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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로 부르심 1Fam Worship 2024. 4. 18. 09:00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죠.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고,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 한 분이죠.
아브라함도 모세도 야곱도 엘리야도 아무도 성경의 주인공이 될 수 없죠.
에스더서라고 해도 에스더가 주인공이 아니죠. 하나님이 주인공이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하나님의 이야기이죠.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이야기죠.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어떤 전략을 얻으려고 방법을 찾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나에게 없는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 그 채우는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시작해요.
방법은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방법을 찾느라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죠.
하나님이 그런데.. 하나님은 홀로 계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신가요?
하나님이 우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정을 더 충분히 주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인가요?
아니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나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 나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 나를 회복시키는 분.. 나에게 재정의 어려움이 있으면 재정을 주시는 분..
나의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거에요.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분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부스러기 일을 하시기로 선택을 하신 것 뿐이에요.
근데 우리는 그 부스러기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인 것처럼 하나님을 마구 부리고 있었어요.
근데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은 내가 그렇게 못 참겠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보이기 시작하시는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있어요.
하나님은 창세기 2장과 3장에 인간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구속이 필요하다고 하는 그 전부터 계셨어요.
창세기 1장에 계셨어요.
창세기 1장에는 인간의 타락이 없어요. 구속사는 거기 없어요.
그런가하면 창세기 1장이 쓰여지기 전에도 하나님은 계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한도 내에서만 생각하면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고 있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종이 되고 말아요.
근데 우리가 이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거에요.
이제 거기서 나와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자리에 나가야 되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습관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만을 찾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해하는 길을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하나님 자체가 보이기 보다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다니엘금식을 했으면.. 나도 다니엘금식을 하면 무언가 이루어질꺼다 하는 식으로만 계속 성경을 요리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하나님이 안보이는 거에요.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봐라. 내 마음을 봐라. 내가 너에게 나의 전체를 주려함이야.” 라고 말씀하고 있거든요.
하나님은 거기에 계속 우리를 두려고 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호소하시죠.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나의 필요에 맞춰서 그것을 적용해서 요리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거에요.
시편 81편에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라는 말씀이 있어요.
그 이야기도 우리는 그 본문에서 딱 떼어다가 문제점만 있으면..
입을 크게 열어. 그러면 하나님이 채워죠.. 자전거가 필요해? 입을 크게 열어..
그러면 하나님이 자전거를 줄꺼야.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은요.. 우리가 머리가 나쁜 걸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저 다른데 갖다 답을 두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머리 나쁜지 알아요.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못 알아들을줄 알기 때문에 씨뿌리는 비유 이런 이야기 하잖아요.
본문에도 답이 그 안에 있어요.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무엇을 채우는 지가 나와 있어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면 그 부스러기를 채운다는 게 아니라.. 부스러기도 채워줘요..
그러나 그것을 채우는 게 아니라.. 그 밑에 보면.. 11절에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니 입을 크게 열어서 내가 주려고 하는게 뭐냐면? 나야.. 내 소리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입을 크게 열어서 그분 자체를 가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원하기 보다는..
입을 크게 열어서 내가 지금 돈 몇 천만원이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어요.
그분 자체가 들어오면.. 그 외에 것은 다 따라와요.
안 따라와도 상관없어요. 그 분이 있기 때문에..
이 본문의 말씀은.. 입을 크게 열어.. 뭘 위해서 입을 크게 열어?
하나님 자체를 원하기 위해서 크게 열어. 왜냐하면 내가 나를 주기 원해서 입을 열라고 하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안 했다는 얘기에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한 게 아니라 자기들에게 없는 것을 달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어요.
출애굽해서 광야에서 지나가면서 “물이 없어요.”
이미 다 주셨어요. 애굽에서 구해냈잖아요. 자유를 줬잖아요.
하나님 자체를 줬잖아요.
그런데도 그 백성들은 “물이 없어요. 고기 없어요. 부추가 없어요. 그걸 주세요. 그거 주세요 그거 주세요.”
그 앞에 나오는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방신을 섬겼어요.
이 결과를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너희가 나를 원했으면 그 자리에 안 갔을거야. 너희가 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주기 원하는데..
부스러기를 원하고 있다가 보니까 이방신을 섬기게 됐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는데.. 그게 너희의 현재 모습이야.”
라고 이스라엘백성에게 말하고 있어요.
근데 이게 우리의 현재 모습이에요.
여기서 이제 나와야 되거든요.
하나님은 이만한 걸 주기 원하는데.. 우리는 요만한 콩고물만 먹고, 그 콩고물을 받으려고 알량알량하고 있는 거에요.
그 콩고물이 안 온다고 시험들어 있는 거에요. 그러니 얼마나 초라한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이 본문의 모습을 내가 필요한 것에 갖다 붙인단 말이에요. 우리가..
그런식으로 해석을 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안보이는 거에요.
내 뜻에 맞춰서 내 필요한 걸 채우기 위해서 말씀을 막 요리를 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요 말씀을 보는데 어떤 관점으로 왜 봐야하느냐를 말씀하시기 위해서요.. 이 성경을요.. 히브리 문화에서는 모든 문헌이 A, B, C 순으로 나가요.
알레프.. 베레트.. 이런식으로 순서대로 나가요.
시편 119편.. 그래서 A: 뭐라고 나오고 B: 뭐.. 쫙 나가 있어요. 그래서 이해하기 쉽게 해요. 처음은 어디고 끝은 어딘지..
그런데 성경.. 이 두꺼운 성경의 맨 앞이 알레프.. 영어로 하면 A, 한글로 하면 ㄱ 으로 시작해야 되는데.. 베레트로 시작해요. B로..
‘가’ 가 없고 ‘나’ 로 시작해요.
왠지 아세요?
“그 앞의 이야기는 너희가 몰라. 그 앞에 이야기는 몰라. 그렇지만 내가 너희가 그 앞의 이야기를 모르기를 원하지 않아.”
그 앞의 이야기가 뭐냐면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한 이야기들..
그분들이 꿈꾸었던 것들.. 그분의 마음에 있는 소원..
그분이 창세기 1장을 왜 시작하게 되었냐 하는 그 이유..
그런 것들이 거기에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알지 않기를 원하느냐?.. 아시기를 원해요.
왜냐면 그걸 알아야 이 뒤의 이야기를 알 수 있으니까요.
어린아이가 태어나면요.. 자기의 그 출생 증명서에 아버지 이름을 양 00.. 엄마 이름은 이 00 이렇게 써 있다고 쳐봐요.
그럼 그 아이는 그거만 알아요.
그 아이는 태어나서 엄마 아빠가 옛날에 어떻게 연애했고, 아빠가 어떻게 공부했고, 어떻게 해서 결혼했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몰라요. 전혀 몰라요.
그런데 엄마, 아빠와 관계가 깊어지기 시작해서 이제 부모님이 옛날 이야기를 해주죠. “니 아빠가 나한테 이렇게 우습게 청혼했단다.” 그러면 그 아이는 그 현장에 없어도 그걸 알게 되요.
왜 알게 되요?
관계가 깊어져서 대화가 이루어지니까 알게 되요.
그 관계가 깊어져서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면 이제 아빠와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해요. 똑같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지기 시작하고, 그분과 대화가 시작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마음의 소원과 이 창세기 1장 이전의 이야기들도 말씀해주기 시작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 사정이에요.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속마음.. 그것을 성령 밖에는 모른다.
왜?
성령은 그 전부터 함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우리도 알기 원하세요.
근데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에 “내가 이전에 이런 소원을 가졌기 때문에 너를 만들었어.” 하고 딱 나온다고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것들을 보지 않고 어떻게든지 뭘 좀 하나님을 이용해서 뭘 얻어내려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뭘 좀 얻어내려고..
하나님이 마치 우리에게 무엇을 줄 책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대하고 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 동전 하나 딱 던져주면서 우리가 헤헤 거리는 걸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가지므로 하나님의 원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죠.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 이야기에요. 성경 66권은 다 하나님 이야기죠.
그런데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이 사람을 포함시키기로 결정을 하신 거에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 혼자 이야기.. 아무도 등장 안 시켜도 되는데..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사람을 여기 속에 넣기로 해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 우리를 보이기를 택하신 거에요.
그리고 그 이유가 창세기 1장에 나와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그 아름다운 속성과 사랑과 연합에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인간과도 가지길 원하고..
그래서 인간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가족되게 해서 영원히 살려 하심이에요.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영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우리 안에 집어 넣었단 말이에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가져요.
어떤 시인이 이렇게 썼죠.. 발가락이 닮았다.
발가락 하나라도 닮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넣고 그 다음에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복 준다.” 첫마디가 “내가 너에게 복 줄께. 그리고 너.. 내가 복을 주니까 생육하고 번성해. 땅에 충만해. 정복하고 다스려.” 라고 말하세요.
명령이 아니고 약속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너를 복 줘서 내가 널 내 가족 되게 했으니까 너는 당연히 다스리고 정복하고 사는거야.”
명령이 아니에요. 약속이에요.
근데 그 복이라는 개념이 깨졌기 때문에 복음이 뭔지도 모르는 거에요. 그 복음이 뭐냐면?
‘관계’ 거든요. 관계.
유대인 문화에서 복이라는 게 관계 거든요.
가장 큰 축복은 뭐냐?
하나님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지 하나님 가족에 속해야 되요.
하나님 가족에서 떨어져나가면 가장 큰 저주에요.
하나님 가족이라고 하는 건..
하나님과 예수, 성령과 내가 하나 된 가족.. 그런가하면 하나님의 가족 된 사람들과 또 하나되는 거.. 그것이 또 하나님의 가족이죠.
그것이 점점 커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죠.
하나님은 그걸 원하죠.
그래서 창세기, 역대상, 마태복음에 보면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 이야기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그거 왜 쓴지 아세요?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쓴 거에요.
가족이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가족으로 살기 원하는데.. 가족으로 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죠. 아담이요.
왜 떨어져 나가요?
하와가 .. 하나님이 주신 거.. 하나님 자체를 이미 주셨는데.. 하나님 자체.. “가족이야..내 자신의 내 유전인자를 너에게 넣어서 너는 나와 함께 영원히 살 자야.” 라는 그걸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주지 않은 쪼금한 부스러기.. 선악과.. 그걸 원하다가 보니까.. 그것을 구하다가 보니까..
거짓된 욕심이 나와서.. 거짓된 관점과 이해가 나오고.. 거짓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요.
근데 문제는 하와가 선악과를 얻기는 얻었거든요.
그게 무서운 거에요.
우리도 우리에게 없는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거 주세요 이거 주세요” 하면 그게 얻어질 수는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그걸 얻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다고요.
선한 욕심이 아니면.. 선한 소원이 아니면..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미 주신 것을 보고 감사하는 것이 없이 나에게 주지 않은 것만 추구하고 있는 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간구하라고 이야기 하죠.
그러나 이것이 주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간구가 먼저 이루어지면.. 그건 악한 욕심이 되고요..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거거든요.
그것이 선악과의 관점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 관점에서 생명나무의 관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에게 영생이라고는 없어요.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영생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그냥 말하죠. 그냥 사영리 읽고 주 예수 영접하면 영생..
아니에요. 아니에요. 거짓말이에요. 절대 아니에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와야 영생이 있어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와서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게 영생이에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하나님과 떨어져서 영원히 사는 게 멸망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원히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지금 체험하며 살 수 있는 것이 상급이에요.
이 땅에서 그것을 한번도 체험하고 살지 못하는 것이 축복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을 통해서만 그 가족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들이 오셔서 처음에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들이 되잖아요. 근데 예수님이 오시기 처음에도 마태복음 1장에 낳고, 낳고, 낳고 나오죠.
왜 그래요?
가족의 비밀이기 때문에 그래요. 가족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에요.
가족 가족 가족 가족 그 맨 위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가족..
그러니까 우리가 때때로 말하는 조상에게서부터 오는 죄..
그런거 우리에게는 해당이 안되요.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그것을 씻으려고 애쓰죠.
왜냐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나는 내 조상의 가계에 있지 아니하고 옮겨서 하나님의 가계에 가거든요.
그러면 이 조상의 죄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거에요.
이미 내가 옮겼음을 아는 게 믿음이에요.
그렇게 하면 원수가 우리를 어떻게 하지를 못해요.
근데 우리는 스스로 메임의 자리에 들어가는 거죠.
여러가지 모양으로 우리는 메임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해요.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에게 메인 자로 살기 보다는 세상과 나의 생각에.. 선악과의 생각에 메인 자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은 거기에 두고 싶어하지 않으시죠. 거기서 우리를 해방시키길 원하시죠.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이야기에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넣어서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었는데.. 사단 때문에 그것을 떨어져 나가고.. 전전긍긍하시는 주님께서 또 아브라함을 택하고, 또 누구를 택하고 그러면서 가족을 계속 만들어 나가려는 단계..
그래도 안되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양장을 입혀.. 양을 받아서.. 아들이 되게 하시고.. 아들로 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랑의 약속을 하기 시작해서 “당신이 나의 전부에요.” 하는 것이 신부거든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신부의 이야기로 끝나요.
9절에 이 복도 바로 그 복이에요. 하나님의 가족되는 복..
6절에 보면 수 많은 증인들과 천사들이 많은 물소리와 같이 허다한 무리들이..
할렐루야 노래하면서 기뻐한다고 나와 있어요.
왜 기뻐하는지 이유가.. 보세요. 왜 기뻐한다고 되어 있어요?
7절에 보면.. 왜 기뻐해요?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뭐가 준비됬으니까 기뻐해요?
신부가 준비되었으니 기뻐한다는 거에요.
왜냐면 신부가 준비되어야만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이제 처음에 그 꿈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이 완성되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 허다한 무리 속에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다 속해있어요.
그 사람들이 거기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신부가 예비되기를..
신부가 세상에서 결혼식을 할 때 결혼식의 주인공이 누구에요?
신랑과 신부에요.
그런데 누가 들어올 때 일어서요? 입장 누구할 때 일어서세요?
신부가 입장할 때 일어서요.
사람들이 와서 누구를 더 보기 원해요?
신부..
왜요? 이쁘니까?..”그게 비밀이에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가 하나님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신부를 들어올려서 신부가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그래서 그 신부가 예비되니까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거에요.
신부가 예비되어야 마지막이에요.
신부가 예비되어야 되요.
가족이라고 말할 때요. 엄마, 아빠, 자녀가 있죠.
엄마, 아빠.. 신랑, 신부 그리고 아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있었고, 아담이 있었고, 하와가 있었어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 하와는 아들의 신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신부..
이게 아들과 신부.. 그것이 다 겸비되어야 가족이에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아들은..
예를 들어 하민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 품에 있으면서 아빠한테 전화해서 “아빠! 여보세요 양모세씨. 내가 당신 집에 태어나길 원합니다. 내가 당신과 언약을 맺고 내가 거기 태어날께요. 내가 싸인하고 당신도 싸인하세요.” 그러고 태어났어요? 아니죠. 그냥 태어났죠.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언약이라는 것이 없어요.
근데 신부와 신랑의 사이에는 언약이 있다고요.
그게 지금 무섭고 떨리는 거에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아들이 탕자가 되서 나가도.. 사실은 같이 살지 못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탕…자죠. 아들은 끝까지 가요.
그러나 아내와 남편의 사이는요.. 사랑의 언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랑이 깨지면 끝이에요.
여자가 정절을 안 지키면 끝이에요.
약혼을 한 신부가 신부로 들어가기 전에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끝이에요.
여기서.. 그래서 보면.. 성도들의 착한 행실, 선한 행실.. 이게 뭐냐면?
정절을 얘기해요. 신부의 정절..
그래서 이 땅에서 신부들이 정절을 지키는 것이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이 성경에 나와있는 많은 하나님의 아픈 이야기는 뭐냐면?
이 신부로 정절을 지키고 살아갈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야기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려고 몸부림 치시는 이야기..
그 이야기들이 여기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 있는 거에요.
왜 그러냐?
이건 깨질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깨지지 않게 주님께서 계속해서 찾아오고 찾아오고 찾아오고 하시죠.
사랑의 언약을 던지고 던지고 던지고 하시지만.. 정절을 지키지 않으면.. 끊어지는 거에요.
정절을 지키지 않으면 끝나는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가장 예민한 이야기고..
신부의 이야기라고 하는 건.. 가장 귀한 이야기이고 가장 예민한 이야기에요.
성경의 마지막을 신부로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을 봐야 되요.
그런데 이 신부의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가.. 이 신부와 신랑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이야기가.. 성경책에 많이 있어요.
근데 그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갈등과 신부가 겪는 광야와 환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많은데..
그것이 바로 아가서이고, 룻기고, 요한계시록 이에요.
아가서는 처음에 철없는 여자가 그냥 있다가.. 신랑의 사랑을 알고.. 이제 신부로 들어가기로 하는 것이고..
룻기 그 다음 편이고요.. 요한계시록은 그 다음 편이에요.
왜냐하면 아가서는 나와 주님의 이야기에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둘만의 사랑이에요.
어려움도 술람미 여인 혼자 겪는 광야에요. 거기서부터 신부가 되죠.
룻은 뭐냐면요?
나와 너.. 나오미와 룻.. 유대인과 이방인..
나와 너가 주님과 함께 가는 관계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환란도 같이 겪는 환란이에요. 두 민족이 같이 겪어요.
요한계시록은 우리 겪는 환란이에요. 우리와 주님의 관계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신부는 ‘나’가 아니에요. 이거에요.
그러니까 신부가 ‘공동체적인 신부’, ‘교회로써의 신부’가 되지 않으면 안되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에 머물러 있어요. 아가서 사랑 사랑 하고 있는데..
아가서는요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에요.
신부가 진짜 어디서 시작해서 왜 그런가 하는 그 본질이 들어있고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신부를 택하지 못하고.. 신부가 어디까지 가야 신부가 되는가.. 하는 이야기가 아가서에 써 있지.. 그냥 좋고 좋아.. 나를 이쁘다고 그래.. 이쁘다 이쁘다 이 얘기가 아니에요.
근데 그렇게만 듣게 하는 것도 미혹이고요..
그것에 만족해서 아가서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도 미혹이에요.
아가서를 나오면 룻으로 가야 되요.
그러나 아가서를 거치지 않고 룻에 가면 문제가 되요.
그래서 신부가 되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 새사람, 유대인의 이야기..
이런거를 알아서 막 절기 지키고 이러는 거.. 문제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기본이 없이 그 다음 단계로 뛰어 간 거거든요.
그러나 거꾸로 아가서에서 정말 신부가 된 사람이 나만 좋다고.. 이러고 있으면 그것도 문제 있어요. 거기선 해결이 안되요.
룻으로 가고 요한계시록으로 가야 되요.
그것이 우리가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여정이에요.
근데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가졌던 소원을 알고,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또 나와요.
마지막에 하나님이 가져오려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의 그 영광이거든요.
그래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야 되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이 그렇게 영원히 살기 원한다는 그 소원 안으로 돌아가야 되요.
그런가하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선악과의 관점에서 생명나무의 관점으로 바뀌어야만 거기 갈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아가서에 나오는 여자도 그 과정을 겪어요.
아가서 한 번 보세요.
아가서 1장에 보면 여자가 질문이 있어요.
“내가 진정 그 자리에 가기 원하고, 내가 당신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젠 당신이 어디서 쉬는지.. 양떼들은 어디에 있는지.. 그 원래 원초적인 당신의 소원이 무언지 그걸 알기 원합니다.” 하고 이야기 해요.
근데 그 답을 알 길이 없어요.
근데 나중에 그 답을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2번의 광야를 더 거치게 되요. 광야를 거치게 된 다음에 이 여자가 이렇게 말해요.
여기 동산이 뭐냐면? 바로 에덴동산 원래 그 자리에요.
그 자리에 가보니까.. 그 자리인지 알고 보니까.. 그분이 양떼를 먹이는데 백합화 가운데서 먹이는구나..
백합화가 신부거든요. 신부들 가운데서 이것을 먹이는구나.
그래서 이 동산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알기 시작해요.
이게 바로 그 동산이에요.
그리고 이것을 깨닫고 나아가는 그에게..
이제 신랑되신 그분께서.. “너는 이제 그 동산에 거한 자야.” 하고 불러줘요.
이게 바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원초적인 소원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그런가 하면요.. 이 여자는 선악과의 관점에서 생명나무의 관점으로 관점이 바껴요.
사과나무 앞에 앉아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것 같지만.. 이 차원은 내가 따먹을 단계에요. 아직은.. 선악과의 관점이에요. 그래서 아직은 몰라요.
그게 아니라.. 내가 따 먹는게 아니라.. 그분이 나를 깨워서 따 먹여줘야 해요.
내가 따 먹은거 가지고는 안 되요. 내가 따 먹은 거 가지고는 내 필요만 채울 뿐이에요. 그거 가지고는 그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후에 광야를 거친 후에..
그 똑같은 자리에서 이제 주님이 그를 깨워서 먹여요.
그래서 여기서부터 생명나무의 관점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 아가서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아가서를 가르치죠.
아가서는 가르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에 가장 예민한 이야기이고, 가장 갈등이 많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만 할 뿐이에요.
정답이 없어요.
내가 어느 자리에 있던지 그 자리에서 내가 지금 깨달은 것만을 나눌 뿐이에요.
어떤 분은 제가 깨달은 것보다 더 깊은 자리에서 깨달은 분이 있을거고..
어떤 분은 그게 아니고 또 다른 관점에서 깨달을 수 있어요.
사랑이라는 건 개인적인 거거든요.
그래서 그 분이 날 여길 만졌어. 난 아니 여길 만졌어.. 이렇게 얘기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누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이건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이야기에요.
그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가서 5장에 보면 이 여자가 질문을 하거든요.
“내가 병이 났어. 그 사람을 좀 찾아주고, 그 사람에게 가서 내가 그 분을 사랑한다고 말해줘.” 이게 안 되는 거에요.
개인적인 사랑이니까 자기가 얘기해야지.. 딴 사람에게 말해서 “가서 얘기해줘” 이게 통하지 않아요.
이게 굉장히 간절한 애원 같지만 사실은 이것 가지고는 안 되는 거에요.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을 먼저 신부된 자들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가르쳐줄 수가 없는 거에요.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함께 찾아가자. 함께 나누자. 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냐면?
신부가 그 다음 신부와 함께 찾아가고, 함께 찾아가고.. 이러면서 점점 더 같이 알아가고, 알아가고, 알아가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알아가는 과정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가 절대로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신부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차원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
신부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만 보여도 내 마음은 너무도 기쁜 거에요.
그리고 그분하고 같이 가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내가 나눈 것을 알려주면서 같이 점점점점 알아가기 원하는 거에요.
그런데요.. 사람들이 능력을 원하고, 무엇인가 좀 더 기름부음을 원하고, 무엇인가 더 은사를 원하는 사람들은요.. 보니까 서로 질투하고 “나도 저거만큼 나는 왜 못 받았어. 나는 더 받기 원해. 저 사람이 간 자리에 나는 왜 못 가.” 하고 막 질투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다가 서로 싸우고 경쟁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나 신부와 신부 사이에는요.. 그냥 한없는 사랑이 있을 뿐이에요.
왜냐하면 이게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의 소원이고, 저 사람이 그분의 소원에 “예” 한 것만 해도 너무 기뻐서 그냥 같이 달려갈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사랑만 생기는 거에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는 거에요. 더이상 경쟁은 없는 거에요.
‘니가 나아. 내가 맞어.’ 이런게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여자가 이 여자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그가 약하면 약하다고 혼내는 것이 아니라.. 거기다가 내가 이걸 세워주고, 이걸 달아주고 이렇게 할꺼야..
왜? 이것이 하나되는 역사가 여기에 일어나기 때문에요.
근데 왜 하나가 되고.. 왜 이렇게 서로 끝없이 사랑하게 되느냐 하면..
그분을 너무 사랑하고, 그분을 너무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서..자연히 사랑하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신부의 모임이에요.
이게 안 되면 이게 안 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신부는 뭐냐면?
야! 주님의 소원이 뭐냐면.. 한사람의 신부를 더 얻는거야.
그런데 보니까 여기 청혼을 받았지만 아기장 아기장 기저귀차는 신부가 하나 있어요.
너무 이쁜거죠. 너무 이쁜거죠.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요한이 그럤죠. “그분이 신부를 데려가는 거.. 그것이 자기는 맘에 너무 기쁘다.” 옆에 있는 들러리도 그러는데.. 신부가 신부를 볼 때는 더 기쁜거죠.
그러니까 이 첫째계명과 둘째계명도 사실은 이렇게 될 때 이루어지는 거지..
하나님을 진짜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못 하거든요.
그런데 이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소원을 알기 시작하니까.. 내 옆에 똥을 찍찍 싸고 얼굴은 시커멓지만.. 그래도 신부로 걸어오는 자가 흉되기 보다는 아름답게 보이는 거에요.
그러나 능력 추구해서 나아가고 어떤 사역의 도구로 삼는 사람은 그 사람을 보면 ‘어휴.. 찔찔해.. 정말 못 쓰겠어.’ 짤라내고 다른 사람하고 일하죠.
이해가 가세요..
그러기 때문에 ‘검으나 아름답다’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 보러만 검으나 아름답다가 아니라 우리끼리도 그게 이루어지고야 마는 거에요. 진정 그걸 깨달으면.. 이걸 깨달았고요..
이 신부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소명이 마지막에 신부를 길러내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러니까 다른 복음이 있다는 거에요. 다른 복음..
근데 참 복음은 뭐냐면.. 이 앞에 있는 이 신부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소원과 연결된 그것이 참 복음 이에요.
십자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까지 나아가는 거..
하나님의 원래 소원으로 나아가는 거..
여기서 뭐라고 얘기해요?
내가 신부를 만들려고 하고, 중매들려고 하는 것이 내 열심이 아니라 누구의 열심이라고 나와 있어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나와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열심이야.”
이게 하나님의 열심이라서 그것을 안 바울은 그걸 하기 위해서 자기의 소명의 길을 가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전도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중매쟁이에요.
그러고 사도바울이 말하죠.
“내가 이렇게 가는게 어리석어 보이지.. 내가 더 은사를 추구하고 내가 더 능력을 추구하고 내가 백만명을 전도해서 이름을 내는 것이 더 괜찮아 보이지. 근데 나 그거 포기하고.. 한 명의 신부를 세우는 자리에 갈꺼야. 바보같아 보이지.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열심이야.”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예민한 문제가 신부를 길러내는 이야기고, 신부는 복음하고 떨어져서 생각할 수가 없고, 요한계시록에 마지막의 결론은 신부를 세움으로 결론이 지어져요.
그것이 아가서의 이야기에요.
아가서의 이야기는 출애굽기하고 참 비슷해요.
출애굽이 있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택했어요. 근데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종노릇하고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엄마도 종이었고, 우리 할아버지도 종이었고, 우리 증조할아버지, 고조 할아버지.. 다 종이었으니까..
내가 태어나니까 나는 종이야.. 태어났더니 나는 노예야.. 제가 우스게 소리로 말해요.
입에 다 지푸라기를 물고 나왔어. 벽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잘 태어난 아이는 입에 은수저를 물고 나왔다 그러죠.
그 사람들은 태어나니까 이미 지푸라기가 입에 있는 거에요.
그래서 노예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노예로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노예로 살면서 오늘 내가 벽돌 좀 많이 구워서 이 보리떡이 좀 많아지면 즐거워.
벽돌 하나 좀 더 구우면 좋겠어. 쪼금 덜 피곤하면 좋겠어. 쪼금 더 집이 나아지면 좋겠어.. 그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그게 노예생활이라는 것을 모르고.. 종 살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날..
‘이게 내가 이렇게 살아가면 안 돼.. 이건 내가 사는 삶이 아니야’ 그렇게 느끼기 시작해서 출애굽기 2장 23절에 보니까 하나님께 이제 부르짖기 시작해요.
“이거 아니잖아요. 힘들어요. 나 이렇게 종살이 하면서 살게 만들어진거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해요.
그 소리를 내기 전에는 안 구해요.
자기들이 노예 생활 하면서도 노예인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는 안 구해줘요.
노예인지를 알 때.. 이 종살이가 싫어질 때.. 거기서 구하죠.
거기서 구해가지고 나가서 광야로 데리고 가요. 홍해를 건너죠.
홍해 속에서 바로가 가지고 있던 그 소유권을 수장시켜 버리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끝나느냐? 아니요.. 또 시내산까지 가죠.
시내산에 가서 하나님이 그렇게 얘기하죠.
“내가 너와 언약을 맺으려고 해.. 너는 나의 백성.. 나는 너의 하나님.”
근데 거기서 언약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 언약은 사랑의 언약.. 신부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게 언약이죠.
그렇기 때문에 시내산에서 한 것은..
그냥 평범한 백성이나 아들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부를 부르는 언약이에요.
우리말로 하면 이런거에요.
“나는 너만 사랑할께. 너는 나만 사랑해.”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예.” 하죠.
신랑의 청혼에 “예” 했다고요..
“예” 했기 때문에 광야를 가요.
그래서 광야에 가면서 헤매는데.. 광야를 가면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요?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나의 신랑되신 그분 때문에 모든게 아무상관 없어.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분에게 주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구하면서 광야를 가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러고 있는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신부의 자리에 분명히 데리고 오실거죠.
그들이 진짜 온전한 사랑의 관계에 들어오면 예수가 그 신랑이라는 걸 알게 될 때 거기 가죠.
아가서도 똑같아요. 아가서의 여인을 보면요 이렇게 나와 있어요.
여기에 보면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눈을 흘기고 나를 일 시켜먹었다고 나와요. 오빠를 누구에게 소개할 때요.. “우리 어미의 아들입니다.” 라고 소개해요?
뭐라고 소개해요? 오빠라고 소개하죠.
이게 어미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거에는 그 가정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어쩌면 아버지는 다르고 엄마는 같을 수도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어미의 아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고 이 여자에게 그렇게 구박해서 일을 시킬 수 밖에 없는 어떤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종노릇하는 거죠.
이게 첫번째 광야에요.
태어나서 이런 가족관계의 문제 때문에 이미 종노릇으로 살고 있는 거..
여러가지 종 노릇을 하고 있죠. 집에서 그렇게 종노릇하고 있고..
그런가하면 어쩜 그렇게 살면서도 종인지도 모르고 얼굴이 시커먼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입맞춤이 주워진 거에요.
말씀이 갑자기 온거에요. 기름이 조금 부어진 거에요.
그러다가 보니까.. 자기를 보니까.. 자기가 검다는 걸 알게 된 거에요.
근데 그분이 아름답다고 하는 거에요.
‘내가 그러니까 내가 이 노예생활을 할 사람이 아니구나. 내가 이 종살이 할 사람이 아니구나.’ 출애굽하고 똑같아요.
‘내가 여기서 종노릇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 그러면서 손을 내밀어서.. 7절에서 그렇게 말을 하는거죠.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당신이 양떼를 쉬게 하는 곳이 어딘지 나를 거기로 데려가세요. 내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요.” 라고 요청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 종노릇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요.
내가 스스로 나의 종 된 것도 있고요.. 종교적으로 종 되는 것도 있고요..
가정생활에서 종 된 것도 있고요.. 나의 허물의 종.. 나의 상처의 종.. 나의 가계에 이르는 종.. 내 사업장에서의 종..
그런 여러가지 종노릇 하는게 있어요.
여러가지 상에서 내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거에요.
근데 어쩌면 우리 가운데 가장 큰 건.. 종교적인 종일 거에요.
종교 생활하는 거.. 그 가운데서 종노릇 하고 있죠.
‘십일조 바쳐야 돼. 헌금해야 돼. 뭐해야 돼. 뭐해야 돼. 뭐해야 돼.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해.’
종노릇하는 거죠.
그 종노릇하는 것에서 하나님은 꺼내고 싶어하시죠.
근데 꺼낼 수가 없어요. 이 여자가 그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검으나 아름답다.’ 고 되어 있잖아요.
유대인 문화에서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뭔지 알아요?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여인이 가장 아름다운 거에요. 그래서 결혼식 가기전에 에스더가 6개월을 몰약바르고 난리치죠.
왜냐? 얼굴을 최대한 창백하게 만들어야 되요. 그래서 집에서 나가지 않아요. 햇볕을 안 봐야 되요. 새 하얗게 돼 가지고 있을 때..눈, 코, 입은 좀 삐뚤어져도 되지만 얼굴이 뽀~해야지만 이쁜 신부에요..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결혼하기 전에 최대한으로 집에서 안 나가요.
몰약 바르고, 피부를 다시 돋게 하고 난리를 하는데..
이 여자는 햇볕에 그을러서 얼굴이 시커매요.
시집가요, 못가요? 못가요..
그런 주제에 있는데.. 입맞춤이 오고, 그 분이 나타나서 갑자기 아름답다고 그러니까 이게 지금 난리가 난거죠.
그러면서 “나 여기서 노예 생활 더 이상 하기 싫어요. 당신이 양 떼 먹이는 곳이 어디에요? 나 노예생활 하느라고 너무나 지쳤거든요. 당신이 쉬게 하는 그곳이 어디에요? 나 거기 가고 싶어요.” 라고 말을 해요.
제가 지금 보는 관점은요.. 아가서를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보는 거지.. 아가서를 여인의 관점으로.. 여인을 주인공을 보고 있지 않아요.
저는 어떤 이야기도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보기 원해요.
지금 제가 보는 것은요.. 아가서가 신부의 영성이다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복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신부의 영성이라는 말 자체도 틀린 거에요.
신부의 영성.. 신부가 된다고 하는 건.. 어떤 영성의 한 부류가 아니라 “생명”이에요.
아들의 영성이라고는 안하면서 왜 신부의 영성이라고만 해요? 미혹이에요. 신부의 영성이 아니라 신부가 된다고 하는 건..성경의 결론이에요.
하나님께서 온전한 가족을 얻는데.. 그냥 가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기서 멈추지 아니하고 그분하고 정말 처절한 사랑에 들어가서 사랑의 언약으로 들어가는 그런 신부..
다시는 돌아서지 않는 그런 신부를 얻으려고 하는 거에요.
그게 진짜 가족이잖아요. 환란이 와도 떠나가지 않는..
근데 이 솔로몬으로 나타난 왕..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이렇게 불러요.
보세요.. 바로의 준마라고 하는 것은 가장 멋지고 귀한 말이죠. 너무너무 멋있죠. 바로에게 생명과 같은 친구죠. 그러나 결국 말이에요. 끝끝내 말이에요. 신부가 될 수 없어요.
바로의 준마처럼 너무 아름다워. 너가 나에게 이렇게 순종하는게 진짜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너가 나에게 순종하는 그 얼굴과 순종하는 그 목이 너무나 아름다워.. 근데 아직까지 너는 말이야. 순종하는 말이야. 그 순종이 너무 아름다워.
그렇지만 지금 내가 너에게 뭔가를 더 주려고 하는데 그게 뭐냐면?
금사슬을 만들어 주는데..은을 박아서 만들어 주고 싶어.
순종하는 종으로 살고 있는.. 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종.. 가장 아름다운 종.. 그래서 이렇게 보면서 참 아름다워. 내가 가자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달리라고 하면 달리고, 쉬라고 하면 쉬고.. 어쩜 그렇게 순종을 잘하냐.. 너무 아름다워.. 그런데 내가 너한테 은으로 금사슬을 달아주고 싶어..
은이 뭐에요?
구속이죠.. 구속.. 구원..
내가 너를 해방시키고 싶어. 해방시키는 목걸이를 달아주고 싶어. 너에게 자유케하는 은혜를 주고 싶어. 그 진리를 가르쳐주고 싶어. 더 이상 노예생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니가 아무리 순종을 잘하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바로의 준마라도 너는 여전히 준마지.. 신부가 아니거든..
시편 68편을 한번 보세요. 조금 아까 뭐라고 그래요?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든다고 그랬어요.
은을 금사슬로 만든 거와.. 여기에 보면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모습과 비슷해요. 바로의 준마에서 이제 비둘기가 되기를 원하고.. 바로의 준마의 그 종노릇하는 데서 양 우리의 눕는 자리로 내가 데려가기를 원하는 거야.
근데 이것이 그 여자의 질문이였죠.
“양 떼 먹이는 곳과 양의 쉬는 곳이 어디냐? 그 양 우리가 어디냐?” 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뭐라고 하냐면?
“거기 가려면.. 내가 너한테 은으로 된 금사슬을 달아줘야 돼. 내가 너를 자유케 해야 돼. 내가 너를 해방케 해야 돼. 해방케하면 그 양떼의 쉬는 자리.. 비둘기처럼 쉴 수 있는 안식의 자리로 니가 들어갈 수 있는거야.”
종으로 살고 있고 최대의 순종을 하고 있는 그 바로의 준마같은 여자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넌 너무 충성 잘 했거든.. 근데 이제 거기 있지 말고 내가 너를 자유케 해서 안식의 자리로 데려가려 함이야.”
그리고 그 자리에 데려가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제 나와 동행하자.” 라고 말하는 거에요. 동행하자..
“나와 동행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갈 수 없어. 나와 동행해야 그 자리에 가.” 여기서 지금 문제가 생기는 거에요. 최대한으로 순종했거든요. 근데 주님이 원하는 건 동행하자는 거에요.
“순종의 자리에 있어서는 신부가 아니라 넌 여전히 말이야. 최고로 아름다운 말이야. 너무 아름다워. 죽도록 충성하는 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그러나 난 너를 해방시켜서 이제는 순종의 자리가 아니라 나와 동행하는 자리에 가려함이야.” 동행해야 신부죠.
남편분들! 아내가 남편에게 죽도록 복종만 하면 굉장히 기쁘시겠죠? 아니거든요. 아내는 남편과 동행해야 기뻐요.
남편이 어디가자고 하는데.. “저는 못 갑니다. 저는 집에서 빨래하고 일하고 다하고 있을께요. 당신이 시키는 일 다 철저하게 다 감당하고 있을께요. 제가 어떻게 잔칫거리에 갑니까? 저는 집에서 당신이 시키는 일들을 다 감당하고 있어야 되겠어요.” 굉장히 아름다운 아내죠. 맘에 드시죠.. 아니거든요. 아니거든요.
제가 이걸 읽으면서 갑자기 이제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거에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배웠어요, 안배웠어요? 배웠잖아요.
그리고 성경에 나오잖아요.
제가 이제 북경에 가서 집회를 다른 분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제가 밑에 앉아 있는데 주님이 저한테 그러는 거에요.
“너는 나한테 순종한 적이 없어. 넌 나한테 순종한 적이 없어.”
그러시면서 저한테 “내가 너랑 동행했어. 너는 순종한 적이 없어.” 이렇게 얘기하시는데 제가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뜻이에요? 뜻이죠. 자 갑니다.” 이러고 간 적이 한번도 없는 거에요.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갔고, 가다가 보니까.. 뒤돌아 보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던 경우가 더 많더라고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그래서 저는 그게.. 불변의 진리인가, 가변의 진리인가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성경에 불변의 진리가 있고 가변의 진리가 있어요. 뭐냐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절대로 안변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절대로 안변해.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 절대로 안변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절대로 안변해.. 그런게 변하지 않는 진리에요.
그러나 가변의 진리가 또 있어요. 변하는 진리.. 그건 뭐냐면?
상황에 따라서 그때는 그 말이 맞았는데.. 그 말이 이 사람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가지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성경 전체에 그 말을 고수하고 있나, 없나를 제가 연구하기 시작한 거에요.
하나님에게 계속 묻기 시작했어요. 저는 인터넷으로 찾고 이런거 할 줄 몰라요.
그거 안해요. 그걸 하면 그것이 저를 사로잡기 때문에 안 해요.
그러고 그냥 주님에게 묻는 거에요. 주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어디있죠. 어디있죠?
그랬더니.. 사무엘상 15장에 있다. 그건 내가 사울에게 한 이야기야. 사울에게 내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어. 왜 그런지 알아? 사울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사울은 나의 신부가 아니었거든. 사울은 나를 사랑한 게 아니거든.
나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지 않은 자에게 내가 순종을 요구하고.. 순종이 제사보다 나아. 그러면서 주님이 제 맘에 호세아 6장을 가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호세아 6장을 가봤어요. 그랬더니..
여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 있어요, 없어요? 여기 없어요. 그죠. 여기 제사를 원한다는 말 있어요, 없어요? 제사를 더 이상 원하지도 않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가 아니라 비교할 것도 없어 제사를 이제 원하지 않아.. 난 인애를 원하고 나를 아는 것을 원해.
왜요?
호세아는 사랑의 이야기거든요.
사랑의 언약에 들어가면.. 순종과 제사가 없어지는 것 같애요.
그리고 인애와 하나님 아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단번에 제사를 지냈잖아요. 그래서 단번에 제사를 지내므로 말미암아 제사를 끝냈어요. 근데 왜 우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거보다 순종이 더 낫다고 이야기를 하는지..
예수님께서 오셔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완성하셨어요.
최고의 순종으로 최고의 제사를 드려버렸어요.
그 말은 이제 끝났다고요.
받아들여지지 않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계속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누가 내 말 안 들으면.. 순종이 제사보다 나아.. 또 내가 뭐 좀 안 할려면..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까.. 계속 해왔으니까.. 계속 그렇게 얘기하면 어쩌면 나는 아직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아니야.. 그렇게 얘기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어요.
아이들을 길러보면 알지만요.. 아이들이 어릴 때.. 2,3 살 때는 어떻게 해요? 무조건 순종시키기 위해서.. 때리기도 하고, 어루기도 하고, 사탕도 주고, 방에 혼자 있게도 하고, 그렇게 하죠. 순종시키려고..
그런데 조금 철이 나서 12살 정도 되면 때린다고 말 들어요? 말 안들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되요? “얘.. 앉아봐.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잖아. 이게 옳잖아. 그러니까 내 말이 맞잖니.” 그리고 동의를 해야 애들이 일을 하더라고요. 순종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도 동의로 가요.
동의에서 더 나아가서 이제 이정도 되게 되면 엄마가 명령한다고 들으세요? 그냥 엄마랑 같이 사세요? 엄마랑 같이 가세요? 동행의 차원에 들어가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순종은 뭐냐면? 명령에 의한 반응이 순종이고요.. 동의는 논리에 관한 거고요. 동행은 사람과 믿음에 의한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주님께서 신부되라고 하는 사람을 부르면서 함께 가자.. 동행하자.. 바로의 준마를 죽도록 순종하고 그 순종도 너무 아름다웠어. 너가 나한테 그렇게 순종하는 거 너무 아름다웠어.. 그런데 이제 같이 가자. 동행하자.. 라고 이야기하시는거죠.
히브리서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다.
왜 기쁘게 했어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노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노아는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 밑에 보니까 그 설명이 나와요.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완전한 자다.
하나님의 소원은 사랑의 관계에 이미 들어가고 나면 그 다음에 동행으로 가기 원하는 거지.. 억지로 순종하며 가길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신랑과 신부의 사이에 에베소서에 보면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있죠. 그 번역이 잘못됬어요.
복종이 아니라 영어로 하면 submit 라고 해요. 그건 obey 하고 틀려요.
submit 이라는 건 뭐냐면? 그거하고는 의미가 틀려요.
조금 이따가 설명해 드릴께요.
‘그런데 우리가 감히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해? 우리가 하나님의 말에 순종을 해야지.. 우리는 동행을 할 수가 없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모습이 어떤건지를 요한복음 15장에서 본을 보여준 거에요.
포도나무와 가지..
포도나무와 가지가 있는데 가지가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거야. 붙어 있을거야.’ 그래서 붙어있을 수 있나요?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사명이 있어. 나는 꼭 붙어야 돼. 나는 붙어야 돼. 포도나무여! 어디가시나이까. 나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포도나무가 가지를 보고.. “내 명령에 순종해. 내 말을 들어. 너는 순종해야 돼. 순종이 제사보다 나아. 넌 날 순종해야 돼.” 라고 하는 거 봤어요?
포도나무에 가지는 그냥 붙어 있어요.
포도나무가 가면, 가지가 같이 가요.
가지가 “나 이리가야지.” 하면 포도나무가 “나도 간다.” 하고 따라가는게 아니라 포도나무가 가면.. 가지는 붙어 있기 때문에 저절로 동행을 한다..
문제는 내가 가지인지 모르니까 문제지..
내가 가지인지 모르고 내가 나무인 줄 아니까 문제인거죠.
내가 가지인 줄 알면 붙어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요.
그러면 가지가 열매를 맺어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어요?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죠. 가지는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가 가지에 달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포도나무가 맺었는데..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가지 보러..
“니가 맺었어.” 라고 말하는 게 그게 주님의 심정이거든요.
그러니까 동행한다는 것은.. 바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덜렁 매달려 있는 거.. 그래서 포도나무에 매달려 있는 가지가 여름이면 더운대로, 겨울이면 추운대로, 헐벗으면 헐벗은대로, 풍성하면 풍성한 대로 가지와 같이 가는 거..
그래서 포도나무의 모든 것을 아는 거.. 그러니까 가지는 포도나무의 증인.. 그게 동행이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말하는 건.. “너 바로의 준마처럼 순종하는 자리에 있지 말고 나와 동행하는 자리에 가자. 일어나 함께 가자..” 무슨 말이냐면?
“포도나무에 가지처럼 그렇게 덜렁 덜렁 나하고 붙어서 가자..” 근데 그걸 못해요.
바로의 준마는 펄쩍펄쩍 뛰어야 되니까.. 순종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게 아니죠.
그런데 포도나무와 가지에서 붙어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 포도나무에 기댈 수 밖에 없고 더 이상 명령을 받지도 않는 차원에 가는 게 더 가까워요?
아니면 “나를 따르라” 그래서 나를 따라가는 차원이 더 가까워요?
전자가 더 가깝죠.
베드로가 있었어요.
베드로가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집과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따랐어요. 순종했어요.
근데 그 순종하는 차원에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리에 갔어요, 못 갔어요?
못 갔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나아도 그 순종만 가지고는 하나님 사랑하는 자리에 못 간단 말이에요.
그래서 동의해야 되는 자리에 왔어요. 주님께서 그러죠..
“내가 고난을 받고 이제 죽으리라.”
동의 했어요, 안했어요? “절대 그렇게 안 됩니다.” 동의 못해요.
그랬더니 동행도 못해요.
예수님 십자가에 갔을 때.. 예수님 부인하고 없었어요. 동행 못 했어요.
근데 주님이 포기하시냐?.. 동행의 자리까지 가게 하시기 위해서 요한복음 21장에 찾아오시잖아요.
찾아와서 “날 사랑하냐” 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다시 사랑과 믿음을 회복하시죠.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베드로가 되서 사도행전을 이루죠.
요한복음에 보면 이 얘기 나오죠.
니가 니 마음대로 다니는게 아니라 이제는 메여서 다니니라. 동행하리라.
메여서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렇게 다니리라. 그러니까 내가 너를 믿는다.
니가 이제는 나를 띠어서 펄쩍펄쩍 뛰어다닐게 아니라 니가 나에게 붙어있는 존재가 되니까 내가 이제 너를 믿어. 어디가서 딴 짓 안할거니까.. 그러니까 내 양을 먹여라.
사랑과 믿음의 관계.. 그게 동행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신부에게 “동행하는 자리에 가자. 그 바로의 준마처럼 노예처럼 순종하던 자리에서 나와.. 내가 너를 해방시킬께.”
그렇게 하면 안식의 자리에 들어간다고 그랬죠.
아가서 8장을 보세요. 이 여자가 안식의 자리에 들어갔나, 안 들어갔나?
드디어 평강의 자리에 들어가요.
평강의 자리에 들어간 이 여자의 모습이.. 그 평강이 어떤 모습인지가 5절에 나와있죠.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올라오는 게 무슨 모습 같아요?
포도나무와 가지 같지 않아요? 포도나무와 가지 같은 모양이에요. 이 모습이..
submit 이라고 하는 거요..
아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냥 복종하는게 아니라 이 사람을 믿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기대서 이 사람의 판결에 맡기는 게 submit 이에요. 바로 이 모습이 submit 이에요.
주님이 아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라는 것은..
무조건 명령에 순종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남편을 그렇게 믿으니까 그에게 기대어서 그에게 순종하라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자녀들아.. 에베소서 한 번 가보세요.
그 ‘순종’ 이라는 말은 영어로 ‘obey’ 고요.. ‘공경하라’ 는 ‘honor’ 에요.
submit 이라는 건 뭐냐면.. honor and obey 에요.
submit 이라는 건.. 공경함으로 순종하는 걸 말해요.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거.. 그에게 기댈 수 있는 거.. 그걸 얘기해요.
그러니까 지금 교회와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아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복종이 번역이 잘 못 되서 그러지.. 그게 뭐냐면?
이 여자가 사랑하는 자의 어깨에 기대어 가는 것처럼 그렇게 기대어 가라..
submit.. 그 얘기에요.
그렇게 되면 평강이 있잖아요.
억지로 복종 하려면 평강이 있어요, 없어요? 죽겠지.. 미워 죽겠지..
그렇지만 복종해야지.. 그럼 거기에 사랑이 있어요? 없어요..
주님은 그런 이야기하고 있는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 해석해서 죽도록 복종하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 훨씬 더 장을 여신 거에요..
그게 아니라.. 사랑이야..
그러니까 니가 나한테 기댐으로 오면 순종은 자연히 이루어질꺼야.
그리고 그 순종은 그냥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공경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거에요.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공경하는 안에서 순종하라..
그것도 submit 이에요. 같은 이야기에요.. 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려고 하니까 이 여자가 광야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 차원에서 이 차원으로 뒤집어 지려니까..
이 선악과 관점에서 생명나무 이 관점으로 뒤집어 지려니까..
이게 완전히 박살이 나야 되거든요. 그리고 아직은 동행을 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게 박살이 나기 전에는 동행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동행하게 하기 위해서 광야를 거쳐요. 2번의 광야를 거쳐요.
그것이 아가서의 이야기에요.
근데 두 번의 광야라는 것이 너무나 싫죠.
근데 그거 아세요?
그게 이 여자의 기도의 응답이었어요.
이 여자가 말했잖아요.
“당신이 누운 곳이 어디에요?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에요? 그 쉬는 곳이 어디에요? 나로 알게 하세요. 당신이 나의 모든 것 되게 하세요. 내가 거기서 당신과 함께 동행..” 그렇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래? 그럼 나와 동행하자.”
근데 못하니까 동행하는 자리에 데려가기 위해서 광야가 기도의 응답으로 온 거라고요. 제가 말하려는 본론은 여기 있어요.
여러분 가운데에 하나님앞에 “하나님! 당신이 나의 전부에요. 내가 이제는 하나님만 섬길꺼에요.” 라고 기도한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광야가 온 거라고요. 기도의 응답이라고요.
하나님 자체를 주고, 하나님의 신부로 영광스러운 자리에 데려가기 원하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요.
하나님은 부스러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주기 원하는데..
그렇게 기도 했잖아요. 하나님이 나의 전부에요.
그런 위험한 기도를 했으니까 광야가 오는 건 당연해요.
그냥 하나님! 밥 좀 주세요 하지.. 하나님! 사랑해요.. 한 마디 왜 했냐고..
왜 그걸 해 가지고 광야를 만나냐고요.. 그거 다 했다고요.
그래서 지금 광야가 와 있어요.
이 광야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는 표시에요.
그리고 그 광야를 지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에 가는 거에요.
근데 아직은 동행하는 자리에 가지 못하고.. 그 광야가 어떤 광야고.. 어떻게 해야 동행하는가? 짜자잔.. 그 2편을 다음 시간에 할께요.
근데요 제가 지금 드리는 이 말씀들이 옳다는 건 아니에요. 제 경험에서 오는..
아까 말씀드렸죠. 제 경험에서 오는 아가서에서 제가 보는 제 삶의 모습에서 제가 느낀 이야기를 드리는 거에요.
제가 바로의 준마 중에 가장 뛰어난 준마였어요.
14살부터 새벽기도 했어요. 14살부터 지금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나요.
준마도 이런 준마는 없어요. 나와봐요. 없죠?
천명 교인이 있는데요.. 제가 십일조 제일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5조 이렇게 하고 있었으니까요.
교회 새벽부터 나가서 반주하고요, 교회 지휘하고요, 교회서 일주일 내내 살았어요.
섬김.. 제일 많이 했어요. 바로의 준마 중에 준준준준 준마였다고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나를 모른다고 그랬다니까요. 내가 너를 모른다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기 시작했어요.
어떨때는 저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극약 요법을 쓰는 거죠. 처방을 극약으로 하는 거죠. 여러분들은 그렇지는 않은거 같아요.
그러나 내 안에서 그렇게 살면서 이게 아니라는 갈망이 시작됐을 때.. 하나님이 마음껏 밀고 들어와서 하시고 싶은대로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약간의 갈망.. 그것으로 “하나님을 원해요” 라는 그것이 생기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마음껏 광야로 데려가실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거기서 그분은 만나기 때문에..
거기서 그분에게 기대어 나오는 걸 배우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하나님을 기대어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게 얼마나 편한지를 알 수 가 없어요. 그걸 봐야 되기 때문에..
지금 처해진 광야.. 지금 처해진 좀 해결 안 되는 거..
그거 우리의 기도 응답이에요.. 그래서 광야가 와요..
하나님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한다고 말 안했으면 어쩌면 세상 광야.. 첫번째 광야에서 아직 노예 노릇하면서 살고 있을거에요.
그게 아니라 그 다음 차원의 고백을 했기 때문에 지금 그 일이 해결 안 되고 있는 거에요.
근데 그것이 하나님이 하나님되고, 내가 하나님의 소유되고,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광야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거기서 울 일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소원을 보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하는 그 주님의 소원에 동의하는 그런 소원이 우리 안에 생겨야 되는 거죠.
그것을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생겨야 되는 거죠.
하나님은 이미 결론이 났어요.
하나님의 책에 우리의 이름을 이미 기억을 하고, 우리 얘기가 이미 거기 끝나서 적혀져 있거든요.
우리가 모를 뿐이죠.
근데 그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싫은 광야를 거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근데 그 광야가 영광의 자리..
그 광야를 지나면 이 여자처럼 사랑하는 자의 품에 기대서 나오는 거..
포도나무와 가지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오는 것을 천천히 배우는 거에요.
그러지 않으면 신부가 되기 보다는 바로의 준마로 계속 남아있게 되요.
그러면 하나님도 피곤하고, 우리도 피곤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여기까지 믿는데.. 하나님은 거기까지를 넘어서.. 근본까지, 저 원초적인 자리까지 데려가려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부스러기 사랑을 원해서 그 부스러기 사랑을 쫓으려고 그렇게 피곤하게 뛰어다녔는데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를 주기 위해서 그 자리까지 끌고 가시는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입맞춤을 조금 보았기에 하나님을 원한다고 이야기했던거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는 내 조그만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내가 감격해서 하나님이 최고에요 라고 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 그러나 그 다음이 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이제 압니다.
하나님!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제는 조그마한 재정의 어떤 축복이나 이런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를 주기 위해서 이 광야길을 허락하시고 그 광야길을 함께 가시는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하나님! 이 광야가 사람마다 다른 거 압니다.
어떤 사람은 실질적인 물질적인 광야.. 어떤 사람은 관계의 깨어짐.. 어떤 사람에겐 영적인 광야.. 내 모습이 싫어서 가지는 광야.. 여러 가지 광야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그 광야로 데려가심은 우리를 진정 자유케 하려 하심..
진정 신부의 자리에 데려가려 하심.. 하나님의 소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심 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그러니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온전한 비둘기 같은 눈이 우리 가운데 있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 광야가 무엇인지.. 이 광야에서 나오는 영광은 무엇인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소유한 것은 과연 무엇인지.. 오늘 예배들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 실제로 역사하고, 이루어지고.. 동의되어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신부로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신부의 비밀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이 놀라운 자리에 부르셨으니 우리도 하나님 자체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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