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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본질과 본질의 만남Fam Worship 2024. 4. 18. 14:03
우리가 주기도문을 많이 기도하는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선행조건이 있어요.
그냥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할 때 선행조건이 뭐냐면?
그 이름 외에는 아무 이름도 없는 것..
그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있으면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면..
두 마음으로 나누어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 거짓되게 고백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할 때.. 그 속에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하기 위해서는 내 이름이 없어져야 해요.
내 이름이 있는데 그 얘기를 한다고 한다면..
우리 교회 이름이 아직 거기 있는데 그 이름을 얘기 한다고 한다면..
내 사역이 아직 있는데 그 얘기를 한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두렵고 떨림이 없기 때문에.. 주기도문 할때도 그냥 그렇게 하고 있는 거에요.
사실은 내 이름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면서.. 사실은 내 교회, 내가 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면서.. 그것을 아직도 여기다가 움켜쥐고 있으면서..
말로는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의 고백이 내 앞에 상달 될 수가 없다. 너의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라고 말하세요.
왜냐하면 두 마음으로 말하기 때문에요.
우리가 주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들 중에서 정말 우리가 분석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바라보면.. 너무나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많이 있어요.
1분 전에 주님 앞에 내가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고서.. 돌아서 나가면서.. 나는 나의 주인이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서요..
하나님을 친밀하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강하게 역사하다 보니까.. 하나님과 동역한다고 하는 것이 너무 요새 만연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힘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이 너무 강하게 역사하다 보니까.. 어느틈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옆으로 끌어내렸어요.
내가 하나님 옆으로 올라가면서 그분을 끌어 내린 것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주기도문을 할 때도 그냥 입으로만 하면서 마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이 했어요.
주기도문 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면’ 그거 할 때..
내 이름이 거기 없어지지 않은 상태로 그 얘기를 하면 주님께서 구약에 말씀하신 것처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는 거에 걸리게 되요.
‘나를 만홀히 여기지 말라. 내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근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안하고 살아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간다고 하면서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보좌 앞에 바로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은 자 같이 됐어요.
요한도 죽은 자 같이 됐고, 다니엘도, 에스겔도, 이사야도 다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유익을 취하고.. 그러고는 하나님을 나와 동등한 위치에 내리고, 그리고 말로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고 이야기하고 살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더 이상 잠잠치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이제 그것을 정리하겠다고 말씀하세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하나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주님께서 나를 하나님 앞으로 댕기고 주님 앞으로 가면 갈수록.. 그분의 광채가 더 환하게 우리 앞에 오기 때문에.. 나는 그 앞에서 눈을 감고 엎드릴 수 밖에 없어요.
만약에 내가 하나님께 가깝다고 하나님 앞에 가면서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십자가의 권능을 내 것인 것처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닌 무언가 다른 존재를 보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분 홀로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십자가에 있는 모든 권능은 오로지 그 분 거에요.
우리는 거기서 은혜를 받았을 뿐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림을 받았을 뿐이에요.
그래서 감격해서 그 분 앞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감격해서 그 분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감격 앞에 경배하는 거에요.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금 잊어가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회복하기 원하세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함께 하실 수가 없고..어느 틈엔가 내가 만든 하나님, 내가 그려놓은 하나님.. 그럼 어떤 다른 존재가 나와 함께 동행하고 있게 되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봐서 과연 내가 이 한마디 하는 거..
내가 한 마디 드리는 기도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 영과 혼과 육이 진실로 하고 있는 기도인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해요.
그런데 우리가 돌아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런데 기회가 올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하나님과 나의 친밀한 관계가 바로 서냐, 아니냐.. 그 기로에 서 있는 거에요.
거기서 바르게 반응하면 생명적으로 나가서 생명나무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교제할 수 있고..
거기서 바르게 반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 선악과를 따먹는 상태에서 계속 나 자신도 나를 미혹한 상태로 그렇게 속아서 살 게 되요.
주님께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간혹 어려움을 용납하세요.
주님은 당신의 자녀가 고통당하는 게 절대로 즐겁지 않으세요.
당신의 자녀가 고통하는 거가 더 가슴아파하세요. 우리의 눈물이 그분의 가슴을 할켜요.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요.
우리가 어떤 사람 때문에 받는 고통 때문에 쓰러져서 아파할 때 그분의 가슴은 우리의 아픔과는 비교도 안되게 멍들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참고 기다릴 수 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 자기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던 적이 있어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가슴이 찢어지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걸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정말 죽은 것 같은 상황, 여기서 정말 내가 숨도 못 쉴 것 같은 상황.. 그런 상황에 우리를 두게 용납하시는 때가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걸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고, 나는 인간으로서 그 분과 창조주와 피조물의 교제가 시작되게 하기 위해서..
창조물과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신랑이요 신부요.. 이 오묘한 관계가 온전하게 시작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 갈등을 겪는 것을 보고 참고 계세요.
우리를 거기서 건지고 싶은 분은 그분이에요.
시편에 보면..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부르짖으니 내가 일어서리라’
우리가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 있으면 주님은 당연히 일어서요. 그게 주님의 속성이에요.
안 일어설 수가 없어요. 그렇게 울부짖는 소리가 있으면 주님이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분의 속성은 무조건 일어서게 되어 있어요.
가난한 자가 울부짖고 있으면 가서 건질 수 밖에 없어요. 시편에 내내 약속하세요.
너희가 그 핍박당하는 자리에 있으면 와서 그걸 풀어줄 수 밖에 없어요.
눈 먼 자가 있으면 눈을 뜨여줄 수 밖에 없어요. 그게 그 분의 속성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안 하실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깊은 관계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온전한 교제의 관계에 데려가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 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다음 단계에 올라 갈 수가 있어요.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읽으면서 분명히 빠진 대목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읽어야 되요.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내용을 알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 부분을 빼놓고 읽은 적이 너무 많이 있거든요. 우리 그래요. 한 번 자세히 읽어 보는 거에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몇 개 보면서 하나님이 여길 통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보겠어요.
여기에 대해서 굉장히 좋은 설교 말씀이 많고, 많은 깨달음이 많아요. 다 옳아요. 그러나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어떤 열망과 열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대해서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이야기 할 뿐이에요.
저는 성경을 푼다고 말하는 것을 굉장히 아파하는 사람이에요.
성경을 풀 수는 없어요. 성경은 하나님 자체거든요. 말씀 그 분 자체..
그분을 어떻게 만나는가.. “이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하나님을 이렇게 만났어” 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성경을 우리가 푼다.. 그럼 성경은 교과서가 아니거든요. 참고서가 아니고..
엘리야가 왜 로뎀나무에 갔어요? 왜 그쪽에 갔어요? 도망간 이유가 뭐에요?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갔어요.
그러면 도망간 거는 살라고 갔어요, 죽으려고 갔어요?
죽으려면 거기서 그냥 죽으면 되죠. 도망갈 필요가 없어요.
이세벨이 죽인다 그러면 그냥 죽으면 되요. 그죠.
그런데 이 굴 속에 들어가서 뭐라고 그래요? 죽여달라고 해요.
자기 생각을 취해야 될 것 같으면 정말 취함을 당하는 게 소원이면.. 그냥 이세벨한테 잡히면 되요.
이세벨한테 잡히면 그냥 죽잖아요. 그럼 소원이 이루어지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 살겠다고 도망을 와 놓고서 엎드려가지고 또 살겠다고 도망 온 사람이 생명을 취하라고 그러고 있어요.
“생명을 취하소서” 그러고 그 다음에 “내 열조보다 내가 낫지 못합니다.” 그래요.
엘리야가 비를 멈추게 했다가 비를 오게 하고, 850명 선지자 하고 싸워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일은 다 했어요. 그죠..
그 당시에 어쩌면 어떤 선지자보다도 엘리야가 큰 선지자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거에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하나님께서 작전상 변화산 상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내가지고 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 앞에 딱 서 가지고.. 걔네들이 어떻게 하나 봤잖아요. 왜냐하면 엘리야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유명한, 그렇게 능력이 있는 선지자가.. 지금 이세벨에게 쫓겨서 와서 드러누워서 “내 목숨을 취하소서. 내가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 말할 때..
진짜로 하나님한테 “나를 죽여(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나를 (자아를) 죽여주십시오에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정말 나를 생명을 취하라는게 아니라 나는 살아야는 되겠는데.. 살아야는 되겠는데..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다른 모든 것들을 취하고, 내게서 다 취하시고..
엘리야가 어쩌면 목숨처럼 여겼던 것은.. 자기의 선지자라고 하는 것..
자기가 기적을 베풀었다고 하는 것, 자기가 불을 떨어뜨리는 사람, 자기가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고 하는 자기의 전적과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함께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알고 있는 어떤 것들..
그것들이 기억과 자기 자신의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가 목숨처럼 귀히 여기는 게 될 수도 있어요.
그것을 하나님한테 취하라고 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세벨에게 쫓겨서 돌아오면서 도망가는 과정에서 자기가 그 선지자도 아니고, 또 불 떨어지는 그 기적을 일으키는 자도 아니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한 인간인 걸 알았거든요. 그래서 이게 거추장스러워요.
이게 내 것이 아닌 걸 알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취하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이거 다 취하시옵소서..”
만일에 엘리야가 있는데.. “그림으로” .. 여기는 불 떨어지는 거, 여기는 비 이렇게 한 거, 여기는 선지자.. 여기에 다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 이걸 다 취하라고 하는 거에요. 다 취하고 나면.. 그냥 홀로 한 사람만 서 있는데.. 그 인간 자체가 그 어떤 열조보다도 못하다는 거에요.
사도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세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고, 내가 가장 작은 자다고 해요.
지금 엘리야가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거에요.
자기가 이런 거 쓰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자기가 그런 존재인지를 막 불 떨어질 때는 못 봤어요.. 못 봤어요. 그게 자기의 정체성인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쓰시고 내가 그렇게 잘 나가고 있고..
그러니까 거기서는 자기가 진짜 어떤 존재인지를 못 보고 있는 거에요.
자기가 만들어놓은.. 하나님이 입혀놓은 그 옷 안에서만 자기를 보고 있다가..
이세벨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딱 나타나니까 자기가 쫓겨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를 보기 시작해요. 그러니까 이게 자기가 아닌 거에요.
이 쓰고 있는 옷들이 자기가 아닌 거에요.
내가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이거 다 취하라고 얘기해요.
이거 나한테 지금 부자연스러운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것과 자기가 이세벨에게서 도망가고 있는 모습이 발란스가 안 맞잖아요. 그림이 안 맞잖아요.
자기가 옛날에 그렇게 불 떨어지던 그 모습.. 바로 그게 어제인지도 몰라요.
그 모습이면.. 이세벨이 딱 그러면 가서 불을 또 내려야 될 것 아니에요. 불을..
열두명도 더 되는 천사를 불러서 죽여야 될 것 아니에요.
근데 그게 아니고 도망가니까..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이 갈등하면서 보기 시작하는 거에요. 내가 그게 내가 아니고 이게..
그러면서 거기서 자기 자신이 불편함 때문에 이걸 다 벗어버리라고 얘기해요.
“목숨을 다 취하소서.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거 다 취하소서.”
다 취하고 나면 그 다음에 뭐가 남아요?
벌거벗은 나만 남아요.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은 불 떨어지게 하는 기적을 행하는 자.. 선지자. 그 사람만이 남아있는 사람 같은 그런 선지자였어요.
자기도 그런지 알았어요.
자기도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싸워서 이겼거든요. 자기도 믿음이 특출 났거든요.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인간이 있을 수 있어요?
그 제단에다가 물 붓고 그렇게 하면서 불 떨어지게 하는 그런 믿음이 어디 있어요?
그런 믿음인 줄 자기가 잘 알았는데.. 이세벨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망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자기가 볼 때.. 이게 너무나 이율배반적인 거에요. 말이 안 되는 거에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자기가 사역 속에서 가지고 있던 자기의 모습과 자기의 지금 도망가고 있는 모습 속에서 너무나 큰 갈등이 생기는 거에요.
그러면 도망을 가지 말고 다시가서 싸우던지 아니면 그 갈등이 되는 옷을 벗어버리던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내가 살 것 아니에요.
인간은요.. 내가 그렇게 이중적으로 살고 있을 때 거추장스럽고 힘들어 할 수 밖에 없어요.
갈등을 가지는 이유는요 그렇기 때문에 갈등이 생겨요.
‘나는 이런데.. 내가 사는 모습은 이래.’ ‘나는 이런 존재인데 난 또 여기서 왜 이래.’ 그런거죠..
그러니까 이세벨에게 쫓기면서 엘리야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해요.
가서 담대하게 이세벨하고 칼 싸움을 하던지.. 아니면 그렇게 쌓아서 능력이 있던 것을 다 벗어버리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도망을 가던지..
그런데 이것 능력이 있는 것을 입은 채로 도망을 가려니까 자존심 무지하게 상하고 내가 도망가면서 하나님이 이거 욕되게 할 것 같으니까 다 취하라는 거에요.
“내가 비를 그치게 했던 거 취하세요. 내가 하늘에서 불 떨어지게 한 거 다 취하세요. 다 취하세요.”
다 취하고 나니까 이세벨에게 도망가고 있는 자기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어떤 약한 자보다 가장 약한 자에요. 가장 약한 자..
그러니까 “내가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 라고 고백해요.
그러나 절대 죽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살려달라는 얘기죠.
내가 이 꼴인데 살려주세요 하는 거에요..
여러분 가운데에 그 정도의 상황까지 와 계신 분이 있어요. 분명히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이 말씀을 하실 거에요. 자기 나름대로 그 상황에 와 있어요.
사역이 아니면 가정 생활에서.. 아니면 나의 진로 과정에서.. 아니면 나의 어떤 과정 속에서 내가 정말 그렇게 믿음으로 살 수 있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게 왔었고 또는 기적까지 행했고, 그렇게 믿음으로 걸어왔는데.. 지금 내가 어떤 작은 문제 때문에 갈등하면서 내가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 조차 지금 거추장스러운 그런 상황 가운데서 이건 내가 정말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다는 자리에서 그렇게 겸비하게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이 여기 있어요.
크거나 작은 그런 실패와 그런 갈등이 다 있거든요..
그 갈등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이 아니에요.
그러면 문제는 뭐냐면요..
“그렇게 내가 죽여달라는 것은 아니고 나 살려주세요. 그렇지만 내가 목숨처럼 생각하는 거 다 걷어가세요. 이건 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다 걷어가세요. 내가 내 열조보다 제일 못 났어요.” 그렇게 납작 엎드려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에요, 아니에요? 너무 맞는 기도잖아요.
하나님이 아까 시편에서 말했듯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보고 일어선다고 하셨어요.
핍박 당하는 자를 위해서 내가 일어나서 손을 내민다고 그랬고, 과부와 고아를 위해 신원을 하시는 분이 여기 있으니까 그렇게 납작 엎드려서 겸손하게..
‘나 죽어주세요.’ 하고 이러면 하나님이 딱 나타나셔서..
겸손한 자야. 내가 겸손한 자와 함께하고 거만한 자를 내가 미워한다 그러면서 너가 겸손하니.. 내가 그 무릉ㄹ 내리노라. 이러면서 어떻게 해줘야 될 것 아니에요.
어떻게 해줘야 될 것 아니에요.. 그만큼 기도하고 엎드려 있으면.. 그러잖아요..
이세벨 문제를 해결해주셔야지.. 그렇게 엎드려 있으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가 있는데..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데 까지 가서..나는 정말 내 조상 누구보다 내가 못 났습니다 하는 그런 겸손한 자리까지 가 있는데..
하나님이 지금 구해주시냔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세벨을 처단해 주시냔 말이에요.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서 다시 엘리야가 그 자리에 갈 수 있게 해주냐 말이에요.
그러지 않고 겨우 물 먹이고 떡 먹여서 생명만 유지 시키세요.
여기가 갈등의 자리..
내가 그만큼 겸비했고, 내가 그만큼 주의 음성 들었고, 내가 이만큼 주님 기다렸고, 내가 여기서 정말 헤어 나올 길 없어서 주님만 믿는다고 내가 주님께 그렇게 하고 엎드려 있는데.. 그럼 해결이 되야 되는데..
분명히 성경의 공식대로 하면 해결이 되야 되는데..
주님이 해결하지 않고 겨우 내 생명만 유지시키고 있어요.
죽을 거 같은 나한테 와서 물 한 모금 떠 주고, 떡 한 번 먹이고, 또 물 한 모금 먹이고 또 떡 한 번 먹이고.. 내가 죽을 거 같아서 정말 이렇게 그러면 또 떡 하나 줘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게 되고 아니면 내 자신이 자포자기하게도 되고,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이 너무 힘들어지기 시작해요. 엘리야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그러고 있는 엘리야..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저 같아도 시험들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납작 엎드려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나한테 겨우 생명만 유지하게..
겨우 생명만 지탱하게 매일 매일 끌고가는 내 삶 속에서 해결은 안 하는 것 같고 계속 그렇게 끌고 가는 거에요.
그것이 1년이 된 사람도 있고, 2년이 된 사람, 3년이 된 사람도 있어요. 평생일수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생명 유지한 다음 어디로 데려가냐면?
40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으로 데려가요.
호렙산에 가면 또 누가 있어요? 모세가 있어야죠.. 모세가 있어요.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있다가 호렙산을 갔죠.
엘리야는 40주야를 걸어서 호렙산으로 가요. 그러니까 엘리야가 훨씬 나요.
우리 인생에 다 그길이 있거든요. 각자 틀려요.
호렙산에 왔는데.. 모세에게 주님이 “신발을 벗어라.” 이렇게 얘기해요..
‘신발을 벗어라’ 그랬을 때 여러가지 의미가 있어요.
많은 좋은 설교의 내용들이 있어요. 신발을 벗어라는 것에..
‘거룩을 이뤄라. 너를 씻어라. 더러운 것을 씻고 와라’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어요.
저는 미국에 살기 때문에 미국 식으로 해석하려고 그래요.
미국에서는요 신발을 벗는 장소가 딱 두군데에요.
1 침대에 올라갈 때, 2 목욕할 때
그 외에는 집에서 밥 먹을 때도 신발을 신고, 집에서 하루종일 신고 있다가..
목욕탕 들어갈 때까지 신다가 목욕탕에 들어갈 때 벗어요.
침대방에서 신발 신고 돌아다니다가 침대 올라갈 때 신발을 벗어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신발을 벗는 자리는 가장 가까운 자리.. 가장 친밀한 자리.. 가장 비밀스러운 자리.. 그런가하면 무장해제하는 자리..
목욕탕에 갑옷 쓰고 들어가는 사람 없잖아요. 다 벗어야 되요.
내가 나를 방어하는 거.. 내가 나를 감추고 있는 모든 가면이고 뭐고 다 벗어야만 해요.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무장해제 된 상태로 목욕탕에 싹 들어가야지 목욕을 할 수가 있어요.
어쩌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가서에서 말한 것처럼 여기가 내 침궁이다. 하나님이 결혼은 신성한 거룩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왜냐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만약에 여기가 내 침궁이다. 니가 나에게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나와 정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친밀한 대화를 하자는 초청이 거기 있는 거죠.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 했잖아요.
어떻게 얼굴을 대면했어요? 그럴 시간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니 발이 더러우니까 씻고 와라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신발을 벗고, 니 발이 더럽던지 안 더럽던지 상관없어. 모세에게 신발을 벗고 다 씻고 들어와 라는 말은 없어요.
신발을 벗고 더러운 발을 가지고 목욕탕에 들어가면 씻어져요.
신발을 벗고 그냥 오라고 되어 있어요.
신발을 벗고 니 발을 씻어라. 니 발의 더러운 것을 씻고 여길 와라.. 그런 말이 없어요. 옛날에 이스라엘에서 신발을 벗으면 먼지구덩이에요.
그 더러운 발로 그냥 침실에 들어오라는 거에요. 주님의 놀라운 초청이에요. 그래서 거기 들어가죠.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비밀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지금 엘리야도 똑같은 호렙산에 와 있어요.
그래서 겨우 겨우 생명 유지했으니까 꼬라지가 엉망이겠죠.
겨우 떡도 요만큼, 고기도 준 적이 없어요.
떡하나 물하나, 떡하나 물하나 달랑달랑 겨우 생명만 유지하는 상태로..
그 상태로 주님께서 호렙산으로 초청하세요.
내가 내 모습을 보면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속에 내가 뭐가 있는지 알고, 내가 이 40일 광야를 걸어오면서 내 발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거든요.
그 동안에 겨우 생명만 유지하면서 내 발에 무지하게 뭐가 많이 묻었거든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호렙산으로 부르시니까 들어가는 거에요.
성경에 보면요. 에스겔서 36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24,25절 이스라엘 백성을 본토로 돌아오게 해서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게 해서 그들을 씻는다는 말이 있어요. 씻고 들어오라고 안 되어 있어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들어오라고 되어 있어요.
너 그렇게 헤매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발 더러운대로 그냥 들어와. 호렙산으로..
그런데 우리는 씻어야 들어가는지 알죠.
그래서 부르셔요. 부르긴 불렀는데.. 그 다음이 더 웃겨요.
불러서 엘리야가 짠 들어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직까지 감동이 전혀 없어요.
엘리야는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고 속만 상해 있는 상태니까요.
지금 우리가요.. 엘리야를 위대한 영웅과 성경에 나오는 성인으로 보고 이 성경을 해석하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가 전혀 없어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너무나 아브라함과 모세와 야곱과 이런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우리는 별 볼일 없고, 그 사람들은 믿음이 어마 어마 하고.. 이렇게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별로 실수 안하고, 정말 제대로 한 것 같고.. 우리는 그 사람들은 본받아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특별히 콕 찝어서 “불을 떨어트리는 엘리야가 너희하고 성정이 같애.” 라고 얘기하는 거에요.
“별볼일 없어. 너랑 똑같이 꽝이야.” 그 소리에요.
“너처럼 불평하고, 너처럼 실망하고, 너처럼 핑계대고, 너처럼 도망가는 존재야.”
그 소리에요.
고상하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하고 똑같애, 똑같애.. 그 소리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엘리야하고 우리하고 똑같다고요.
그러니까 아까처럼 사실은 죽여달라는 말 아닌데 죽여달라고 말하고..
우리도 그러잖아요. 우리 하나님한테 정말 죽여 달라고.. 힘들 때와서 “하나님! 차라리 죽여주세요.’ 그러는 거..
진짜 죽여달라는 말 아니잖아요. 똑같애요.
지금 현재 호렙산에 엘리야가 왔어요.
주님이 묻죠. “너 여기서 뭐하냐?” 9절에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도 참 웃겨요.. 하나님이 호렙산에 오게 해놓고 거기 갖다놓은 다음에 “니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또 물어요. 물어본 다음에..
엘리야가 대답하는 거 보세요.
나, 나, 나.. 그거 아주 거기 다 있죠.
나만 남았고, 나만 살아 남았고, 나만 주만 원하고, 나만 열심히 특심이야.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모습과 1절에서 “내가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 하는 모습하고 그림이 맞아요, 안 맞아요? 그림이 어울리세요, 안 어울리세요?
전혀 안 어울리죠. 너무나 말이 안 되요.
앞에서는 분명히 내가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다.. 겸손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는데..
왜 갑자기.. 나만, 나만, 나만 이러고 있냐고요..왜요?
중간에 내가 이렇게까지 엎드려 있었는데 하나님이 해결해주지 않고 겨우 생명만 부지시켜준 거.. 그거 때문에 속상한 거 같아요.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내가 그렇게까지 하나님 앞에 순종했는데.. 내가 그렇게 엎드려 있었는데..내가 열조보다 못하다고 겸비해 있었는데.. 내가 모든 걸 회개하고 자빠져 있었는데. 왜 주님은 응답을 안 하시고, 겨우 나를 생명만 유지 시키는 건가? 하나님!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
그 상황 가운데서 ‘나만’ 이라는 것이 나오는 거에요.
나만 열심히 특심이었고, 나만 이랬고, 나만 이랬는데 어떻게 이렇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얘기가 나오는 거에요.
저같으면 제가 하나님이면 “참! 너 정말 치사하다. 40일 전에 죽여 달라고 그러면서 세상에 나보다 못 난 놈이 없다고 그러더니 40일 후에 나만 열심이 있다고 얘기하는 너는 정말 지겹다.” 이렇게 얘기할 것 같아요.
“어쩜 그렇게 치사하냐..” 근데 이게 다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래 그럼 이렇게 끝내자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주님이 세밀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거에요.
엘리야가 무엇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난척하고 있는 그 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거에요.
엘리야가 잘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선하시고, 하나님이 어딘가에 데려가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 뿐이에요.
이 어려운 광야 가운데 나를 겨우 생명만 유지 시키는 하나님..
그 생각 가운데서 나온 생각이 그렇게 말을 하게 만든 거에요. “나만.. 내가 열심히 특심..”
그런데 그렇게 하는 그런 엘리야에게 주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시죠.
그러고 또 한 번 물어봐요. “너가 여기 왜 있느냐?”
근데 그렇게 주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면 감동 먹어야 되요, 안 먹어야 되요? 내가 이렇게 못 되게 지금 “나만”.. 이러고 있는데..
주님이 부드럽게 다가와서 “엘리야야” 부드럽게 얘기하는데 감동 먹어야 되요.
근데 엘리야가 말하는 거 보세요.
똑같은 소리를 또 하고 있어요. 글자 하나 안 틀려. 토시하나 안 틀려요. 그게 인간이에요. 엘리야가 잘한 거 한 개도 없어요.
엘리야는 잘 한 거 하나도 없고요.. 하나님은 다 잘했어요. 엘리야 잘 한 거 하나도 없고 그런데 다른게 딱 하나 있어요. 딱 하나..
그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똑같은데.. 다른게 뭐가 있냐면?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게 틀려요..
만약에 그 앞에서는 얼굴을 빳빳히 들고 내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면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는 자리에 들어가는..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기서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모세가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요..
모세가 출애굽기 3장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모습과 엘리야가 지금 여기서 겉옷을 뒤집어 쓰고 엎드리는 모습이 같아요.
똑같은 말을 하지만 지금 겉옷을 뒤집어 쓰고.. 그러면서..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상한 척 안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그 찌꺼기 그대로 “내가, 내가” 이러고 얘기하는데 이번에는 서서하는게 아니라 겉옷을 뒤집어 쓰고 하니까 소리가 들려요 안들려요? 안들려요.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아주 세미한 소리.. ‘내가, 내가’ 들리지도 않았을 거에요.
그러나 사실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의 속성이 아직 변하지 않았어요. 고모양 고대로에요.
아직도 나만 남았다는 그런 자존심이 아직도 있어요.
나만 열심이 있고, 나만 의롭게 살고 있는데.. 아직도 당신은 나를 구하지 않고 있다는 거에요. 나만 특별하다는 생각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러나 한가지 다른 건 겉옷을 뒤집어 쓰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써 가지고 있는 그 추함과 내가 억울함 속에서 이것이 완전히 녹아져 버려서 엎드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거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온유함과 사랑 때문에 내가 엎드려 질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사실은 그게 경배에요.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그게 경배에요.
지금요 주님께서 어떤 자리로 엘리야를 불렀냐면..
선지자로써 주의 일을 하면서 너와 나와 만난 거 그거 말고.. 사역자로써 이렇게 저렇게 하고 믿음이 있다는 걸로 하면서 니가 이런 저런 탈을 쓰고.. 니가 무슨 새신자반, 내가 뭐 교회서 섬기고, 믿음 있는 척 했던 거.. 새벽기도 맨날 나왔던 거 그거 말고.. 그거 다 벗어던지고, 잘난척 하는 거 다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니 본질로 내 앞에 나와 있는 거에요.
니 본질 그 자체로..
잘난척 좀 하지 말라는 거에요. 겸손한 척도 하지 말라는 거에요.
니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그대로, 니 추한 모습 그대로.. 내 앞에 본질로 나와.. 그래서 내가 얼마나 선한 지.. 내 본질을 보라는 거에요.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거기서 나가서 앉아있는 그 본질로 벌거벗은 몸으로 하나님앞에 아무것도 잘한 거 없이 ‘내가’ 하면서.. 도망나와 있는 주제에 ‘내가’ 하면서 그렇게 엎드려 있는 엘리야에게 세미하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그 분..
이 엘리야와 하나님의 차이가 보이세요?
이 엘리야와 하나님이 얼마나 차이나는 존재인지 보이세요?
그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뒤집어 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겉옷을 뒤집어 쓰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 자리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아직도 내가 주님 앞에 뭘 할 수 있다는 거, 내가 주님 앞에 새벽기도 했다는 거, 내가 주님 앞에 성경 읽고 믿음 있게 이렇게 했다는 거, 내가 주님 앞에 뭔가를 바치고 있다는 것을.. 그걸 가지고 주님 앞에 와 있기 때문에 본질과 본질의 만남이 없어요. 주님은 그런 관계에서는 온전한 친밀함을 가질 수가 없어요. 다 벗어버리고, 다 벗어버리고..
내가 뭐 했던 거, 뭐 가져왔던 거, 하나님 앞에 뭐 바친 거.. 그거 다 없애버리고 본질 자체가..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본질 자체가 그분 앞에 엎드려서 그분하고 대면을 해야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분의 본질이 어떤지를 보게 되요.
그분이 어떤 일을 했는지, 그분이 불을 던졌는지, 비를 오게 했는지.. 그걸 보는게 아니라 그분 자체를 보게 되요.
그분 본질 자체..
그게 뭐냐면?
내가 그렇게 추악하게 있는데도 세미한 음성으로 나를 만드시는 분이라는 거에요.
그게 그분의 본질이에요..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그게 그분의 본질이에요.
그분의 본질을 만날 때.. 똑같은 소리를 해도 이제는 다른 장소에 들어가게 되요.
그분의 본질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나와 틀린 분이고, 나는 이렇게 별볼일 없고 난 정말 해결이 안 되는데도.. 나에게 손을 내미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만지시는 그분 앞에 자원해서 엎으려질 수 밖에 없고, 내 얼굴을 주님 앞에 가릴 수 밖에 없어요. 그게 경배에요.
하나님 앞에 와! 이러면서 노래하는 건.. 경배가 아니에요.
그 앞에서 엎드려서 그 가운데서 쏟아나오는 하나님 앞에 대한 놀라운 감격으로 나오는 그게 경배..
거기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환호.. 그게 경배,
거기서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축하.. 그게 경배, 그런가 하면 거기서 나오는 한없는 감격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사랑.. 그게 경배에요.
그런데 그런 경배를 드리지 못해요.
왜냐하면 내 본질이 그 분의 본질을 못 만났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런 걸 뭐라고 얘기하냐면? 마가복음에 보면.. 너희 경배가 쓸 데 없다.
내가 너의 제사를 받을 수가 없다. 나한테 경배하는 척 하지 마라..
너가 경배하는 이유는 니가 쓰고 있는 옷에 합당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나에게 경배하고 있는 거다.
내가 만약에 목사라면.. 내가 설교하는데 내가 막 경배를 잘해서 말씀이 잘 풀어지기 위해서, 내가 만약에 찬양단이면.. 내가 막 열심히 잘해서 찬양팀이 하는 걸 통해서 사람들이 은혜받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경배.. 그건 하나님이 받을 수가 없는데..
왜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하냐면?
내가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요.. 새로 시작하기 원하세요. 우리가 다 새로 시작하기 원하세요.
주님의 비밀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정말 경배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지는 거에요.
왜냐하면 여기 보세요..
엘리야가 겉옷을 뒤집어쓰고 고백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밀을 열어보이세요.
그전에는 사역은 같이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열어보이세요.
“내가 3가지 방법을 택할건데 내가 이렇게 할거야.
내가 하사엘, 예후, 엘리사 이렇게 할거야.
그들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거고 그리고 나는 7천명을 숨겨놨어.”
하나님의 비밀을 이야기하기 시작해요.
근데 하나님의 비밀을 갈멜산에서 불 떨어질 때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갈멜산에서 보여준 게 아니라 여기 로뎀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인간 본연의 자세로 “당신은 창조주시고 나는 피조물입니다.”
그 본질 자체가 하나님앞에 그렇게 떨면서 겉옷을 뒤집어 쓰고 있을 때..
“난 아무것도 못합니다.” 하고 겉옷을 뒤집어 쓰고 있는 그 자리에 와서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하세요.
그리고 그 비밀을 풀어 놓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엘리사를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요. 문제는 우리의 본질이 주님을 만나고 있는가에요..
여러분이 만약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의 기다림이 너무 길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것것도 해봤는데 아직까지도 해결방법이 없는 그런 구석에 와 있다고 한다면, 사랑을 베풀고 베풀고 베풀었는데 이 사람이 나한테는 계속 나를 아프게 하는 인간관계의 벽에 왔다고 한다면,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어쩌면 누군가가 끝없이 나를 참소하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 관계에서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시험들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속상하기도 하는 그런 관계..
그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하나님! 이거 다 벗어버려요. 다 벗어버려요. 벌거벗고 하나님앞에 본질로 있을 거에요. 그러고 하나님의 본질을 만날 거에요.”
그래서 본질과 본질이 이루어지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새로 시작하게 되고요, 하나님의 비밀이 풀어지기 시작해요.
여러분 다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원하잖아요.
그러나 내가 기도하고 애씀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야 되는데..
탈을 쓴 거 가지고.. 내가 전도사라는 타이틀, 목사라고 하는 타이틀, 찬양 인도자라고 하는 타이틀 그것을 벗어 던지기 전에.. 내가 완전히 본질로 벌거벗은 상태로.. 내 모습 이대로.. 가장 처절하고, 가장 추한 모습 그 자체 그대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 경배자가 되길 원하세요?
그 자리에 들어가야만 참 경배자가 되요.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일,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는 것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야 해요. 그 자리 갈 때까지는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자리로 초정을 하고 계세요. 여러분 가운데 혹시 그런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 자리가 지금 바로 반응을 하는 자리에요. 두려워하거나 속상해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 본질이 주님을 만나야 되요. 그래서 이제 벗어던져야 해요.
그 벗는 것에는요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도 있어요.
내가 끌어 안고 있는 내 아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아픔을 내가 사랑하고 있는 거 아세요?
그 아픔을 통해서 내가 피해받은 자가 됐다는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거 아세요?
내적치유 그런식으로 내적치유.. 옛날 아픈 거 생각하세요.. 이거 가지고는 근본이 해결이 안되요.
내 본질이 하나님을 만나야만 해결이 되는데.. 다 벗어버려야 되요.
나의 아픔이 나에게 훈장이 되서 그걸 즐기고 있어요. 우리 다 그러고 있어요.
그 아픔 속에서 ‘아! 이 아픔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거요. 다 화려한 자기 고백이거든요. 다 벗어버려야 되요.
하나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내 목숨같이 여기는 거 내 아픔이라는 거 다 취하세요.
그러고 내가 벌거벗은 모습을 보면 어느 나라, 어떤 사람보다 제일 못났어요.
제일 못났어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기 때문에요. 잘난 척할 거 하나도 없어요.
그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질 때 하나님이 그 상태에서 보여주시면서 그 때 내가 겉옷을 뒤집어 쓰게 되요. 왜냐하면 그 때 진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거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일을 하고 사역하고 무엇인가 비전을 든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는 건요..
그 비전을 위해서 보고 있는 하나님, 그 사역을 위해서 보고 있는 하나님.
아담이 하나님과 거닐 때 하나님 자체.. 아담 자체로 만났어요.
아담에게 무엇을 시키기 위해서 아담이 하나님의 일로 무슨 큰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라 그냥 본체가 본질의 만남이었어요.
아담이 눈을 딱 뜨니까 하나님이 코 앞에 있었고요. ‘와!’ 놀랬어요.
그냥 만난 거에요. 하나님은 그런 만남으로 그런 순수한 교제로 우리를 부르고 계세요.
그럴 때 우리의 문제도 해결 되지만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져요.
하나님이 마음놓고 그분의 일을 하실 수 있어요.
지금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고 계세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증인이기 때문에요.
내가 한 거를 이야기하는 건 증인이 아니고요, 다른 사람이 한 거를 이야기해야 증인이에요.
내가 여기서 이렇게 나와서 내가 이렇게 기도해서 내가 이렇게 했어. 그건 증인이 아니고요, 그건 자기자랑이에요.
증인은요.. ‘그분이 그렇게 했고, 그분이 이렇게 했는데.. 그분이 이랬어.’ 거기에 ‘나’가 하나도 안 들어가는게 증인이거든요.
그렇게 될려면 내가 얼마나 처절하게 못났다는 걸 알고, 내 본질 자체가 그분의 본질을 만나는 만남이 있어야만 되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출발을 주기 원하고요. 이 교회에 주님이 원래 원했던 비전을 이루기 원하세요.
우리의 비전이 아닌 주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엘리야처럼 벌거벗은 채로 주님과 완전히 본질과 본질의 만남이 있어야 되요.
그러면 그때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져요.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거에요. 이렇게 할거고, 이렇게 할거고, 이렇게 할거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시죠?
하나님의 음성을 있는 그대로 못 듣는 이유는 내가 듣기 원하는 음성만 듣기 원하기 때문에요.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내가 사역을 하려는데.. 요걸 하는데 있어서 요런 음성을 듣기 원해.. 우리는 그쪽으로만 딱 뚫려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없으면, 다 벗어버리고 나면.. 그냥 투명하게 그분이 하는 말만 들려요.
지금 우리를 그렇게 한 차원 높은 차원으로 데려가길 원하는데..
그것이 바로 경배의 자리에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네 생물이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잖아요.
자기는 존재 모양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요. 24시간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그리고 네 생물은요.. 안과 밖으로 눈이 있어요. 온 몸에..
여기도 눈이 있고 여기도 눈이 있는데.. 하나님이 내 앞에 있어. 이렇게 봐도 하나님, 저렇게 봐도 하나님, 아래를 쳐다봐도 하나님, 온 몸의 눈이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네 생물은 도망갈 구석이 없어요. 계속 바깥에 뜬 눈은 계속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그러나 안으로 되어 있는 눈은 계속 자기를 보고 있어요.
처절한 자기의 본질과 화려하고 광채나는 하나님의 본질을 볼 때.. 그 네 생물이 할 수 있는 일은 경배밖에 없어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우리가 그러한 경배에 안 들어가는 이유는 그 자리에 없기 때문에요.
주님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우리가 다 들어가기 원해서..
왜냐하면 주님이 왜 그걸 원하는 게 증명되냐면 “내가 참 경배자를 찾는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주님의 소원인지 알 수 있어요.
그 자리에 다 가길 원하는데 가는 선행조건이 뭐냐면?
엘리야처럼 내가 만들어놓은 나 말고.. 본질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는 시간을 가져야 해요.
그럴때 참 경배가 시작이 되고, 하나님을 진짜 만나게 되요.
제일 우리가 벗어버려야 되는 건 나의 직함이나 이런 것들보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적인 상처들, 내가 가지고 있는 실망.. 이런 것들부터 벗어야 해요.
그것을 가지고 여과해서 하나님을 보고 있거든요 우리가..
그것 때문에 울고 있고, 그것을 만지시는 하나님을 보고 울고 있어요. 그거 말고..
본질 자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고 하나님이 어떤분인가 때문에 감격해서 경배하는 자리에 들어가야만 해요.
이런 이야기를요 아무데서나 못해요. 전혀 못 알아들어요. 정말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는 곡식과 새포도주를 원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근데 그렇게 원하면서 하는 것은 경배가 아니라고 말해요.
곡식과 새포도주를 원해서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우상숭배요. 간음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어요.
침상에서 아플때는 하나님을 부르고, 모일때는 뭐 때문에 모여요?
곡식과 새 포도주 때문에 모여요.
하나님 때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 곡식과 새 포도주를 얻기 위해서 모여요.
곡식은 ‘축복 축복’ 하는 거고요, 새 포도주는 성령의 나타나심이 막 그런 역사만을 추구하는 거에요.
그렇게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계속 모이는 그런 행동을 하나님은 범죄라고 이야기 하고요.. 이것을 또 9장에 보면 뭐라고 얘기하냐면?
축복을 구하고, 그런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을 구하는 거.. 너무나 많은 힐링과 이런 것들만 구하는 거.. 이방 사람 같다고 해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무당이 섬기는 거.. 무당들도 그렇게 섬기거든요.
포도주 떨어지고 곡식도 떨어지는 날이 와요. 왜냐하면 그걸 주는게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줘서라도 하나님을 믿게 하려 했는데.. 인간은 그걸 줘서라도 하나님을 믿게 하려 했는데 그것이 목적이 되서 그것을 위해서 모이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걷어가시는 거에요.
“그리고 너가 음행하고 있다. 신부로 살아야 되는 너희가 창녀 노릇하고 있다.”그 소리에요.
내가 너희를 부르기는 신부로 불렀는데.. 신부로 불러서 내가 너에게 이런 곡식도 주고, 새 포도주도 주면서 너를 위로하고 너가 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내가 너의 아픔도 고치고, 내가 너 필요할 때 물질도 주고 하면서 내가 너를 신부로 부르고 있는데.. 그렇게 했는데.. 너는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 그게 떨어지면 그거 없다고 아우성치고 그거를 더 구하고, 그거를 더 원해서 모이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보니까 음행하는 자가 되서 신부가 창녀로 변하고 있는 게 바로 이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모양으로 변하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방법이 없으니까 다 벗어던지고 본질로 돌아오라는 거에요.
“본질로 돌아와서 니 벌거벗은 몸이랑 잘난거, 아무것도 없는 거, 내가 줬던 곡식도, 포도주도 다 띠어 버리고.. 빈손으로 그냥 엘리야처럼 엎드려서 나를 만나라. 그래야 시작된다.”
그 얘기 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편에 보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라.
지금 우리가요.. 때를 알아야 되는데요.. 이 세대가 얼마나 패악하냐면요?
분명히 성경에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했어요.
거꾸로 얘기하면? 표적을 구하는 세대는 음란하고 패역하다 에요.
표적이라는 것은 기적과 이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받는다는 거, 또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거, 내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거..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행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수도 없이 행한 그 기적이 나에게 구원을 준 게 아니에요.
나에게 구원을 준 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을 따라 가고 있고요, 곡식과 새 포도주를 따라가고 있어요. 너무나 멀리 갔어요 우리가. 이제는 예수께 돌아갈 때가 됬고요..
이제는 본질이 예수 그 분이 아무 일도 안 하신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주지 않고, 영광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분 자체가 너무 귀하고, 그분 자체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내가 그분을 거룩하게 경배하고, 그분의 신부로 남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주님은 찾으시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마지막 영적전쟁을 하실 거에요.
그러지 않고 그 외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서 있지 못해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서 있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렇게 본질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어요.
본질이 본질을 만나기 시작하면 문제도 상관이 없고요, 지금 아픔도 상관이 없고요..
왜냐하면 내가 주님을 섬기는 자체가 문제가 해결 됐기 때문이 아니고, 내 명예를 갖기 위해서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주의 이름으로 할 수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그분 자체가 너무 거룩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상황이 있어도 상관이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주님의 말씀은요.. 시편 119편 7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상황이 어려워도 억지로 감사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은 뭐가 오던지 간에 내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관이니까 감사한다는 거에요. 그건 변함이 없어요.
내가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 그분은 이런분 이런분 알아서 그분 자체의 모습으로 내가 그분을 섬기고 있다면.. 내가 주의 일을 하던 안하던 내가 어떻게 승리를 했던 안하던 내가 아프던 뭐하던 상관이 없어요.
그분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 분 자체로 그냥 그분을 경배할 수 있어요.
우리가 변함이 없는 사실은요.. 나는 영원히 피조물이고, 그분은 영원한 창조주에요.
그래서 경배하는 거에요. 그거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아름다운 건 우리가 억지로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 창조주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니 감격하여 기쁨으로, 사랑으로 경배한다는 그 차이에요.
우리가 노예이기 때문에 경배하는 게 아니라 그분이 너무나 전능하고 나는 너무나 못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감격해서 경배하는 거에요. 기쁨으로..
그게 신부에요.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주님은 이 성전에서 그러한 경배가 드려지길 원하세요.
주님은 그러한 경배드릴 장소가 곳곳에 일어나길 원하세요.
모여서 성령의 어떤 영광의 구름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그런 경배.. 그런 것 좀 제발 버려야 돼. 그거 아니에요.
영광의 구름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 분 자체가 영광이기 때문에 그분을 경배함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경배 장소를 찾으세요.
이 산에서도 말고, 이 성전에서도 말고,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도 안 보여도, 내가 어려워도 안 어려워도, 내가 내 남편 때문에, 내 애 때문에 고생을 해도 안해도.. 그거하고 상관없이 그분이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그분을 경배할 수 밖에 없는..
그분이 의로운 재판관이기 때문에.. 그분이 이걸 해결할거라 믿는 그분이 의로운 재판관이기 떄문에 그런.. 그런 경배자를 찾으세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상황에 의해서 경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경배가 진정한 경배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은요.. 저같은 사람한테까지 억울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성경을 보면서 나를 안보고, 아브라함을 보고, 모세를 보고, 야곱을 보고, 엘리야를 보고, 베다니에 마리아를 보고, 사도 요한을 보고, 세례 요한을 보는 그 모습이 내가 억울하다.”
왜 나를 보지 못하냐고 말씀하세요.
이제는 본질로 돌아갈 때가 지났어요. 이제 돌아가야 되요.
그분을 그분되게 해 드려야 되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이 성전에 있게 해 드려야지..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로 여기 있게 해서는 안 되요.
하나님을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이렇게 할거야 그러기 때문에 내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이제 그런 자리에서 나와야 되요. 그거 아니고, 그거 아니고..
내가 이 피조물인 것을 알고, 그분이 창조주인지 아니까 그렇기 때문에 경배하는 그런 자리에 우리가 들어갈 때가 이미 지났어요.
하나님은 더이상 참기가 힘든 만큼 지금 잠잠하지 않겠다. 내가 헐떡이는 황소같이 그렇게 쳐들어오시겠다고 말씀하세요.
우리 한 사람부터 하나님앞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써 섬기고 나는 피조물로써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그 자리에 들어가서.. 그 하나님이 왕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해야 되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고 뭘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요.
내가 내 육신의 아버지를 나에게 무엇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장사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소리에요.
너희가 와서 나에게 뭘 바침으로 나에게 은혜 받으려고 한 거, 내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해서 나에게 와서 찬양하는 거..
그분에게 찬양 갔다고 바치고 “이거 받았으니까 은혜주세요.” 그거 뭐에요?
장사하는 거에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아무것도 안 주신다 해도 당신 자체가 너무 거룩하니까 그냥 경배드리는 거에요.
그게 참 경배자에요. 그런 참 경배자들을 주님은 찾으세요.
그런데 그런 참 경배자들은 죽음 통해서만 나와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광야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갈등이 있어요.
왜냐하면 그걸 통과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갈 수가 없어요.
그걸 통과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방도가 없어요.
우리는 너무 교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잘 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 과정을 겪어요.
그 과정을 겪고 나오면 그제서야 엘리야처럼 내 본질이 그분을 만나게 되고, 그분을 경배할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자원해서 겉옷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어요.
예수님도 땅에 엎드려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고개를 빳빳히 들고 주님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명령하면서 살고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됐어요.
내 삶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지 못하고 내가 하는 무엇인가 끼워맞추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온전히 회개해야 되요.
하나님은 영광이시고, 하나님은 영광을 보이기 원하세요.
그러나 내가 원하기 때문에 보이시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거에요.
하나님 자체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이 광야에서도, 이 힘든 가운데서도 그분을 그렇게 섬기기 시작할 때, 그 분을 경배하기 시작할 때.. 그 분은 그 외에 것은 다 더하여 주세요.
그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은 얼마나 거룩하시고, 나는 얼마나 거룩하지 못한지..
내가 주님 앞에 무엇을 한다고 했던 거 자체가 얼마나 거룩하지 못한 지..
내가 주님 앞에 드린다고 여긴 그 찬양 자체가 얼마나 거룩하지 못한 지..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거룩하지 못한 것을 드리면서도 불구하고 내 안에 세미한 음성으로 아직도 말씀하시고..
아직도 신발을 벗고 발이 더럽지만 여기 들어와. 발이 더럽지만 여기 들어와라 하시는 그 주님의 감격함..
그래서 자원해서 그 분 앞에 사랑의 경배를 드리는..
이제 그 새로운 시작을 할 때가 됐어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우리는 피조물로써.. 그런 사랑받은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소망인 피조물로써 그분의 신부로써, 그분과 끝까지 가는..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끝까지 가는 그러한 신부들의 부르심이 여러분에게 있어요..
♬주는 거룩 주는 거룩 주 밖에 없어요.♬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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