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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종류의 거룩한 눈물(눈물의 회복)Fam Worship 2024. 4. 18. 19:12
어버이 날이 되면 아이들이 평소에 안하던 짓을 많이 하죠. 부모님에게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그 부모님에게 선물을 준비할 때 아이들이 작은 머리로 생각하는게..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할까? 엄마가 무얼 필요로 할까?’ 그런걸 생각하면서 고사리같은 손으로 부모님의 선물을 준비하죠. 어떤 때는 큰 선물보다 그 아이들이 조그만 아이들이 쓴 편지 하나.
엉성한 글씨로 ‘아빠, 엄마! 날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한마디 쓴 거..
그것 때문에 부모님들은 선물을 받고 감격을 하는 걸 봐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아버지의 선물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가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 아버지는 어떤 것을 기다리고 계실까?’ 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주고 싶은 거, 내가 주고 내가 만족할 거..
아니면 더 나아가서 내가 이것을 줌으로 그분에게서 떨어지는 어떤 콩고물을 바라고 준다고 한다면.. 그건 참 비참한 광경이 될 것 같아요.
사랑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의 입장이 어떤가를 생각하는 거죠.
그 대상의 어떠한 입장에 있으며,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가를 배려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랑하는 대상이 아픈지, 슬픈지, 괴로운지, 기쁜지, 그분이 눈물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웃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분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거기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사랑이지..
내가 주고 싶은 거, 내가 하고 싶은 말.. 그것을 행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근본적으로 우리 가운데서 그 사랑이 많이 타락해 있고, 사랑의 관점 자체가 잘못되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우리가 “주 너희 하나님을 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 라고 한 말 자체도 사실은 이야기 하기가 부끄러울 만큼 우리가 그 사랑의 관점이 지금 타락해 있어요.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슴앓이를 처음부터 하고 계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에 굉장히 예민하세요.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닌 사랑을 가져오는 그 사랑 앞에서는 하나님은 분노하실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사랑 하나에 대해서만은 끊임없이 질투하시고 예민하신 하나님이세요.
그 하나님의 그 가슴앓이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이 됬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그 현장에서부터 하와로부터 시작된 그때부터 주님의 그 사랑에 대한 가슴앓이는 시작되요.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을 택하고,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을 주고, 그를 통해서 모든 민족에게 열방에게 복을 주려고 약속을 언약을 하시죠.
그것이 바로 사랑의 약속이셨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그 이기적인 야곱에게까지 복을 주시고, 요셉에게 복을 주시고..
그리하여서 그 애굽땅에 들어가서 노예생활을 400년 하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눈물을 주시고 애통함을 주셔서 그들이 볼 수 있게 하고, 그들을 출애굽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그런 다음에 시내산에 끌고가서 “너 나를 사랑할래? 내가 너를 사랑할께.” 하는 언약을 다시 세우시고..
그런 후에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주위의 모든 민족들이 그들을 보며 두려워하게까지 하시고..
그런 다음에 우상숭배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짧은 시간 징계를 주시고..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성에서 이기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하는 가운데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죠.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인 당신으로 만족하지 못하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주세요.”
하나님께서 눈 높이를 낮추셔서 왕을 주시기로 하시죠.
그리고 왕을 택하시고, 왕에게 기름까지 부어주시죠.
그러나 그 왕들은 시간이 가면서 계속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고 우상숭배하는 자리로 가기 시작하죠.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슴앓이가 계속 가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보시다가 견디지 못해서 그 현장으로 내려오셨죠.
예수님께서 오셔서 33년동안 사는 동안에 그분이 보신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사랑의 타락이었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토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은..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으라. 내 주 하나님을 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것이었어요.
비행기를 타고 가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우리 옆에 앉아서 새벽 5시에 해가 뜰때가 되면 머리에다가 뭘 뒤집어 쓰고 팔에 무엇을 감고 계속 기도를 해요.
근데 그들이 무슨 기도를 하냐?
손으로 제스쳐를 취해가면서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을 목례까지 하면서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해 온 그들이..
진짜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왜냐?
사랑의 관점이 깨어졌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사랑의 관점이 깨어져서 그들이 말로는 그렇게 하고 말씀을 상고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직시하시면서 그 아픔을 이렇게 토로하세요.
그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말씀을 상고하고 있었어요. 그들이 기대했던 것이 영생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은 말씀은 이렇게 상고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절기를 지키고, 모든 것을 다하고 율법을 지켰지만 그들이 예수에게 나아오지 않았어요. 왜냐?
이 사랑의 본체로 오신 그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는거죠.
이 사랑의 관점이 잘 못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사랑하는 대상이 어떻게 무엇을 원하는가..
그쪽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 내 유익을 위하여 사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사랑하는 대상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지 않는 이 모습을 뭐라고 표현하냐면?
“내가 너희들에게 영광을 취하려 함이 아니야. 내가 너에게 영광을 받으려 함이 아니야. 너희들은 너희가 절기를 지킴으로 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야.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거야.”
그래서 그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다만 내가 본 것이 무엇이냐면.. 너희들의 삶 가운데서 내가 본 것이 무엇이냐? 너희에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내가 보았다. 너희에게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상고하고, 모든 훈련을 다하고,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은 내가 보았는데..
그런데도 내가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보았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그 일을 하고 있었어요.
이것에 대해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하죠.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것은 영생을 얻는 길을 말하고 있어요. 요한복음 5장에서 영생을 얻으려고 너희가 말씀을 상고하고 있는데.. 지금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
하나님 사랑함이 없어서 내게로 오지 아니하고, 내게로 오지 아니하면 영생을 못 얻는다.
근데 그 말씀을 다시 풀이해서 말하는 것은 뭐냐면..
너희가 영생을 얻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이 뭐냐면?
주 너희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얻는 길이다.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그 당시에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예수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었어요.
말로는 그렇게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근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해라. 그래야 영생을 얻는다.
제가 이 말씀을 처음 읽었고 다시 한 번 마음에 다가왔을 때 제가 기도하고 있었어요. 제가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우리가 다 서 있더라고요.
하나님 앞에 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십자가를 믿었어요. 내가 예수를 영접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들이 뒤를 돌아서서 하는 말이 뭐냐면?
나에게 이 말씀을 왜 안 해줬어?
나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이나 지도자들이 왜 이 말을 나에게 안 했어?
왜 나에게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왜 말씀을 안 해주는거야?
그러면서 아우성치는 것을 보면서 제가 환상에서 나왔어요.
두렵고 떨렸어요.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계시면서.. 그 현재의 상황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앞날의 일을 예언하시죠.
예수의 영은 예언의 영이라.
앞날의 일을 예언하시면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마지막 징조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죠. 마태복음 24장 3절부터 쭉 해서 마지막의 징조에 대해서 나가다가..
그 마지막 징조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 가서 뭐라고 얘기 하시냐면..
불법이 성해진다는 말은..
주님이 원하는 단 하나의 법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거짓선지자가 일어나서 다른 법을 자꾸 얘기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쉐마 이스라엘! 주님이 말했던 단 하나의 법은..
주 너희 하나님을 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였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한 것도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그것이다.
그것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그것이 너가 살아가는 숨쉬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그 법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가 말하는 불법을 먹어 삼키면서 있다가 보니까 그렇게 먹어 삼키는 결과가 뭐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졌다.
그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라는 거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졌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도 할 여유가 없어진거죠.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죠.
무엇을 끝까지 견디는 건가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거짓된 미혹과 이 모든 삶 속에서..
끝까지 모든 것을 참으며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자.. 그들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아침을 눈 뜰 때부터 일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숨을 쉬고 살고 있나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주일 날 교회에 오는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함 때문에 나오나요?
내가 잠자리에 들 때 하나님을 사랑함 때문에 감격하며 잠자리에 드나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루를 살아가고 있나요?
그러면 그렇게 사랑을 해야 그렇게 사랑하는 자리까지 가야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얻는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데..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있어져야 우리가 그러한 뜨거운 사랑을 다시 들어갈 수 있나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모양인가요?
왜 하나님이 가슴앓이 하는 그 사랑에 대한 아픔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위로할 수 있나요?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절절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써 있어요.
첫번째 눈물..용서받은 감격으로 흘린 눈물
우리가 많은 경우에 이 본문을 보면서 향유를 가져다 부어주는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죠.
꼭 예수님께서 향유를 사랑했던 것처럼..
향유를 부은 믿음을 귀하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것에만 집중을 해요.
왜냐하면 치사한 우리의 인간적인 욕심과 계산으로 볼 때에는 그 향유가 값지니까요.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순서가 있어요.
주님이 처음부터 “시몬아 내 말을 들어라. 너는 감람유를 안 줬지만 이 여자는 향유를 부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말하시는 순서가 있어요.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1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셨다.
2 머리털로 씻었다.
3 내 발에 입 맞췄다.
4 그리고 향유를 부었다. 에요.
주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처음에 이 여자가 들어와서 흘렸던 눈물서부터 시작한 거지..
주님은 눈물없는 향유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눈물도 없고, 입맞춤도 없고 그러한 가운데서 가져온 향유는 주님은 거절하십니다.
근데 우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향유를 가져오길 기뻐하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주님을 타락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게 아니죠.
주님은 눈물 젖은 향유를 좋아하시고, 입맞춤이 가득한 향유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시몬은 그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을 받아주시고 계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은 주님을 참소하는 자리까지 가요.
이 바리새인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었냐면요 이거였어요..
향유를 붓는 거는 괜찮아요.
향유는 예수님 가까이 서지 않고 예수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부을 수도 있어요.
자기도 그건 할 수 있어요.
향유는 예수님 가까이 서지 않고 예수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부을 수도 있어요.
자기도 그건 할 수 있어요.
십일조를 바치고, 모든 절기를 다 지켰고, 자기가 모든 재산을 통틀어서 이 사람은 그거 다 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의 발에 가까이 오는 거..
그거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이 여인은 죄인이에요.
그 당시에 죄인이 유대인의 몸에 손을 댈 수가 없어요.
특별히 랍비에게 죄인이 와서 몸에 댈 수가 없어요.
이 사람들의 법으로는 더러운 것이 몸에 닿으면 나도 더러워지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선지자가 이 여자가 죄인인 줄 알면 자기 몸에 그 눈물이 떨어지게 할 수가 없어요.
그걸 이해 못하는 거에요.
향유를 부은 거를 이해 못하는 게 아니에요. 향유는 이해해요.
왜 그 눈물 흘리는 걸 이해못하느냐?
자기는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이 여자가 어떤 죄인인 줄 알면 저렇게 하지 못하게 했을텐데.’ 라고 주님을 참소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죠.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죠. 거기서 반박을 하시죠.
반박을 하시면서 “너는 내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어.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씻었어.” 그러면서 그 눈물의 이유를 설명하시죠.
바리새인과 시몬은 그 눈물의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왜냐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용서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지, 용서받은 적은 없기 때문에.. 죄인인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눈물이 이해가 안가요.
그래서 설명을 하시죠.
“이 여자의 눈물이 뭔지 알아?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눈물이야. 니가 나보러 생각하기를 내가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나는 너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이 여자는 분명히 죄인이야. 그리고 죄인인데.. 니가 모르는 이 여자가 지은 죄까지 나는 알아. 니가 모르는 죄까지 나는 알아. 나는 이 여자가 얼마나 처절한 죄인인지 너보다 훨씬 잘 알아.
그렇기 때문에 이 눈물의 의미가 뭔지 알아.
이 눈물의 의미는 내가 죄인임을 알고 그래서 내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그 감격의 눈물이야.
그래서 내가 이 용서받았다는 감격에서 나오는 이 눈물을 ‘나를 사랑함’ 이라고 내가 설명하노라.” 그게 본문의 이야기에요.
용서함 받은 것이 많은 자.. 사랑함이 많은 자..
사랑함이 많은 자는 용서함 받은 것이 많은 자.
그러면서 주님께서 이 여인을 높여요.
이 여인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시고 이 여인을 변호하세요.
그러나 아마 바리새인과 시몬은 끝까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을 거에요.
이해했으면 그 자리에서 예수의 발을 붙잡고 “내게도 그 눈물을 주소서” 라고 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말하죠.
“너 죄사함 받았어. 그거 분명해.” 그리고 마지막에 얘기하죠.
“니 믿음이 너를 구원했어.” 이 여자가 “믿습니다.” 이런 거 한 거 아니에요. 주님 앞에서 감격했을 뿐이에요.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뿐이에요.
내가 죄인임을 알고, 내가 용서받은 자이기에 거기서 나오는 감격으로 눈물을 하나님에게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한 거에요.
이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 사랑이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이 사랑이 이 사랑을 찾아서 예수님은 33년 반 동안 이 땅을 걸어가고 계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걸어가는 예수님의 발걸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셨어요.
다윗이 이 비밀을 알아요. 이런 눈물의 귀한 비밀을 알아요.
그 값진 눈물이 싸구려 눈물이 아니라 내가 힘들기 때문에 우는 눈물이 아니라 내가 용서받았다는 감격에서 나오는.. 내가 죄인이었어 라는 그 감격에서 나오는.. 그러나 용서받았어 라는..
그러나 오늘은 내가 또 죄인이야 그래도 나는 또 용서받을 자야 라는 감격에서 나오는 그 눈물의 값어치를 다윗은 알아요.
그래서 시편 56편에서 그렇게 고백해요.
그 눈물이 하나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아요.
다윗이 지금 얘기하는 거는 “하나님! 당신의 병이 있는데 당신의 그 귀중한 병이 있는데 하늘 나라에 당신이 당신 옆에 두신 그 병에다가 주님 담아주세요.”
내 헌금을 담아주세요가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성경을 읽었는지 담아주세요.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담아주세요.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향유를 부었는지 그걸 담아주세요 가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위하여 얼마나 무엇을 했는지를 담아주세요가 아니라 내가 용서받은 감격과 내가 이 세상 광야에 살면서 그런 흘린 눈물.. 그걸 담아주세요.
그 눈물이 주님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주님이 간직할만한 귀한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눈물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다윗은 알았어요. 그래서 거기에 담아 달라고 이야기해요. 더 나아가서 당신의 책에 내가 흘린 이 눈물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과연 주님에게 무엇을 기억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무엇을 거기에 담아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나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이 바라보시는 건 내가 죄인임을 알기에 그런데 나를 용서하신 그 감격에서 나오는 그 눈물이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두번째 단계의 눈물이 있어요. 첫번째 단계의 눈물은 바로 이런 눈물이고요..
두번째 단계의 눈물이 있어요. 요한복음 20장.
시몬 베드로와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가 함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으로 달려갔어요. 무덤에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신이 거기 없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마리아는 거기 남아있어요.
요한복음 20장 10~13절 두번째 눈물.. 예수님을 사모하기에 만나고 싶어서 우는 눈물.
천사가 나타났는데요. 마리아에게 천사가 물어보는 질문이 참 우스워요.
여러가지 다른 질문을 할 수 있어요.
마리아에게 “야! 베드로와 요한은 갔는데 너는 왜 안 갔냐? ” 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 “마리아! 너 여기서 뭐하냐?”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어요.
근데 이 천사의 관심을 끈 것이 뭐냐면? “왜 우느냐?”
천사가요. 신기한 거에요. 그 눈물이 너무 소중해 보이는 거에요.
아마도 천사는 눈물을 모르는 것 같아요.
그걸 바라보면서 “왜 우니? 왜 우니?”
왜냐?
그 운다고 하는 그 눈물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귀한 건지를 알기 때문이에요.
“왜 우냐?” 그랬더니 마리아가 이야기하죠.
“사람이 내 주.. 내 주인되신 그 분을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너무 보고 싶은데.. 내가 주님을 너무 사모하는데.. 그 주님이 여기 안 계시니까 그분이 어디계신지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울고 있나이다. 그것을 봐야만 되겠기에 내가 울고 있나이다.”
그렇게 말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옆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참다못해 자기의 모습을 보이세요. 그러시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예수님이 지금 왜 우는지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자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운다고 얘기했어요.
지금 그 두가지 답을 그 앞에 마리아가 다 했다고요.
“내가 우는 이유는 내 주님을 너무 사모하고, 내 주님을 보고 싶은데 주님이 안 계셔서 그래서 웁니다.”
주님이 다 들으셨어요. 이미 다 들은 답을 주님이 다시 요구하세요.
“너 왜 울어? 누구를 찾어?”
왜 울어를 넘어서 이제는 누구를 찾냐? 이미 들은 답인데 그걸 또 얘기하세요. 왜요? 듣고 싶으시죠.
“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니가 왜 우는지 니가 날 사랑해서 내가 보고 싶어서 운다는 그 얘기를 나에게 한번 다시 해줘. 나의 시신이 없다고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베드로와 요한과는 달리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여기서 울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너의 그 고백을 내가 다시 듣기를 원해. 내가 듣기 원하는 건 그거야. 내가 보기 원했던 건 그 눈물이야.”
그 얘기를 하시는거죠.
“다시 말해봐.”
천사가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봐. 너 왜 울고 있어. 누구를 찾고 있는거야. 다시 말해봐.”
베드로와 요한은 천사를 보지 못했어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거의 같은 시간에 마리아는 천사를 봤어요.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이 서 계신 것도 보지 못했어요.
베드로와 요한 앞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모습을 감추고 계셨어요.
마리아 앞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어요.
그 차이가 무엇인 거 같으세요?
똑같이 무덤에 달려갔어요.
그 차이는 눈물에 있었어요.
근데 우리의 문제는 뭐냐면?
이런 눈물의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의 기근으로 쫙쫙 갈라진 가슴속에는 그 눈물이 살아나지 않는다는데 있어요. 이것이 우리의 문제에요.
우리의 마음이 너무 돌처럼 딱딱해져 있는 거에요.
이 여인이 이 마리아가 그렇게 울고 주님을 찾는다고 고백한 후에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놀라운 일을 부탁하세요.
여러분 부활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첫번째 복음을 전한 증인이 누구인지 아세요?
베드로가 아니에요. 요한도 아니에요.
이 바보같은 죄인, 죄 많은 여인. 어쩌면 일곱 귀신 들렸던 그 여자. 그 여자였어요.
사도행전이 시작하기 전에 예수의 부활을 전한 자가 누구냐면?
이 막달라 마리아였어요.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모하는 자가 흘리는 눈물의 위력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얼마나 하나님께서 위로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세워주시는 거에요.
그러나 그렇게 세워주기 때문에 주님을 사모하는 건 아니죠.
이 마리아가 흘렸던 눈물은..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고,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 그 감격에서 나오는 눈물에서 나와서 이제는 그렇게 그분을 너무 사랑하는 자리에 갔기에 그분을 너무 사모하고, 그분을 너무 보고싶은 그 눈물이에요.
그런 다음 그 다음 차원의 눈물이 또 있어요.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북문으로 들어가서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우상을 섬기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그것을 나누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최고로 마음 아픈 일이었어요.
하나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일이었어요.
하나님의 집이라 하는 곳에 들어와서 모두가 들어와서 우상숭배를 하고, 벽에는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들이 다 그려있는 그런 자리..
동쪽을 바라보면 태양을 향해서 제사장들이 절하고 있는 그 현장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찢어진 마음을 보여주세요.
그리고서 주님께서 구별된 자들을 보여주기 시작하세요.
세번째 눈물..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우는 눈물
이마에 인을 친 자(이마에 표 있는 자)
그런데 여기 본문에 말하기를 이마에 인을 누구에게 치느냐?
이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가증한 일 때문에 애통하며 우는 자에게..
무슨 얘기냐면?
내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우는 자.
내가 망신 당했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우는 자.
내 안타까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타까움 때문에..
내 가슴앓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슴앓이 때문에 우는 자.
그들의 이마에 표를 해라.
그들이 구별된 자들이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있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것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9장에서 또 이렇게 얘기해요.
똑같은 이야기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주님께서 이마에 인 친자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인을 맞은 사람은 해하지 말라” 하니까.. 이마에 인을 맞은 사람이 누구냐면?
에스겔서 9장 4절에 나오는 그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우는 자.
에스겔서 9장에서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어요.
마지막에 이 사람들을 해하지 말라. 이마에 인 맞은 자.
이마에 인 맞은 자는 누구냐?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우는 자.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우는 자.
이것이 3가지 종류의 ‘거룩한 눈물’ 이죠.
저는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눈물의 기름부음’ 이라고 얘기해요.
첫번째 죄를 용서 받은 데서 나오는 눈물..
그것이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 눈물입니다.
두번째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예수님을 사모하기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우는 그 눈물..
그것이 누가복음 7장에서 마리아가 엎드려져서 그의 발에 입 맞추는 사모함입니다.
마지막에 에스겔서 9장에서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내가 울겠다고 하는 것. 내 아픔은 포기하고, 당신의 아픔 때문에 내가 울겠습니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7장에 여인의 향유를 부음입니다.
향유는 몰약과도 같아요.
내 아픔은 죽고, 당신의 아픔 때문에 내가 웁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그 자리까지 데려가려 하시는데..
이 모든 자리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인데..
그 사랑하는 표시의 처음 시작이 어디냐 하면?
‘내가 죄인인데.. 나를 용서하셨어.’ 하는 그 감격에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우리에게 만약에 그것이 메말랐다고 한다면 우리 다시 시작해야 되요. 우리에게 그분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당한 환경 때문에.. 내가 억울함 때문에.. 내가 처한 환경 때문에 그러고 있다고 한다면..
다시 시작해야 되요. 그 눈물로 다시 돌아가야 되요.
요한계시록에 에베소교회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있죠.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참음과 게으르지 아니함과 부지런히 일함과..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한 거.. 다 알고 계시죠. 그거 다 아시죠. 많은 훈련을 받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깨달았죠.
그런데 주님은 말하죠. “첫사랑을 잊었어.”
그 첫사랑이 뭐냐?
너가 죄인인데 내가 너를 용서했기 때문에 거기서 흘렸던 너의 눈물..
그 사랑의 감격이 너에게서 없어졌어. 그것이 없어졌어.
왜냐?
너무 많이 알아서, 너무 많이 깨달아서, 너무 위장이 커서, 너무 가진 것이 많아서, 너무 받은 것이 많아서..
그래서 그 처음에 강렬하게 가졌던..
내가 죄인이기에 나를 용서했기에 그래서 그 회복 때문에 나오는 그 눈물..
그것이 메말라 버리고 말았어요.
그것을 보고 주님은 “첫사랑. 그걸 잊어버렸어.”
“니가 얼마나 커졌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니가 처음 그것을 기억하고 지금도 그것 때문에 감격하느냐가 문제야. 그것이 중요해!! 그것이 중요해!!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니 마음의 눈물이 메마른거야.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니 마음의 기근이 니 가슴이 쩍쩍 갈라져 있는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로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품을 수도 없는거야. 그 가슴에서 쩍쩍 갈라진 가슴 밭에 무엇을 심으면 무슨 열매가 나겠느냐? 거기에 물이 주어져야 되지 않겠는냐?
그러나 그 물은..
구원받은 감격에서 오는 그 회복 받은 그것에서 나오는 눈물로 적셔져야 그 가슴이 이제 거기서 열매가 맺을 옥토가 되지 않겠느냐..”
다윗이 이것을 알죠.
시편 51편에 보면 그의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주님에게 다 고한 후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 내가 정말 죄인입니다. 나를 정결케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과 새로운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정직한 영을 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성령을 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그 결론이 뭐냐?
“하나님! 내가 아는데 이것이 있어야만 내가 되겠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옵소서.
그것이 내게서 떠나갔습니다. 그것이 회복되어야만 되겠습니다. 그것이 회복되면 내가 자원하는 심령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원하는 심령이 되면..
“내가 가르쳐도 가르쳐도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내 마음에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이 터져라 외쳐도 사람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변화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구원받았고 내가 죄인인데 나를 용서함 받았다는 이 눈물이 이제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그 감격을 회복시키소서. 나에게 그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그러면 내가 다시 자원하는 심령이 생기고..
그리하면 내가 주의 법을 말하면 이제 내 말을 듣고 그들이 돌아오리이다.”
다윗이 이것을 고백하고 있어요.
우리가 어디까지 가던지간에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던지간에 지금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회복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때 그 일이 너무 까맣게 잊어버렸어요.
너무 많이 와서..
어제 당한 일, 그제 당한 일, 지금 내가 힘든 거 어떻게 해야 되고, 무엇을 더 받아야 되고 내가 더 고침을 받아야 되고.. 이런 것에 집중하다 보니까..
이미 내가 받은 거. ‘내가 죄인이었지. 지금도 죄인이지. 근데 용서함 받았지.’
이 사실을 까맣게..
저 속에는 있지만 생생하게 기억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기억하게 하시길 원하죠.
다윗이 범죄했을 때..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살인했을 때 주님이 그걸 안 보셨을까요?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다 보고 계셨어요.
주님이 보시면서 불꽃같은 눈으로 그곳에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시면서 ‘지금 저렇게 범죄하러 가는구나. 지금 저렇게 죄를 범하러 가는구나. 지금 저렇게 악한 맘을 품었구나. 저렇게 악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리고 결국은 살인까지 했구나.’
다 보고 계셨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걸 막지 않고 그걸 참고 보고 계시는 하나님..
막을 능력이 없나요? 아니요. 일부러 참고 계시죠.
왜냐?
그것을 통해서 다윗이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 아는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죠.
그것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용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더 깨닫게 하고 거기서부터 구원의 즐거움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주님이 아파서 견딜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참고 계시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10년, 어떤 사람에게는 15년, 어떤 사람에게는 5년,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걸 참고 계시죠.
그러나 우리는 그 옛날에 그 기억을 이제 잊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계속 이야기 하죠.
“기억하라. 기억하라.”
출애굽을 시킨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10년 뒤에 보니까.. 모세에게 노래를 만들어. 노래를 제발 만들어라. 이들이 다 잊어버릴꺼야. 이들이 나에 대한 이야기.. 내가 어떻게 구했는지 다 잊어 버릴꺼야. 노래를 만들어라.
그래서 그들이 그 노래를 부르며 내가 어떻게 그들을 끄집어냈는지 기억하게 하라. 기억하게 하라. 제발 기억하게 하라.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여호수아에게 말하죠. 여기다가 돌을 12개를 세워라. 그래서 그것을 보고 기억하게 하라. 내가 요단강에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했는지 기억하게 하라. 기억하게 하라.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는 이것을 먹고 이것을 마시므로 나를 기억하라. 제발 기억하라. 너희가 이것을 잊어버릴까봐 내가 두려우니 제발 기억하라. 이것을 기억해야 너희에게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리라.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기억할 것이 많아서 그것을 기억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구원의 즐거움과 그것에 대한 감격과 그것으로 인한 눈물이 우리에게 메말라가고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첫사랑의 자리를 기억하라’ 하시는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볼 때 어떻게 기억하시는가?
주님께서 내가 그렇게 검은 존재로 있을 때 나를 보시면서 무엇을 기억하고 계시나?
내가 탈진해서 지쳐가고 있을 때 나를 보면서 주님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내가 아직도 주님에게 이것을 달라고 다고다고 거머리처럼 외치는 그 현장에서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무엇을 기억하고 계시나?
예레미야 2장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주님이 기억하시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는 다 잊어버렸지만 주님은 기억하고 계세요.
너가 철없는 그 때에.. 니가 아직 복음에 대해서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를 때.. 니가 말씀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을 그 때.. 니가 기도의 능력이 뭔지도 몰랐을 그 때..
그 때 나의 구원의 복음을 니가 이만큼 받아들이고, 너가 죄인인데 용서함 받았다는 그 감격 때문에 내 손을 붙잡았던 그것을 내가 기억하노라. 그 때 그 모습을 내가 기억하노라. 내가 너를 바라볼 때 지금 넘어져있는 니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는 그 때 그 모습을 기억하노라.
주님은 끊임없이 첫사랑의 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데..
우리는 이쪽으로 와 있는거죠.
이쪽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주님께서 “기억해라. 나는 너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음이야” 라고 말씀하시는거죠.
사실은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거죠.
나는 기억하지 않지만 그분이 나를 그렇게 기억하시니까.
주님이 기억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행한지 아세요?
주님이 스스로 얼마나 겸손하셔서 기억하시려고 안간 힘을 쓰시는지 아세요?
여러분 상상도 못하실 거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어요. 언약을 하셨어요.
이스라엘의 옛날 역사를 읽어보면 유대인들이 언약식을 하는 게 있어요.
언약식을 할 때 3가지 물건을 교환하게 되고, 약속을 하고, 계약서를 쓰고.. 그런 후에 잔치를 벌려서 음식을 만찬을 차려놓고 만찬을 먹어요.
그러면서 포도주를 주고 받아요.
꼭 예수님의 성만찬 하는 것 같죠. 그죠.
포도주를 주고 받고 그 후에 두손으로 하는 일이 있어요.
각자의 팔목에다가 상처를 내요. 칼로. 팔목에 칼뜸을 넣어서 상처를 내요.
그럼 여기서 피가 나죠. 그러면 손목에 상처난 부분을 피를 서로 맞대요.
피로 언약을 맺어요. 그런 후에 그 팔목을 가지고 바깥으로 나가요.
바깥으로 나가서 가장 거치른 땅으로 가요. 모래가 많은 그 땅으로 가요.
돌이 팍팍이는 그런 땅으로 가서 그 돌무더기, 흙무더기를 집에서 이 상처난 부분을 그걸로 막 문질러요.
왜 그런지 아세요?
문질러서 이 팔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길 수 있게 찢어요.
이것이 아물면서 딱지가 떨어지면서 여기에 큰 흔적이 생겨요.
그리고 언약을 맺은 상대방 둘은 이 흔적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죠.
‘아! 내 언약의 흔적이야. 그런데 내가 이 언약을 깨뜨리면 안 되지.’ 그러면서 언약했던 그 자리로 돌아가요.
여러분의 팔목에는 그런 흔적이 없어요.
그러나 아실거에요. 누구의 팔목에 그런 흔적이 있는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예수께서 앉아 계세요.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그 언약의 처음 순간을 너무나도 기억하길 원하세요.
그래서 예수의 팔에 생생히 남겨있는 그 팔목에 있는 흔적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결심하고 결심하시죠.
‘내 아들이 저렇게 했고, 저것이 내 언약의 표시이니까 내가 저들을 아직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저들을 위하여 오래 참으리라. 하루가 천년 같아도 내가 오래 참으리라. 내가 언약을 지키고야 말리라. 나는 그 구원을 허락했던 종들의 하나님. 너에게 구원을 주기로 약속 하였노라.’
그 흔적을 보시면서 주님은 계속 스스로 기억하시죠.
그런가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하나님의 보좌위에 무지개가 들려있다고 되어 있어요. 무지개가 뭔지 아시죠?
노아의 홍수 뒤에 하나님께서 언약하셨어요.
“다시는 내가 물로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분의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에요.
무지개를 놓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심하시죠. 무지개를 보시며..
‘내가 저들을 구원해야지. 내가 물로 저들을 그렇게 완전히 쓸어버릴 수 없음이야.’
그분께서 그분이 스스로 흔적을 놓고 우리를 예레미야 2장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보고 계심이에요.
우리의 삶에 많은 상처가 있어요. 우리의 삶에 기억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어요. 근데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고 있는 그 예수의 흔적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예수의 흔적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죄인인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구원이죠.
가장 시시한 것처럼 생각되는 그 처음의 첫사랑..
지금 무엇을 좀 알기 때문에 굉장한 것을 할 수 있는 거 같은 그런 거 말고 진짜 내가 죄인인데 나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그 감격.. 그것을 보이는 그 흔적..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서 눈물로 울 수 있을 것이죠.
주님 앞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눈물이 회복 될 거죠.
그러면 그때부터 그 눈물이 회복될 때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 거룩한 사랑, 구별된 사랑의 여정이 시작이 되는 거죠.
타락하지 않은 사랑..
그것을 보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하죠.
내가 오늘이라고 하는 날에.. 예수의 흔적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예수의 흔적이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냐하면? 나 죄인이었어. 근데 용서함 받았어. 그래서 오늘도 살아갈 수 있음이야. 근데 오늘도 또 죄인이야. 그러나 나 또 용서함 받았어.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이야. 그 감격이 계속 우리 마음 가운데 생생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거죠.
아무도 나를 괴롭게 말라.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지 말라.
근데 그 아무도 라는 것 속에.. 가장 나의 원수인 내가 포함이 되요.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우리 자신이에요.
우리 자신이 우리를 향하여 손가락질 하는 거.. 그것이 거기에 포함이 되요.
내 안에 내가 흔적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요.
그러나 예수의 흔적을 바라보면 그 흔적이 내 안의 흔적이 되죠.
세상에 사랑의 타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타락한 사랑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정결한 사랑을 찾습니다. 정결한 신부를 찾습니다.
그 신부의 첫걸음이 어디냐?
눈물의 단계가 그렇게 높은 차원의 눈물의 단계가 있지만..
그 모든 눈물의 첫번째 단계인 정말 시작해야 될 그 시발점이 어디냐?
내가 죄인인데.. 내가 용서 받은 자라고 하는 그것에서부터 오는 그 눈물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거기서부터 주님을 향한 정결한 사랑이 시작이 됩니다.
그것이 있으면 오늘의 삶 가운데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억하기 보다는 예수의 흔적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 예수의 흔적이 나로 하여금 구원받은 즐거움을 회복시키십니다.
주님께서 00 교회에 큰 소원을 가지고 계세요.
00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중보하는 교회에요.
주님의 마음을 중보하며 주님 앞에서 주님의 아픔 때문에 애통하는 자리에까지 가려면 이 눈물의 회복부터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는지 제가 압니다.
근데 때로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거야? 내가 더 갖다드리면 주님이 사랑을 받으실까?
과연 내가 뭘 더 해드리면 주님이 사랑을 받으실까?
그러나 주님이 염려하시는거는 내 마음에 감격이 없어졌음을 염려하십니다.
우리도 바리새인, 시몬 베드로처럼 될 수 있어요.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것을 섬기고, 주님 앞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고, 하루에 10시간, 12시간씩 기도하면서 살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눈물이 없었어요.
주님께서 제 맘에 여러분들에게 눈물의 회복을 주시기 원하는 것 같았어요.
사람들에게 보기에는 가장 약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이 눈물입니다.
구원받은 눈물.. 그 감격 때문에 흘리는 눈물 앞에서 주님은 그 사람을 변호하고 나서십니다.
하나님을 사모해서 흘리는 눈물 가운데에 주님은 그 사람을 참된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내 아픔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픔 때문에 우는 자들에게 그 이마에 주님은 인을 치십니다.
여기까지 데려가시기 원하시는 주님..
그분이 오늘 시작하려고 하는 건 처음입니다. 첫사랑..
우리에게 그 눈물을 회복 시키고자 하심입니다.
주님! 나에게 다윗에게 주었던 것처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내가 너무 멀리와서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것 같이 여겨지고..
내가 너무 멀리와서 내가 주님 앞에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기염을 토하고 있지만 내 안에 그 반응했던 원초적인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회복시키소서. 그것을 인한 눈물을 내게 회복시키소서.
그런 소원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그분들에게 그 눈물의 회복을 주실 거에요.
우리가 찬양을 하면서 너무나도 크고 위대한 찬양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잊어버린 찬양이 있어요.
내 죄를 속하신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거..
그거 안한지가 너무 오래 됐어요.
여러분 잠깐 눈을 감고.. 예수 발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마리아의 자리에 여러분들이 들어가서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바칠 것인지 내가 어제도 넘어지고 오늘도 넘어졌기 때문에..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분이 용서했다는 그 회복에 그 구원의 즐거움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
그것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눈물을 쏟을 건지..
그것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눈물을 쏟을 것인지..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여러분 그 자리에 가서 여러분 스스로 그 자리에 엎드려지세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세요.
주님! 내게 그 눈물을 회복시키소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쩍쩍 갈라진 이 마음 가운데에 그 눈물이 절여지게 하소서.
딱딱하게 굳어진 내 맘.. 훈련 받느라고 너무 딱딱하게 굳어진 내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이여! 이제 가장 약했던 그 순간.. 내가 죄인인데 당신이 주님께서 나를 용서했다는 그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
거기서부터 나오는 가난한 눈물이 내게 회복되게 하소서. 거기서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찬송합니다 찬송합니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니다♬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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