계시단 말이에요.
물론 부활체이니까 조금 다르긴 하지만.. 모양은 아직도 그 종의 모양을 취하고.. 그렇게 영원히.. 우리가 모든 것이 다 끝난 다음에 그분과 영원히 살 때.. 그분은 그 인자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거니실거란 말이에요.
그게 예수님께서 사랑 때문에 포기한 거에요.
자기의 생명.. 목숨만을 포기한 게 아니라..
하나님 되심을 포기해 버린거나 마찬가지에요. 그게 그분의 종 되심이에요.
그래서 그분께서 지금 요한복음 13장에서 하는 말이 뭐냐면?
“이 상전과 종의 위치.. 이것이 사랑에 메인 종.. 자기의 모습을 보고.. 이 상전과 종의 관계를 보고.. 너희도 이것을 깨달아서 이같이 행하면 복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보고 “죽기까지 너희가 종으로 살아.” 이런 뜻이 아니라 이 관계가.. 사랑의 관계 때문에 이렇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는 거에요.
사랑의 관계 때문에..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가 복음이다 라고 이야기하면 위험한 이유는?
십자가를 넘어선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이 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에서만 돌아가신 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이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수준에 포기가 아니고 그 정도의 값치름이 아닌거에요.
쉽게 이해하면.. 대통령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우리 집에 와서 종으로 사는데.. “영원히 살겠다. 대대손손 너희 집에 종으로 살겠다.” 하고 온거나 마찬가지인 거에요. 그리고 그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거와 똑같은 거죠.
그거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차원이에요.
그래서 이 출애굽기 21장에 이 종의 모습은..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종이며, 왜 종이 됐으며, 어떻게 영원히 종으로 남기를 고집하시는지가 나와 있어요.
지금 그러한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거에요.
근데 그 제자들의 발을 바라보시면서 더러운 발, 나를 버리고 도망갈 발로 바라보는게 아니라.. 복음을 들고 나갈 아름다운 발로 바라보기에 그 발을 씻으시는 거에요.
그럼 예수님은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도, 보좌도, 권위도, 자기의 모습까지 포기해서 영영히 종의 모습으로 있겠다고 결정했다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내 옆의 처자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처자가 우리거든요..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또 무얼 포기했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무얼 포기했나?
하나님 아버지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뭔지 아세요?
자신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 이름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 맨 처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건.. 하나님의 이름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이름을 어떻게 바꿔버리셨는지 보면 알아요.
출애굽기 3장 보세요.
모세가 출애굽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의 그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야? 그거 나한테 말해봐.. 그럼 내가 당신을 내가 뭐라고 얘기할까요? 당신의 이름을 뭐라고 얘기할까요?” 하는 장면이에요.
여기 하나님의 이름이 세가지로 나와요.
1 스스로 계신자
2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 여호와
근데 지금 이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히 기록하고 나를 영원히 기억할 내 이름이 뭐냐면.. 하고 말하는 그 이름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들어가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한테 자랑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계속 복 준다고 그러고.. 아브라함은 복을 준다고 그러는데 돌아서서 딴짓하고.. 아들을 준다고 했는데 돌아가서 하갈하고 자서 아들을 얻고.. 그러면 또 하나님이 돌아와서 복 주신다고 하면 또 아니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하면서 계속 넘어지는 25년의 삶 가운데 아브라함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니었어요.
아주 챙피해했을거에요.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요.. 만약에 오늘밤 주님이 나타나셔서..
“혜정아! 내가 너를 번성케하고 번성케 할께. 내가 너를 복주고 복 줄께. 내가 너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 받게 할께.”
그렇게 얘기 한다면.. 그 음성을 들었다면.. 내일부터 어떻게 사실꺼에요?
기가막히게 살겠죠. 그것 때문에 흥분해서 구름타는 것처럼 한달은 믿음이 단단하게 살꺼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다음 날 복 있는 자라서 모든 것을 주신다고 했는데..
자기가 죽을까봐 무서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거든요.
그러니까 누이라고 속이는 그 장면.. 그 다음 장면에 주님이 오셔서..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줄께. 내가 맹세하는데 번성하고 번성하게 할께. 내가 너한테 아들을 줄꺼야. 약속의 아들을 줄꺼야.”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다음 돌아서서.. ‘나는 무자하니까 아들을 얻어야지.’ 그러고 하갈하고 자거든요.
그걸 25년동안 계속해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못 참아서 할례를 해서 ‘넌 내꺼야’ 하고 표시를 했어요. 근데 돌아서서 또 실수해요. 또 자기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물었어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택하신 이유가 뭐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믿음이 너무 없어서.. 믿음이 너무 없는 자니까 택한 것 같아요.
25년 동안 믿음 있는 짓은 하나도 안했어요. 믿음 없는 자로 살았어요.
왜 그랬느냐?
우상숭배하는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내가 너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할께.” 할 때..
근데 그 분이 나와의 관계, 나와의 만남, 나와의 아버지로써 정말 나와 실질적인 관계를 누리면서 사는 인격체라고 믿지 아니하고.. 우상과 같이 생각하는 거에요.
그 말 듣고.. 그 다음에 그 말은 글쎄 들어서 좋은데..
살아가는 것은 자기 방법대로 살아가는 거죠.
믿음이 없는 자의 삶을 사는 거죠.
25년 동안 그렇게 살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도저히 못 참겠으니까 “이삭 내놔.”
그래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불림 받기 원해” 말이 안되요.
“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림 받기 원해.” 말이 안되요. 야곱 사기꾼이에요.
이삭?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내 누이라고 속이고.. 그렇게 살았거든요.
하나도 자랑스러운 자식이 아닌데.. 하나님은 뭐냐면?
“나는.. 사람들이 나한테 ‘당신 하나님 이름이 뭐에요?’ 그러면 ‘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라고 말하길 원하고.. 그렇게 기억되길 원하고.. 그렇게 영원히 기억되고.. 그렇게 기록되길 원한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우리가 직장에 갔는데.. 처음 만난 새로운 사람이..
“당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얘기하세요?
“이혜정”이라고 얘기하죠.
거기서 “나 하민이 엄마야. 하민이 엄마라고 기억해 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죠.
그렇게 얘기하면 똘아이라고 생각하겠죠.
근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거에요.
왜요? 우리가 뭘 제대로 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그러면 “나? 혜정이의 하나님.”
이렇게 말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렇게 영영히 기억되길 원해.”
왜? 왜 그래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요.. 당신의 이름이 뭡니까? 그랬는데..
용감하게 난 하민이의 엄마입니다. 하민이의 엄마로 기록되길 원하고.. 그렇게 영원히 기록되길 원해요 라고 말한다고 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하민이가 자랑스러우면 그렇게 얘기하겠어요?
이혜정이라는 존재보다 하민이가 더 귀하고, 하민이가 더 자랑스럽기 때문에..
하민이와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지기 원해서 그렇게 하는거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신거에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 라는 이름으로 충분해요.
근데 하나님은 그거 되기를 포기한 거에요.
그리고 이름을 뭐라고 또 하냐면..
“나는 이혜정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지길 원해. 영원히 그렇게 기억되길 원해.” 라고 말하는 거에요.
왜?
이혜정이라는 아이가 너무 자랑스럽고, 너무 귀하고, 너무 소중하니까..
“그걸로 자랑스러워서 그렇게 불려지기를 원한다.” .. 원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는거죠.
그게 우리 하나님의 심정인거에요.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게 뭐라고요?
하나님의 이름..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이름을 포기한 상태에 들어가는 거죠.
왜?
사랑 때문에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먼저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종이 상전을 너무 사랑하고 가족을 너무 사랑해서 영영히 종의 위치로 남겠다고 문설주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뚫어서.. 영영히 종의 자리에 있길 소원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마찬가지로 너무 사랑해서 그렇게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우리와 연결시킨 그 이름으로 포기해가면서 가시는 거에요.
근데 그 심정 안에 뭐가 있느냐고요?
그 심정 안에.. “내 사랑이 이렇게 크다.” 가 아니라..
그 심정 안에는 뭐가 있냐면?
“너는 그렇게까지 존귀한 자야. 내가 너 때문에 자랑스러워 하는 아버지야.”
그 얘기를 하시고 계시는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까지 하시냐고요?
하나님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포기하는 이유가 뭐냐고요?
도대체 이렇게까지 많은 걸 포기하는 이유가 뭐냐고요?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것도 포기하고, 자기의 보좌도 포기하고.. 자기의 이름도 포기하고, 자기의 모습까지 포기해서..
영영히 예수로 살아가고, 영영히 종으로 살아가고, 영영히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까지 포기하신 그 이유가 뭐냐고요?
그 이유가 뭐냐면.. 사랑 때문인데..
그 이유가 또 뭐냐면?
창세기 1장에 가졌던 하나님의 소원 때문인 거에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이미 집어넣고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뭐냐면?
복을 주시려고 함이에요.
근데 이 복이 뭐냐면?
여러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 제일 첫번째 뜻은 뭐냐면?
엎드리다.. 경배하다.. 이런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거 말고..
유대인 문화에서 말하는 복이 뭐냐면요?
관계에요. 관계..
근데 유대인의 문화에서 가장 큰 복이.. 가장 큰 축복이 뭐냐면?
가족으로 인정되서.. 가족이라는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복이에요.
그것만큼 큰 복은 없어요.
그것이 바로 요새 말하는 공동체 안에 있는 복인데..
그래서 그 사람들은 키부츠(집단) 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들이 생각할 때 가장 큰 저주가 뭐냐면?
그 가족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탕자의 비유할 때..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아버지가 왜 이렇게 기다리는 줄 알아요?
사랑을 넘어서서 그 아들이 가장 저주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제 가족으로 들어와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기 ‘복을 주시며’ 라는 말은..
인간을 만들었는데.. 왜 만들었느냐?
하나님의 가족 만들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원히 살게 만드는 거에요.
이 소원을 가지고 계시니까.. 그러면 이 소원이 있다는 것을 알면..
아까 출애굽기 21장에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가족을 너무 사랑해서 종으로 남겠다.” 하는 예수님의 소원은 이해가 가죠.
왜냐하면 그게 처음부터 그분의 소원이니까..
그리고 왜 이름을 주세요? 왜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으로 불리길 원해요?
가족이니까..
그런데 이 가족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게 사단이잖아요.. 그게 싫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점점 커지는 걸 말해요. 다른거 아니에요.
굉장한 이런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점점 커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냥 많아지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복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가족되게 이미 결정을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원히 살게 만들었다. 그게 영생이거든요.
근데 거기 못 살게 하기 위해서 사단이 딱 껴들어오져.
사단이 끼어들어와서 하와에게 한 게 뭐에요?
하나님에게 받은 것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받지 않은 것에 집중하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줬지요.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 때.. 모든 것을 다 줬지요.
산도 만들고, 바다도 만들고, 빛도 만들고, 모든 것을 다 만들었죠.
다 만들고.. 먹을 것 까지 다 줬어요.
하나님이 안 준거.. 딱 하나.. 선악과..하나에요.
근데 하와에게 옛 뱀이 와서 뭐라고 그러냐면?
“하나님이 준 거 그거 신경쓰지마. 하나님이 안 준거.. 하나에 집중해.”
그래서 하나님이 안 준거 하나에 집중하다 보니까.. 잘못된 관점이 생겨서.. 말씀을 잘 못 보게 되고, 잘 못 이해하게 되고, 그러다가 보니까 잘못된 욕심이 생기고..
잘못된 선택을 하려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의 가족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기도할 때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들에 집착해서.. 그거를 구하려고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디모데전서에서 그렇게 말하죠. 6장 6절.
자족할 줄 아는 것이 경건의 유익이다.
왜냐?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에 집중해서 이렇게 한 것이 무엇을 가져왔냐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져다 줬다고요.
그거 가지고 어떻게 됐냐면?
‘이것이 옳아. 저것이 글러.. 이거 해야 돼. 저거 안해야 돼. 쟤는 나쁘고, 얘는 옳아, 쟤는 틀려먹었고, 얘는 괜찮아.’
그렇게 하다보니까 거기서부터 간게 뭐냐?
행위를 주장하게 되죠. ‘그렇게 해야 돼. 그렇게 안 해야 돼.’
생명나무는 반대로 처음부터의 하나님의 소원을 알아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요.
그래서 관계를 추구하다보니까.. 무엇을 해야 돼. 무엇을 안 해야 돼가 아니라..
그 관계에서부터 어떤 존재가 되는가에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잖아요.
경배하는 자를 찾고.. 섬기는 자가 된다고 말하지..
섬겨라.. 경배해라.. 이렇게 말씀 안 하세요.
그러니까 생명나무의 지식은.. 생명나무에서 오는 관점과 생명나무의 생각은 뭐냐면?
그것이 관계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 가운데서 어떤 존재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소원에 의해서 보는 게.. 생명나무 이고..
내게 없는 것에 집중해서 그것을 얻으려고 보고 있는게.. 선악과의 생각이에요.
근데 그 선악과의 생각 때문에.. 문제는 그 선악과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할 때..
내게 없는 것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진다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하고 하나님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이 뭐냐면?
예수님께서 지금 요한복음 13장에서 발을 씻으신 것이 뭐냐면?
그 발이 다 버리고 도망갈 추악한 발..
근데 그 발을 추악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장 아름다운 발..
복음을 전하는 발로 바라보시는 그 예수님께서 그 발을 씻으셨어요. 뭐냐면?
선악과의 생각으로 그 발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생명나무의 생각으로 그 발을 바라보는 거에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에요.
그렇게 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사랑이 이루어져 가는 거죠.
요한계시록 2장을 보죠.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면 일곱 교회의 이야기가 나와요.
예수님은 항상 그런식으로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칭찬 좀 했다가, 혼냈다가.. 그 다음에 마지막에 결론으로 탁~ 굉장한 칭찬을 하시는 것이 그분의 대화법이잖아요.
근데 그분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혼내시기 위해서에요? 아니면 쪼금 칭찬하기 위해서에요?
아님 완전히 마지막에 탁~ 결론을 내기 위해서에요? 뭐에요?
마지막에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앞의 이야기를 다 하시거든요.
에베소교회를 칭찬했다가 약간 혼냈다가.. 마지막에 내는 결론을 보니까요. 이래요.
이게 뭐냐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가졌던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생명나무를 못 따 먹었거든요.
근데 주님은 우리가 생명나무를 따 먹어서.. 생명 나무의 생각과 생명나무에 의거한 존재로 하나님과 관계를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에베소교회에 주는 축복이 뭐냐면? 바로 이런거에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서 그 자리에서 생명나무를 따 먹으면.. 하나님과 소원.. 하나님의 소원 가운데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우리집은 맨션이고, 저 사람은 초가집이고.. 그 정도의 차원이 아닌거에요.
지금 에베소 교회..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축복을 보면요..
얼마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소원을 포기하지 않는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는 지를 볼 수 있어요.
그 다음에 보세요. 서머나 교회.
첫번째 사망이 에덴동산에 왜 들어왔어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선악과적인 관념으로 모든 것을 선택하다가 들어왔어요.
그게 아니라.. 이제는 생명나무로 넘어가서 이제는 하나님의 소원으로 들어가면 죽지 않는 거에요. 영원히 그분과 사는 거..
이것도 그러니까 하나님의 소원에 의한..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상급을 이야기하고 계세요.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있던 소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거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시려고.. 계속해서 일해 나가시는데.. 그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포기한거죠. 사랑의 값을 처절하게 치루신거죠.
또 보세요. 버가모 교회..
창세기 1장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DNA를.. 유전인자를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려함이라..
내가 우리 가정에 태어나면 누구의 이름을 가져요?
이씨 문중에 태어나면 이씨가 되요. 박씨 문중에 태어나면 박씨가 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전인자를 줘서 우리를 이미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에요.
근데 그 이름을 뺏겼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여기에 뭐라고 그래요?
새 이름을 주는데 그 새 이름이 뭐냐?
원래 너희가 가졌던 그 이름이에요.
이것도 창세기 1장의 소원을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또 보세요. 두아디라 교회..
보세요. 아까 뭐라 그래요..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 얘기에요.
새로운 것을 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부터 아버지가 주려고 했던 것을 이 일곱 교회에게 지금 계속 이야기하고 계신거에요.
“내가 그때로 돌이킬꺼야. 그때로 돌이킬꺼야. 그때로 돌이킬꺼야.”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가지 않게 하려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에덴동산의 그 소원으로 돌이키려고 만드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단은 우리에게.. 복음도.. 지옥가지 않는 것에만 만족하고 살게 만들고 있단 말이에요.
또 보세요. 빌라델비아 교회..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전반절)
왜 나갔어요? 처음에? 왜 나갔어요?
선악과 때문에 나갔어요. 그 나간게.. 주님 마음에 너무 아파요.
다시 나가지 않고.. 거기에 있게 하시길 원하시는 거에요.
라오디게아 교회..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 얘기하면 이렇게 얘기하죠.
토하여 버린다.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은 그 교회..
그 교회처럼 되지 말자.. 뭐 이렇게 얘기하는데..
하나님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냐면?
그게 먼저에요.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로 더불어 먹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렇게 먹고 살면서.. 그분이 주시는 것을 먹으면서.. 만물을 다스리고 살았던 곳이..
창세기 1장의 원래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에베소 교회와 이런 모든 교회를 보면서..
예를 들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어쩜..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 토해내고 싶은 교회..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선악과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결론이에요.
그러나 생명 나무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실 교회.. 하나님과 함께 다스릴 교회..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일곱교회에게 이렇게 야단치면서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말하는 거지.. 야단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만약에 결론이.. 내가 너를 토해내겠다. 차지도 덥지도..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건 선악과의 관점에서 끝나는 거에요.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는 생명 나무의 관점에서 말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주님께서 보시는 현상이 있어요.
내 제자들은 나를 다 버리고 도망갈 그 더러운 발.. 나를 버리고 다 도망갈 발.. 그거는 논리에요. 논리적으로 그건 버릴 발이에요. 도저히 안되는 발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그 소원에서 보면..
그 발은 복음을 전할 아름다운 발..
그래서 그걸 택해서 발을 씻으시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도 선악과의 논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관계..
그 관점을 택한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면서.. “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그렇게 불리길 원해” 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지금 망가져 있고, 찌그러져 있고, 지금 거짓말 하고 있고, 또 도망가고 있고 하는 그 아브라함을 보고 얘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 되어 있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얘기하시는 거에요.
그게 뭐냐?
‘지금 이 꼬라지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건.. 선악과에서 나오는 ‘옳아, 틀렸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선악과의 관점이고..
그 마지막 결론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는.. 생명나무의 관점이란 말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완전히 살 그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죠.
“상전이시여! 내가 상전을 너무 사랑하고, 내가 이 가족을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종으로 남겠나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스스로.. 그 종 스스로 생명나무를 택한 관점으로 나오는 말이에요.
그러지않고 그 종의 위치에서 그렇게 치사하게 살고 있는 그것만 보면 그렇게 말씀을 못해요.
하나님의 눈에는 가족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거에요.
근데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보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저는..
우리는 생명나무에 들어갔다고 얘기하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거라고 이야기하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요.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상대방이나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아니면 우리 부모를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냐는 얘기를 제가 하는 거에요.
솔직하게 어떤 생각들을 하고 계세요?
뭔가 부족한 것이 눈에 들어오잖아요. 그러지 않아요?
사랑은 값을 치루는 거고요..
가장 큰 값은 내 생각 자체를 버리는 거에요.
내 생각을 포기하는 건데.. 그 값이 뭐냐?
선악과적인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그것이 진짜 참된 포기에요.
예수님과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자기 생각과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시고, 생명나무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그렇게 보고 계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사랑의 값을 치뤄야 되요.
사랑의 값을 치루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값을 치루지 않고 무슨 사랑을 얻어요? 절대로 못 얻어요.
그 사랑을 홍야 홍야 하고 좋아하기만 하는게 사랑은 아니거든요.
정말 사랑하면 값을 치뤄요.
근데 진정으로 우리가 치뤄야 할 값이 뭐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선악과적인 사고방식에 그걸 포기하는 값을 치뤄야 되는 거에요.
그게 뭐냐면?
내 상황 가운데서 눈에 보이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이건 옳아. 저건 틀렸어. 이게 아직도 없어? 하는 그 상황..
그것이 선악과적인 사고 방식이에요.
그걸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사랑의 값을 치루지 않고 있는 거에요.
내 자식이나 내 아내나 내 남편을 보면서.. 그 가운데서.. 지금 안 되고 있는 그것만 크게 들어와서 이건 안되고 저건 해야되고.. 그것만이 더 부각된다고 한다면 그건 생명나무를 택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보고 그것을 훈련하고 고쳐줘야 되죠.
그러나 그 관점으로 자꾸 상대방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건.. 선악과의 관점이에요.
내가 그를 사랑하면 이제는 그렇게 논리적으로 봐서 ‘이것이 옳아. 그것이 틀렸어.’ 했던ㄷ 그 생각을 포기하는 거에요.
그러고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12장 2절에 그러죠.
그 마음이 생각이거든요.
그 생각이 뒤집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절대 분별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뭐냐?
“너희가 나의 가족으로 나와 영원히 살거야.” 인데..
그게 안보이는 거에요.
그것이 안 보이고.. 내 생각으로 ‘쟤는 틀려먹었어. 쟤는 이게 부족해. 쟤는 이것이 아직도 안돼. 저 사람은 이게 안돼.’ 라는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데..
그것이 선악과에서 온 생각이라고 하는 거에요.
만약에 주님이 우리를 선악과의 관점으로 봤다면.. 여기에 아무도 못 앉아 있어요.
만약에 주님이 제자들을 그렇게 봤다면.. 제자들의 발을 절대로 씻지 않아요.
주님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이름과 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사랑의 값을 치루셨어요.
근데 그분께서 지금 우리에게 “너희도 날 사랑해? 그러면 너희도 값을 치뤄.” 라고 이야기하는데..
‘너희 집을 갖다 받쳐’가 아니에요.
“니가 니 머릿속에 또아리 차고 있는 이 선악과적인 관점.. 그걸 버려.. 그거 버리지 않으면 안 돼.”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걸 버리지 않으면 안 돼..
근데 우리도요 알지만.. 우리 속에 이게 너무나도 자리를 잡고 있어요.
자식을 보면서.. “와!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갈 놀라운 아들..” 24시간 그렇게 보이세요? 그렇게 보이면 잠깐 보여.. 그 외에는 ‘쟤는 왜 일찍 안 일어나는거야.. 쟤는 왜 공부를 못하는거야. 쟤는 왜 대학에 떨어진거야. 쟤는 왜 저런거야..’ 그런 생각만 들지 않으세요?
부모님을 바라볼 때.. “와! 우리 엄마, 아빠..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갈 가장 짱인 부모님.’ 그렇게 보여요? 그렇게 안 보이죠.
엄마 볼 때 어떻게 보여? ‘왜 저렇게 얘기하는거야. 왜 나를 이해못하는거야. 왜 용돈은 이렇게 안 주는거야. 왜 이렇게 맨날 해라 해라 하는거야.’
그렇게 보이죠. 아닌척 하지 마세요.
주님은 지금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에게 와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날 사랑해? 그러면 그 생각을 버리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그 생각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요만큼 살고 있어요.
하나님이 그 생각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생각 버리고.. 요모양 요꼴인 혜정이의 하나님으로 살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억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나마 제가 숨쉬고 있어요.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에요. 아무도 저보다 나은 사람 없는 거 같아요.
다 똑같은거 같아요.
왜냐하면 고 머릿속에 오늘 몇 번이나 누구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다 보여요..
제일 많이 하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왜 요모양이야..’
근데 그런 판단이 어디서 나오냐면.. 선악과의 판단에서 나온다는 거에요.
그건 악하고 추한 생각이고요..
그걸 버리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가하면 내 안에 그 선악과가 어디서 나왔냐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지 않는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그 욕심에서부터 선악과의 관점이 출발 됐어요.
내 아들을 바라보는데.. 내 아들이 요런 아들이 되고 싶은데.. 그 아들에게 요게 없어. 고거를 주기 위해서 고거를 추구하기 위해서 고거를 가지고 그 아이를 잡아요..
그게 선악과라는 거에요.. 그게..
그게 꿈인 것 같죠? 아뇨. 꿈이 아니라 선악과에요.
그게 진정으로 꿈이면.. 그 꿈이 하나님이 가지신 꿈하고 맞아야 해요.
하나님의 가족.. 그래서 사실은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이잖아요.
근데 하나님의 자식을 감히 내가 어떻게 그렇게 판단해요.
엄마, 내 엄마, 내 아버지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이에요.
엄마가 저러니 이러니 따질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런 생각들이 우리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그 복을 현 생활 속에서 누리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냥 맨날 전전긍긍하는 거죠.
제가 이것을 무슨 교훈적으로 이렇게 합시다 라고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했나를 보고 거기서부터 나가자고 하는 거에요.
그분은 포기하셨어요.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시고, 자기의 꿈을 붙잡았고, 눈에 보이는 우리의 허물을 포기하시고, 우리를 덮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봤고,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포기하시고..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그냥 부둥켜 안고 영원히 가겠다고 결정하신 분이거든요.
우리가 너무 구질구질해서 우리가 어디 나가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에요.” 말하면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라고 불리기를 자초하셨거든요.
그게 바로 주님 스스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거에요.
나는 선악과의 관점으로 너희를 보지 않고 생명나무의 관점으로 봐..
그건 뭐냐면?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가족으로 영원히 나와 살 자로 만들어졌어. 그렇기 때문에 너는 이미 복이 있는 자야.”
그걸로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거거든요.
세상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이미 위기에 들어와 있는데..주님께서 이 위기를 앞두고 택하신 것이 뭐냐면?
그렇게 사랑하기로 결정한거에요.
그게 뭐냐면?
시커먼 제자들의 발을 보시며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보신거에요.
발을 씻으신 행동은 거기서부터 나온 결과에요.
그발을 그렇게 보지 않으면 정말 씻기 힘들었을거에요.
에휴! 나를 버리고 도망갈 발.. 그걸 씻는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의 발을 씻으면.. 자기 의만 올라가요.
‘아! 나는 의로와.. 나는 이렇게 섬겨.’
여러분! 예수님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분 같아요? 아니에요.
진짜 아름다운 발을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씻으신 거에요.
‘더럽다, 추하다, 내가 씻어서 이 떼를 벗겨야지.’ 그런게 아니죠.
우리가 만약에 자녀들을 그렇게 하면서 ‘아휴! 이거 정말 내가..’ 이런 마음으로 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주님도 똑같죠.
앞으로 위기는 심해질텐데..
우리가 만약에 상대방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진짜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자리에 가기 시작하면.. 나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아이들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근데 우리가 생각할 때.. 위기의 끝에 가서.. 예수님처럼 죽기 직전에 그때가서 끝까지 사랑하지.. 그렇게 하지.. 절대로 안되요.
지금부터 안하면 안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오늘부터 시작을 하는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걸 그런척하고 있으면 안되요.
그러나 태초부터 하나님이 가졌던 소원이 있잖아요.
그걸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거에요. 그걸로 그 아이를 바라보는 거에요.
그걸로 부모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그러면 그 안에서 중간에 가는 여정은 다 참아낼 수 있어요.
그 중간에 가는 여정 가운데에.. 좀 더럽고, 찌그러지고, 그런거 다 씻어줄 수 있어요.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이 그렇게 존귀한 자이기 때문에..
지금 이게 무서운 말씀이에요.
위기에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이 위기가 들어갈수록 아버지와 자녀의 마음이 갈라지고 있고요.. 그래서 그것이 돌이켜서 이제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 돌아서지 않으면.. 이제 저주라는 이야기를 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결해야 될 것은 이거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관계가 회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 주님께서 하셨던 방법이 뭐였어요?
우리를 판단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였어요..
그래서 더러운 발을 씻을 수 있었던 거..
더러운 발로 보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볼 수 있었던 거..
그게 아니고서는 이 관계가 회복이 안되요.
조금 더 아들 한번 더 끌어 안는다고 해결이 되나요? 아니요.
내적치유 같이 해가지고.. 날 용서해줘.. 그거 잠깐 한다고 해결 되나요?
그거 하고 그 다음에 또 그 눈으로 바라보면 해결이 안 되요.
근데요.. 우리 모두가.. 우리 속에 있는 시커먼 속을 알거든요.
‘내 아들을 죽도록 사랑한다. 정말 내 몸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다.’ 그러면서 내 속에 그 아들을 판단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있거든요.
물론 그 생각이 필요하죠. 그걸 가지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훈계해야 되니까..
그러나 그 생각을 그 아이가 그런 아이라고 정하기 시작하면 관계가 해결이 안 되는 거에요.
주님은 지금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데..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는데.. 회복 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하시는 것 밖에는 없는 거에요.
상전을 너무 사랑하고, 내 가족을 너무 사랑하니.. 귀에 문설주를 대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보면서 더럽다고 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라고 생각하고 그 발을 씻을 수 있었던 그 예수..
치사하고, 거짓말하고, 사기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 그 이름으로 내가 같이 지고 나아가길 원한다고 얘기하면서 그들을 판단하기보다는 꿈으로 바라보시는 아버지.
그것이 우리 사이에서.. 아버지와 자녀, 자녀와 아버지 사이에서 있어지지 않으면 관계는 회복 될 수가 없어요.
잠깐 차 한잔 마시고.. 뭐 스포츠 좀 하고.. 또 어디가서 영화본다고 관계가 회복되나요?
그 생각 자체가 뿌리 뽑기 전에는 관계가 회복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하신 거에요.
세상 사람들은 다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사랑의 값을 치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거고요..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시기를..
“너의 그 판단을 포기해라. 그 판단이 니가 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 없는 것인데 있기를 원하는 그거를 추구하면서 왔는데.. 그게 선악과의 생각이고.. 그것 때문에 너와 자식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것 때문에 너와 나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있다.” 그 얘기 하는 거에요.
부모님은 그걸 버려야 하고 자식들은 부모님에 대한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그리고 양쪽이 다.. 하나님이 정말 존귀히 여겨서 가족 삼기 원하는..
그래서 나중에 결국은 엄마도 아빠도 나도 다같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원히 살 그 존재.. 그것으로 서로를 봐주는 자리에 가지 않으면 온전한 관계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정체성의 회복이라고 하는 거죠.
내적 치유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서..
근데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봐주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안에서 실제가 되지를 않아요.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그 정체성으로 대해주고 그 정체성으로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주었던 복을 그 아이에게 풀어주고.. 그 아이는 또 그 복을 부모에게 대신 또 대답해 줄 그런 자리가 필요해요.
평소에는 그걸 할 수가 없어요. 너무 세월이 바쁘잖아요.
근데 오늘 이 자리에서 한번 그걸 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거기서부터 이제 내 아이를 바라볼 때.. ‘무엇이 없고, 무엇이 부족하고.. 쟤 이렇게 됬으면 좋겠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초적인 소원으로 바라보는 은혜를 바라보는 거에요.
그게 생명나무의 생각이에요.
아! 하나님이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께서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이 종으로 남겠다고 결정한 아이..
“하나님이 너무 사랑해서 나는 하민이, 하랑이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를 원해” 라고 말하는.. 그렇게 불림을 받은 그 아이..
그 아이로 바라보는 거에요.
그럼 그 아이가 좀 늦잠자고.. 뭐 이런 것이.. 그것은 고쳐야 되지만..
그것으로 그 아이를 정하지는 않아요.
그걸로 내가 전전긍긍하고 그걸로 기도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그 위에 것으로 넘어가서 하죠.
여러분!
중보기도와 중보가 달라요.
중보기도 보다 우리는 중보를 해야 되요.
사람들은 중보기도라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 중보 자체의 존재가 되어야 되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소원으로 그 사람을 봐주고 그 사람을 대해주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고 말하고.. 베드로로 대해줬어요.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가 됬어요.
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청소년들이.. 엄마 아빠에 대해서 무슨 요만한 불만이나..
‘다른 엄마는 이런데.. 왜 우리 엄마는 안 이래.’ 라는 그 부족한 생각..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이 내가 말한 선악과적인 생각이라는 거에요.
그게 없어지지 않으면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해결이 안 된다는 거에요.
근데 무서운 건.. 그게 해결이 안 되면 이 땅을 저주로 친다..
이 땅은 저주를 받을 거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땅은 끊어질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관계를 계속해서 나아가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거죠.
우리는 그 자리에 들어가야 되잖아요.
내가 내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도 선악과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뿌리뽑아야 되요.
이건 아내와 남편 사이에서 더 심한 것 같아요.
형제끼리도 그래요.
선악과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저게 없어. 이게 없어’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뿌리 뽑혀야 되요.
물론 그것들이 긍정적인 면에서 그 아이를 잘 성장시키기 위해서 훈련시키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아이를 계속 바라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데 거침돌이 된다고요.
지금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야기 하는거에요.
“관계를 회복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그러한 관점을 버리는거야. 그리고 생명나무의 관점을 가지는거야.”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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