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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로 부르심 2Fam Worship 2024. 4. 18. 11:02
지난 시간에 순종이 아니라 동행하는 자리에 가는 이야기를 드렸어요.
우리가 동행하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 말씀하시는 주님..
바로의 준마에게는 일어나 함께 가자 나와 동행하자 하고 말하지 않죠.
신부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죠.
근데 그 동행의 자리가 어떤 거냐면?
포도나무와 가지 같은 사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거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쉽다 그러한 안식이 주어진다고 말씀했어요.
그런데 주님이 데려가는 그 다음 차원의 동행이 또 있어요.
아까 2장에서 본 10절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 하고는 또 다른 차원으로 초청하시는 이야기에요.
2장에서는 “이제 괜찮아. 겨울이 지났잖아. 봄이 됐잖아. 그러니까 나와. 이제 가자. 가자..” 이야기 하시는 거고..
이제 4장에서는 그 다음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요. 일어나서 가자고 하시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아까는 말씀을 안 하셨는데.. 지금은 어디로 가는지를 말씀하기 시작해요.
그 자리가 어디냐면?
더 이상은 우리의 상황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큰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
우리의 문제와 내 것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상황..
내가 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이겨야 할까?
나에게 없는 것을 어떻게 채워야 할까 하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을 꿰뚫는 하나님의 소원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차원..
거기까지 가자고 지금 얘기하시는 거에요.
거기 가려면.. 나와 함께 일어나서 가는데.. 이런 저런 과정을 겪게 된다고 하시는 주님의 소원이 우리를 거기까지 부르시는거죠.
그러면서 그렇게 얘기하시죠.
주님이요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스타일이 항상 동일한 것 같더라고요.
처음에 대충 칭찬하고, 그다음 살짝 혼내고, 그 다음에 결론을 얘기하시더라고요.
근데 주님이 혼내려고 얘기하는게 아니라.. 결론을 얘기하려고 하는거거든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일곱 신부.. 그들에게 마지막에 주시는 약속이 뭐였냐면? 동산에서 행했던 그 약속이거든요.
생명 나무를 먹게 하고, 거기 나와 함께 있게 하고, 나와 함께 먹고 마시게 하고, 내가 너에게 이름을 주고, 내가 너에게 유전인자를 주었으니까.. 너는 내 자식이니까 내 이름을 가지고.. 그런식으로 약속하신 것처럼..
여기서도 좋다, 사실은 나쁘다, 더 좋다 라는 것이 나와요.
우리 눈에는 그게 잘 안 보이는데.. 제 눈에는 제가 겪은 과정을 통해서는 그게 쪼금 보여서 그걸 나누기를 원해요.
여기에 보면 처음에 일단 칭찬을 하세요.
여러가지 칭찬을 하세요.
정말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어쩌면 니가 입술로만 나를 사랑한다는 것 같아요. 꼭..
왜냐하면 칭찬하는 자리가 니 입술 밖에는 없어요.
입술에서 꿀이 떨어진다.. 그러고 끝이에요. 그 다음에 뭐 다른 말이 없어요. 모두 아름답다.. 모두가 아름답다가 없고, 니 입술에는 꿀이 떨어지고 니가 입은 옷은 향기로와.. 우리가 입은 옷은 예수 그리스도.. 그건 아름다워..
근데 니 입술에서 나오는 거.. 그것만 아름다워.. 그것만 꿀이야..
그러면서 그 다음에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이것이 우리가 듣기에 칭찬 같이 들려요. 그러니까 만약에 이것을 정결하다는 의미에서 따로 구별됬다는 의미에서 들으면 그게 칭찬 같이 들려요.
근데 하나님의 소원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에 보면 뒤에 그것이 사실은 잠근 동산이고, 덮은 우물이고, 봉한 샘인데..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은 그게 아니야. 너가 잠근 동산으로 너 혼자 그러고 있기를 원하는 게 아니야..
덮은 우물처럼 되서 너 안에서만 물이 나길 원하는 게 아니야..
봉한 샘이 되서 너 혼자만 좋다, 좋다.. 너 혼자만 사랑을 느끼고 그러고 있는 걸 원하는 게 아니야..
시야를 넓혀서 너의 문제에 급급하지 말고.. 이제는 내가 말하잖아..
내가 말하는 상황으로 나아가자. 내가 보는 문제를 보고, 내가 보는 기쁨을 함께 보자. 하면서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너는 잠근동산인데.. 지금은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니가 잠근동산으로 남지 않고 동산의 샘이 되는거야..
너가 덮은 우물로 있지 않고.. 덮은 우물로 있어서 그냥 거기서 물이 썩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수가 나는 우물이 되는 거야..
봉한 샘이 아니라 흐르는 시내가 되기를 원하는거야..
그게 하나님의 소원인 거에요.
우리는 잠근 동산 같고, 덮은 우물 같고, 봉한 샘 같아서.. 나 하나를 그 사랑에서 온전히 내 문제만 해결되면 되고, 내 괴로운 것만 해결하면 되고, 나만 주님이 사랑해주면 되고, 그 자리에 있으면 행복하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님이 말하는 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너를 데려 가려고 하는 자리는 이 자리야.”
그래서 그게 “너는 이게 아직 못 됐잖아.” 하고 혼내는 것이 아니라.. 시몬을 베드로라고 이미 불러주신 주님께서..
“아니 아니, 너는 잠근 동산 같지만 실제로 너는 동산의 샘이야. 잠근 동산 같이 보이지만 이 동산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물을 마시는 동산의 샘이야.”
그건 뭐냐면.. 지금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걸로 내가 널 그렇게 되게 하려 함이야. 널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한테 지금 가자고 하는 거야. 내가 너를 덮은 우물되서 그냥 썩어 있는 물.. 그냥 그 안에서 그것만 해결하고 축여지는 그 물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생수가 나는 우물.. 그래서 너에게 사람들이 오면 거기서 나는 물을 먹고 살아나는 생수의 우물이 되게 하려 함이야. 그렇게 되려면 나와 함께 가야 해. 나와 함께 가서 이제 이 산 위에 올라가서 시야를 넓게 봐야 해. 그게 뭐냐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뚫는 나의 관점과 나의 아픔과 나의 눈물과 나의 기쁨과 나의 소원을 봐야 해. 그러면 넌 이걸 보고 나면 더 이상 잠근 우물처럼 내것만 내것만 구하는 차원에서 나올꺼야. 나와서 이제 동산의 샘이 되기 시작하고, 생수가 나는 우물이 되기 시작하면.. 이제 너뿐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데..(흐르는 시내)
그러려면 나와 함께 가야 해.”
그런데 이 여자는 가지 않죠.
근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 다음에 보여주는 광야가 너무 힘든 광야인 거에요. 그 힘든 광야가 뭐냐면?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좁은 길이고, 눈물의 길이고, 아픔의 길이라는 거에요.
보잘 것 없는 길이라는 거에요.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밤 이슬에 머리가 젖고, 발이 더러워지고, 그렇게 비오는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 되는 그런 자리에 가는 그런 모양이라는 거에요.
그 자리로 가면.. 어쩌면 니가 나한테 그렇게 기도했던 그 기도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 자리, 니가 그렇게 원했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자리, 그렇게 니가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아직까지 니 손에 잡혀지지 않는 그러한 축복들, 그것들이 이제 잡혀지지 않는 니가 나를 볼 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하나님으로 여겨지는 자리..
그 자리에서 진짜 나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는 거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원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거기서부터 하나님과 동거동락하는 온전한 동행이 이루어져서..
더 이상은 막힌 우물이 아니라 덮은 우물이 아니라 생수가 되는 우물이 되고.. 닫힌 동산이 아니라 동산의 흐르는 샘이 되고..
그런 존재가 된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 주님의 소원이죠.
여기까지 데려가시려고.. 여기까지 데려가시려고.. 여기까지 데려가시려고..
그냥 나와 주님이 좋아서 포도나무, 가지 이러고 가면.. 좋은 상태가 아니라.. 그 상태에서부터 그것으로 인해서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낳는 자리까지 가게 하시기 위해서.. 룻과 요한계시록까지 가서 마지막 영광스러운 한꺼번에 가는 신부들.. 공동체로 다같이 가는 신부의 자리에 서서.. 이제 그 자리에 들어가는 자리에 가려면.. 이 두번째 초청에도 나가야 하는 거죠. 근데 여기가 더 힘든거죠. 이 광야 얘기를 제가 할께요.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려는 차원과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가 가려는 차원이 너무 다른 거에요. 너무 다른거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차원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차원이 너무 다른 거에요.
그분은 그분 전체를 주려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받으려고 하고 있으니까 이게 계속 평행선인 거에요. 그러면서 필요한 걸 조금씩은 채워주지만.. 관계 개선이 안 되는 거에요.
계속 우리는 그거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안 주어지면 그 하나님이 나를 버렸냐? 왜 이렇게 안 되나? 이러면서 계속 조금은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믿어 나갔다가, 또 실망했다가.. 이러는 자리에 가죠.
그러나 하찮은 인간들의 결혼식에서도 뭐라고 얘기해요?
슬플때나 기쁠때나 함께 가라.. 그거잖아요.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 그렇게 얘기하죠..
주님도 신랑, 신부하고 똑같은 사랑의 관계거든요.
주님이 지금 말하는 건..
“내가 너한테 기도하는 거 들어주지 않지.. 내가 너한테 이거 원하는 거 주지 않지.. 아무것도 안 주지..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하나님같이 보이지.. 그 상황에서 나를 사랑하느냐” 는 질문이신거죠.. 그 상황에서..
아가서 1장서부터 보면 이렇게 나오죠.
처음에 첫번째 광야가 그냥 육신적인 광야..
육신적인 광야 속에서 내가 살기 힘들고, 내가 종노릇하고, 내가 힘들게 살고, 세상에서 종노릇.. 또 종교생활하면서 종노릇.. 그 모든 종노릇 한 가운데서..
드디어 입맞춤이 와서 내가 검다는 걸 깨닫은 그것이 첫번째 광야..
거기서부터 손을 내밀어서 나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세요 라고 하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제 두번째 광야가 주어지죠.
두번째 광야가 주어진 후에.. 그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 이분에 대해서 그 고백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첫번째 광야에서는 이렇게 고백을 하죠.
여기서 우리 귀에 제일 많이 들어오는 단어가 무엇인지 보세요.
지금 이 여자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인데..
여기서 가장 많이 들어오는 단어가 뭔지 보세요..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가 뭐에요?
‘나’ 에요, 그게 문제인거죠. 그건 아직 온전한 사랑이 아닌거에요.
‘나 나 나’ 때문에..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가지기 위해서, 그분이 나에게 기름부음을 주니까, 그분이 나에게 입 맞춰주니까, 그분이 나에게 향기가 되니까, 그분이 나에게 이렇게 하니까.. 그건 아직 사랑이 아니죠.
어떤 남자가 여자랑 결혼 할 때도.. 당신이 나한테 이럴 때마다 이렇게 해주니까, 차 사주니까, 커피 사주니까.. 그것 때문에 결혼하자고 하면 결혼할 남자가 누가 있어요?
지금 그런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어요. 나, 나, 나, 나 나밖에 없어요..
당신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안하고.. 나, 나, 나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근데 이것도 사랑이라고 주님은 받아들여요. 그것도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요.
그러면서 그것에 대한 사랑하는 분의 응답이 이거죠.
이게요 굉장한 칭찬이에요. 근데요.. 보세요.
‘눈이 비둘기 같다’ 가 사실은 눈만 비둘기 같다 하고 똑같아요.
다른 말로 하면.. 눈만 아름답다 하고 똑같아요.
요거만 아름답고, 입이 아름답다는 말은 없죠. 목이 아름답다는 말도 없죠. 눈만.. 이 눈이 뭐냐면요?
나, 나, 나.. 내것을 받기 위해서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 그 눈..
내 것을 받기 위해서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그 눈도 아름답다.
그러나 주님은 “니 입술은 시커먼 거짓말을 하고 있어. 니 뱃속에는 탐심이 들어있어. 너만을 위하는 사랑의 고백을 하잖아.” 라고 절대로 얘기하지 않으세요.
뭐라고 얘기하냐면? 니 눈이 아름답다.
없는 것을 바라보시고 말하지 않고, 주님은 있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높여주세요.
그런데 우리는 그분과 반대로 그분이 주신 것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주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 이게 만나질 수가 없는거죠.
하와처럼 똑같이 계속해서 내것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얘기했으면 하나님은 이렇게 얘기해야되죠.
“입술은 가증스럽고, 가슴에는 탐심이 들었고, 손은 자기 이익을 취하느라고 손이 지저분하고 발은 욕심으로 달려가서 시커멓다.” 라고 말해야 되요.
근데 주님은 그거 얘기 하나도 안해요. 그냥 “니 눈이 아름답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니 눈이 아름답다.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라도 내 앞에 나와서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이 아름답다..” 그렇게 얘기하세요.
그리고 그런 고백 가운데서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두번째 광야를 갈 수 밖에는 없어요.
근데 두번째 광야를 가는 이유가 뭐라고 했어요? 아까..
이 여자가 손을 내밀어서 “나를 데려가세요. 당신이 있는 곳이 어디에요? 당신을 알기 원해요.”
아가서 1장 7절에서 그렇게 고백했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으로 이제 두번째 광야가 주어져요.
두번째 광야가 주어진 후에.. 이 여자분이 고백하는 것이 3장에 나와 있어요.
잘 보세요. 여기서는 또 그분에 대해서 뭐가 아름답다고 얘기하나 보세요.
솔로몬이 아름답다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어요, 없어요?
솔로몬 자체.. 예수님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은 한마디가 없어요.
그분이 가진 병거가 아름답고, 그분이 가지고 있는.. 그분이 이렇게 면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분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기 하나도 “당신의 눈이 아름다워요, 당신의 입이 아름다워요, 당신 자체가 아름다워요.” 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까 1장에서 “나,나,나 나한테 뭐 채워주세요.” 하는 단계가.. 두번째 단계에선 이제 나나나 하는 건 지났어요.. 이제 나 얘기하는 건 없잖아요. 지났는데.. 이제는 어떤 차원에 들어갔냐면?
그분이 가지신 능력과 그분의 힘과 그분이 할 수 있는 권위와 그런 것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단계죠.
근데 사실 그 뒤에 뭐가 있어요?
그 권위와 그 능력과 그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나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직도 ‘나’에요. 사실은.. 아직도 나에요..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나 나 나’ 하지는 않는 단계에요.
‘아! 당신은 정말 능력이 많으세요. 당신은 정말 기가막힌 분이세요.’ 이렇게 얘기는 하고는 있는데..
그분이 입은 옷이 멋있고 그분이 가지고 있는 병거가 아름답고, 그분이 가진 군사가 힘이 세고.. 지금 그거 얘기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려고 그러는데.. “당신의 냉장고가 있고 당신이 차가 있고 당신이 100만불짜리 주주가 됐고, 당신이 집이 있고, 뭐가 있고, 뭐가 있고, 뭐가 있고, 뭐가 있어요.” 라고 말하는 거하고 똑같은 상황이에요.
그냥 어렵게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남자, 여자의 사랑으로만 생각해도 간단하게 대화가 되요.
우리가 너무 이런 이야기를 영적으로 막 복잡하게 생각하는데..
그냥 인간끼리의 사랑의 상황으로 보세요..
예를 들어서.. 누가 와 가지고 00씨, 너의 아버지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내가 널 사랑해. 너가 부자이니까 내가 널 사랑해. 니가 가진게 너무나 많아서 내가 널 사랑해. 그렇게 말한다면.. 그 여자랑 결혼하겠어요? 안하죠. 같이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게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할껀데? .. 이거 다 떨어지고 나서 그냥 맨발로 서 있으면 어떻게 할건데? 맨발로 서서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때 고무신 거꾸로 신을 여자가 바로 이런 여자죠..
그러니까 주님은 마음을 다해서 동행에 들어 갈 수가 없어요.
동행하다가 어느틈에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면 도망갈 사람들이에요.
십자가에 가면 도망갈 사람들이에요.
제자들도 다 그랬어요. 헛된 것을 바라봤기 때문에 그러죠.
그래서 주님은 동행하지 못해요.
그러나 주님은 아직도 동행하자는 소원을 가지고 있죠. “동행하자. 동행하자..”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 고백을 들은 후에 여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요.
아까는 어디까지 아름답다고 했어요? 눈만.. 눈만..
지금은 어디까지 아름답다고 하는지 보세요.
눈, 머리털, 이, 입술, 뺨, 목, 유방 고까지 해석 딱 끝나요.
그러면 뭐가 없어요? 다리하고 발이 없어요.
동행을 뭐로 해요?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요?
발이 있어야 동행을 하죠. 근데 발이 아직 없어서 못 간단 말이에요.
처음에는 눈.. 그 다음에는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이제 아직 발은 없어요..
그래서 이제 할 수 없이 그 다음 광야를 가는데.. 주님께서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야! 제발 좀 너 거기서 멈춰 있지 말고, 여기까지 올라와. 시야를 넓게 봐..”
그게 그 다음 초청의 이야기에요.
“봐봐봐!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그 시야에서 좀 큰 눈으로 보고 나면.. 니가 뭘 얻기 위하고,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고.. 이런 것들은 이제 관심이 없어지고, 좀 크게 볼 수 있을거야.” 라고 초청을 하죠.
“그렇게 탁탁 막힌 우물처럼 너만을 위해서 살지마. 그게 아니야.” 라고 하면서 그 외의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까 읽은 것이고요.
그러고서 이제 5장에 넘어가서 3번째 광야가 뭐냐면?
주님이 아무것도 들어줄 수 없는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장면이에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헌신을 했고, 하나님 때문에 많은 은혜도 받았고..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도 맛봤고, 하나님의 능력이면 모든 게 될 줄 알아서 막 뛰어왔는데.. 그걸 믿고 뛰어와서 그것을 믿고 기도하고 나가려고 하는데..갑자기 모든 기도가 딱 막혔어. 그리고 기도가 하나도 응답이 안 돼.. 하나님은 아무것도 나에게 해주지 못하는 분 같애.. 이전에는 필요할 때 모두 주시고 주시고 주시고 했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안 주시는.. 여기에 나와 있는 빗줄기에 젖어서 머리털이 축 처져있는 그런 초라한 하나님처럼 느껴지시는 분들이 있을거에요.
왜 안들어 주시는 거야? 왜 해결이 안되는 거야?
근데 그 가장 초라한 주님.. 아무것도 들어줄 수 없는 그 초라한 주님을 보면서 이 여자가 이제 5장 10절에 가서 고백하기 시작해요.
거기 머리가 정금(순금) 같다고 되어 있잖아요. 근데 5장 2절에 나오는 그분의 머리는 뭔지 알아요?
밤 이슬에 젖어서 엉망이 되어 있는 머리에요.
밤 이슬에 젖어서 엉망이 되어 있는 그분의 머리를 보면서 정금(순금) 같다 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게 지금 이 여자의 고백이에요.
그게 누구를 닮았어요? 그분을 닮았죠.
초라하게 시커먼 나를 보면서 아름답다 하시는 그 분을 닮았죠.
이제 사랑에 맞추어 가는 거에요.
무엇이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가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우니까.. 머리가 찌그러졌던, 눈이 어떻게 됐든, 얼굴이 어떻게 됐든.. 그거 상관없이 다 아름다운 거에요. 지금 그 머리는 아름다운 머리가 아니에요.
밤 이슬에 젖어서 머리가 엉망이 됐다고요.
근데 정금(순금) 같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생기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분 자체가 아름다우니까.. 이 부수적인 것이 아무 상관이 없는 거에요.
기도 안 들어주는 것도 상관이 없는 거에요.
뭐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냥 그 분 자체가 아름다운 거에요. 보세요.
그 손에 무슨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가 있어요?
빗줄기 앞에 서 가지고 문 두드리고 있는데..
거기 황옥을 한 노리개가 보여요? 안 보여요.
근데 이 여자 눈에 그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에요.
시몬을 베드로로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여자의 마음에도 온 거에요.
왜냐하면 그 분 자체를 그분의 소원과 그분의 마음과 그 모든 것을 보면서..
그분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의 단계에 들어간 거에요.
만약에 이 여자가 그 분의 손에서 황금 노리개가 지금 떨어져 있고, 보좌에 앉아서 막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면.. 그나마 온전한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도 다 없어요.
그 손에는 몰약이나 떨어지고, 비에 푹 젖은 손으로 두드리고 있는 그 구질구질한 모습에서 황금 노리개 같은 것을 손에서 보고, 머리는 정금(순금)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시야와 맞아 들어가잖아요.. 이해가세요? 보세요..
전체가 사랑스럽다. 전체가..
그러니까 아까 처음에 했던 고백과 두번째 했던 고백과 이 고백이 지금 천지차이죠. 이렇게 말하는 여자가 있으면 결혼해요, 안해요? 하죠, 당연히 하죠.
왜냐하면 진짜 사랑이니까..
정말 내가 가장 초라한 모습에서 이렇게 아름답게 봐주는 사람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하니까 7장 1절에서 이제 그렇게 하는 그 여자에게 응답을 하시는데 뭐라고 응답하시냐면? “너는 너무 아름다워.” 그러면서 주님이 뭐라고 말하냐면?
처음에 뭐가 아름답다고 말해요? 발이 아름답다고 말해요.
아까 발이 아름답다고 말 못했어요. 이제는 발이 아름답구나. 너가 나와 동행하겠구나.. 그래서 동행의 자리에 들어가죠.
하나님은 지금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근데 이렇게 들어간 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8장을 보세요..
이렇게 동행하는 자의 자리에 들어가는 여자가 어떤 모습인가가 나와 있어요.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관계가 될거다..
사람들이 ‘기름부음’ 막 좋아하잖아요. ‘능력’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그분이 나를 만지심’ 이런거 디게 좋아해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모든 조건을 초월한 사랑에 들어가고 나면.. 이제는 이 마음에 그분과의 그런 교제나 사랑의 교제나 이런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거.. 그냥 삶 속에서 동행하는 자리에 들어간다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업신여기거나, ‘쟤 왜 저렇게 새 술에 취했어?’ 이런 소리 안 한다는 거에요. 안 한다는 거에요.
새 술에 취했다는 말이 사도행전에서.. 그 말 모욕적인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각종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그 놀라운 일을..
그럼 사람들이 보면서 “와! 하나님의 일을 각종 방언으로 말하는구나.” 해야지..
왜 새술에 취했다고 얘기해요? 그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과의 그 은혜안에서 살고,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그 모든 것이 모든 사람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 신부의 모습이에요.
여자가 남자하고 연애할 때 손 잡으면 처음에는 깜짝 놀라겠죠..
근데 10년동안 산 후에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았는데.. 아내가 “어머나!” 이러면 남편이 너무 불안하겠죠. 그거 안되죠.
손 잡으면 그냥 편안하게 있어야죠. “어머” 막 이러고 그러면 이상하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런 상태로 10년, 20년, 30년 가고 있는 거에요.
자연스러운 관계에 못 들어가요.
왜냐하면 지금 주님을 주님으로 사랑의 관계 속에 온전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아직도 주님에게서 뭔가를 받아내고 어떤 다른 욕심의 차원에서 보고 있으니까.. 지금 자연스러운 주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거에요.
제가 성경에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성령이 임했더니 예수님이 새술에 취한 것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전 그런 얘기 본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성령과 동일한 분이에요. 하나에요.
그래서 성경이 아무리 임해도 가장 자연스러워요.
비둘기 같은 성령.. 들내지도 않고, 시끄럽게 떠들지도 않고, 길거리에서 들리지도 않아요.
그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가는 것은 온전한 친밀함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에서 와요.
지금 이 여자가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누가 봐도 업신여기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관계가 그렇게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에 가길 원한다.
그리고 8장 2절에서 집에서 교훈을 받는다..(?)
요한일서 2장에 보니까 기름부음에 대해서 온전한 기름부음은 이 안에 있는 기름부음이 우리를 가르친다. 더이상은 누가 가르칠 필요없이 성령이 직접 가르친다.
지금 이 신랑이 직접 가르치는 거에요. 직접..
신부의 자리에 들어가면요.. 포도나무와 가지가 되면요.. 그분의 품에 기대고 나면요.. 직접 가르쳐요..
그 사람이 누구에요? 사도요한이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그렇게 기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요한계시록 썼어요..
그런가하면 또 이렇게 나와 있어요.. 동행하는 자의 자리에 들어가는 여자의 모습..
그분이 보기에 아주 평강(화평)을 가진 자 같단 말이에요. 근데 그 평강이 어디서 오느냐? 그 평강을 가진 모양이 그 다음에 나와 있어요.
옛날에는.. 이 신부의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는.. 누가 하나님 앞에 2천만원을 바치면 나도 2천만원을 바치지 못해서 안달이나고.. 그거 바치는 게 부러워..
이 신부의 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 2백만원이라고 하는 상급을 하나님에게 받으면.. 그거 질투나고, 나도 그거 받아야 되겠어. 그것 때문에 속상해..
그 사람 어떻게 해서 받았나? 기도해서? 그럼 나도 기도해서 받아야지..
그런데 이 신부의 자리에 들어가고 나면..
그 사람 받으라고 하고.. 하나님! 그 사람 통해서 영광 받으세요.. 나는 내 포도원이 여기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게 나의 기업, 내 하나님, 내 주님, 내 신랑되신 주님이 여기 있으니까.. 그거 상관없어요.
완전한 평강에 들어가는 거에요.
이제 더 이상 주위에 보이는 환경으로 누가 뭘 더 받고, 누가 뭘 더 가졌고, 그런 것으로 인해서 연연하지 않는 거에요.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막 기도하는거.. 그거 다음에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고 그 다음에 바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나와 있어요.
무슨말이냐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지 않는 것이다. 연결되는 말이에요.
아직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구하고 있으면..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단계가 아닌 거에요.
거창하게 갈 것 없이 바로 앞 뒤로 써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일 염려하지마.. 내일 일 염려하지마.
염려하는 거 자체.. 염려하면 그건 이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게 아니야.. 근데 그 자리에 가려면 ‘평강’을 가져야 하는데 그 ‘평강’ 이 어디서 오냐면?
이렇게 온전한 사랑으로 신부가 되면.. 그 놀라운 평강이 임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누가 뭘 가지고, 누가 뭘 어떻게 하고, 누가 교회를 70억을 드려서 교회를 지어도 아무 질투가 안 나는 거에요. 상관이 없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내가 ‘에휴! 나는 언제 교회를 지어.’ 이런 생각 안 드는 거에요.
왜? 내 안에 그분 자체가 있으니까..
이게 ‘평강’ 이에요..
우리가 그냥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 그게 평강이 아니라요. 이게 평강이에요..
사람들은 영적인 욕심은 좋다고 말하죠.
영적인 욕심의 근원은 내 욕심에서 나오는거거든요. 그것도 욕심이에요. 그거 아니라..
주님 자체가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눈에 보이는 이런 것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주님으로 가득해 있으면.. 부족함이 없도다..
그래서 더이상 다른 것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금 떨어졌대..그럼 나도 그 금 떨어진거 받고 싶고..
어떤 사람이 뭐 했대.. 그럼 나도 받고 싶고..
그렇지 않아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분으로 만족해요. 그게 평강이에요.
그런데 이 평강을 가진 여자가 겉으로 볼 때는 참 별 볼일 없어 보인다고요.
그 신부가 능력도 없어 보이고, 뭐 가진 것도 없어 보이고, 큰 교회를 가진 것도 아니고, 큰 일을 뭐 이룬 것도 아니고, 상급을 받은 거 같이 보이지 않고..
그냥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이 보이는데.. 그 여자의 속이 어떤가 하면?
그 여자가 겉으로는 그렇게 연약한 여자 같이 보이지만.. 속이 어떤가 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연약해 보이는 사람 같지만 그 사람의 가슴 속에는 여호와의 불이 있다.. 그 불이 뭐냐? 사랑이다라는 거에요. 이 불 말고, 딴 불 추구하면.. 우리가 타 버려요. 그러나 이 불은 이 안에서 인을 새기는 불이에요.
이 여자가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지만.. 이 안에 그 사랑의 불이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불은 끄지 못한다는 거에요. 죽음도 이긴다는 거에요.
온전한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 그 불이.. 여기 있다는 거에요.
그게 있으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거에요. 그게 있으면 순교할 수 있는 거에요.
그게 있으면 내 모든 필요.. 이런 것들을 다 포기할 수 있는 은혜가 생긴다는 거에요.
아가 1장 8절에 보면 여자가 질문을 하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요..
“너 잘 모르겠지? 그러면 장막으로 나가서 광야에서 헤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봐봐. 다른 사람들.. 광야에 나가서 헤매면서 텐트치고 그렇게 살면서 힘들어 하지만 거기서 있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야기를 좀 들어봐.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이 있잖아. 들어봐.”
그 중에서 여러분이 제일 능력있다고 생각하는 엘리야를 한 번 볼까요.
열왕기상 17장에 보면요.. 엘리야가 첫번째 광야에 들어가요.
아까 말했죠.. 3번의 광야가 있다. 첫번째 광야에 들어가요.
이게 지금 엘리야가 만난 첫번째 광야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전에는 엘리야의 존재도 없어요.
여기 지금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어요. 입맞춤이 임했다고요.
입맞춤이 임했는데.. 그 입맞춤이 뭐냐면?
“비 안 와” 하는 소리에요.
그 소리를 듣고 이제 광야에 들어가서 동물 중에서 가장 더러운 동물.. 새 중에 가장 더러운 새..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게 되요.
그것을 먹으면서 그 광야에 머물러요.
그 광야에 머무르면서 이제 거기서부터 이제 있으면서 계속해서 여기보면..
사르밧 과부에게 가요. 사르밧 과부에 가면 기름이 오고, 떡이 와요..
병에 기름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통에 가루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아까 아가서 1장에 나온 것처럼 필요를 다 채워주고.. 자기가 또 과부도 살려가면서 그런 자리에 있어요. 그런데 그걸로 안되요.
그래서 두번째 광야를 맞이해요. 두번째 광야가 뭐냐면?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딱 대적하는 순간이에요.
거기서 엘리야가 체험한 게 뭐에요?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고요.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어요.
아까 두번째 광야가 뭐였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봤죠. 솔로몬의 가마가 그렇게 크고, 군대 병사들이 이렇게 많고..
그 능력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했다고요..
근데 열왕기상 18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봤어요. 불 떨어지는 역사를 봤단 말이에요.
850명을 다 죽이는 것을 봤단 말이에요.
와! 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불 떨어지는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너를 죽인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 상황에서는 구해주지 않는거에요.
그 상황에서도 불을 딱 떨어져 가지고 이세벨을 딱 처단을 해야 하는 그 하나님이..
이세벨이 죽인다고 말하는 그 상황에서 엘리야에게.. 엘리야가 마음에 있는 이 겁이 있는 것을.. 두려움을 그냥 내버려두는 거에요.
그때 엘리야의 생각이 어땠을 것 같으세요?
나를 죽여 주세요. 날 차라리 죽이세요. 그랬을 것 같으세요?
자기가 믿었던 그 하나님이 아닌 거에요.
‘850명의 거짓 선지자를 죽이신 그 분이.. 불을 내려서 여기 모든 도랑을 핥아버리게 하신 그 분이.. 왜 그 여자 하나를 못 이겨서 나로 하여금 이 두려움에 빠져서 로뎀나무 밑에 숨게 하는가?’ 차라리 날 죽이세요.
이게 세번째 광야에요.
원래대로 하면 이 사람이 믿었던 하나님 이라면.. 여기 가지 말아야 되요.
그래요 안그래요? 여기 안가야 되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 체험했는데.. 왜 기도했는데.. 지금 응답이 안 되요? 왜 안 되요. 되야 되잖아요.
사람들이 기도하면 다 이루어져.. 그랬는데.. 왜 안 되요? 왜 안 되요?
뭐가 문제에요? 왜 안 되요? 기도하면 다 된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안 되잖아요.
왜요? 우리가 기도를 믿고 있지..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안 되죠.
기도를 믿고 있죠. 기도의 힘을 믿고 있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죠.
되든 안 되든 상관이 없죠.. 하나님을 믿으면.. 그런데 기도의 힘을 믿고 있죠.
여기도 그 불 떨어져 있던 그것만을 믿고 있을 때는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엘리야에게 보이기 원하죠.
그래서 엘리야가 거기 로뎀나무 밑에 엎어져 있어요.
그랬더니 이제 불로 임하지 않는 거에요. 폭풍으로도 임하지 않는 거에요. 지진으로도 x 능력의 하나님으로 전혀 임하지 않는 거에요.
그러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와서 “너 여기서 뭐하니? 너 여기서 뭐하니? ” 라고 물어보시는 하나님..
그런데 보니까 그 하나님 앞에 엘리야가 이렇게 해요.
여기 보면요..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얼굴을 가렸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요.. 나중에 다른 본문에서 보니까.. 겉옷을 가지고 얼굴을 가리운 것이 베일을 쓴 얼굴, 이게 뭐 같은 거에요?
신부 같은 거에요.
억지로 껴 맞추는 게 아니에요.
이게 신부 같은 모습이고요.. 이게 경배자의 모습이에요.
이거를 대고 땅에 엎드려 있는 그 모습..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은 이제 비밀을 이야기하기 시작해요.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이런 계획이 있어”
그전에는 몰랐던 비밀을 듣기 시작해요.
이제는 엘리야가 불 떨어지게 하는 엘리야가 아니라 주님의 품에 광야에서 기대어서 나온 자가 된 거에요.
그 광야가 이 마지막 광야죠. 엘리야도 이 광야를 거쳤어요.
아브라함도 이 광야를 거쳤어요. 베드로도 그 광야를 거쳤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에 나오는.. 우리가 존경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그 광야를 거쳤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신부가 됬어요.
아가서 8장에 보면 또 이 이야기가 나와요.
이제 그렇게 화평해지고 평강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으로 이제 말씀을 직접 하나님에게 받기 시작하는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해요.
그 동산에 거한 자..
이제 하나님의 말씀하신 에덴동산에 그 첫번째 소원에 그 자리에 이제 가 있는 거에요.
이제 하나님 자체..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고, 내가 하나님의 신부 된 자리..
이제는 부스러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딱 가 있는 그 사람에게 부르신 거에요.
“너 동산에 거한 자.. 너 이제 그 잃어버렸던 아담의 자리로 돌아온거야. 그 자리로 돌아온거야. 그리고 너의 소리를.. 너의 동무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어.”
근데 그 동무들이 누구냐면요?
이 모든 무리들이.. 이 많은 허다한 무리 가운데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또 그 전에 죽은 그 모든 순교자들이.. 여기 다 들어가 있어요.
그 허다한 무리들이 찬양을 하고 기뻐하는데.. 그 기뻐하는 이유가 뭐라고요?
신부가 예비 되었기 때문에..
왜냐?
신부가 예비되지 않으면 이제 하나님의 소원에 마감이 되지 않는 거에요.
그 신부가 예비되지 않으면 자기들의 받았던 약속이 완성되는 걸 보지 못하는 거에요.
그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어요. 11장 보세요.
히브리서 11장에 아브라함 얘기, 이삭 얘기, 야곱 얘기 쫙 나와 있어요.
입다, 솔로몬, 삼손 얘기, 여자들 얘기, 순교한 사람들 얘기..
이분들은 우리가 너무나 존경하잖아요. 이분들이 기가 막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잖아요. 근데 그 다음에 뭐라고 나와 있냐면?
그 약속이 뭔지 알아요? 창세기 1장부터 있던 그 약속이에요. 근데 그 약속을 왜 아직 받지 못했는지 알아요? 그 다음에..
그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게 뭐냐면? 아까 요한계시록 19장에서 그들이 왜 기뻐하냐면?
신부가 예비될 때 기뻐해요.
왜냐하면 신부가 예비되는 자리에 올 때.. 그 약속을 받는 거기 때문에 그래요.
그 약속을 지금 받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누구 때문에?
우리들이 신부로 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죠.
근데 나 하나가 아니라.. 교회가 신부로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게 아니면 그 아무리 잘난 아브라함도, 아무리 잘난 엘리야도, 에녹도.. 그 약속 받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는 상태에요. 하나님은 공평하세요. 하나님의 소원은 먼저 이루었지만 그것을 완성할 때 동시에 이루세요.
그들이 다 기다리면서 지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에요.
어디서 어떤 신부가 어떻게 지금 들어오고 있나?
누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에 들어가서 신부의 자리에 들어오고 있나?
그들이 부르는 소리를 내가 듣기 원한다.
그래서 이제 그 자리에 들어가면 우리의 기도에 권위가 생기는 거에요.
이제 중보할 수 있는거에요.
왜?
이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멀리서 나의 도움을 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왜냐?
내가 그분의 품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죠.
광야에서 그분의 품에 기대어 나왔기 때문이죠.
포도나무와 가지 같은 형상..
가장 연약하지만 이 안에는 뜨거운 불이 불타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신부의 이야기라고 하는 건.. 홍알홍알 그냥 친밀함 가지는 이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본질이에요. 본질..
이게 아니면.. 이것이 준비 안 되면 약속을 못 받아요. 그 일이 안 이루어져요.
우리가 신부라고 그냥 좋아할 게 아니라 신부라고 하는 건..
이 정도의 차원의 온전한 사랑과 이 정도의 책임과 이 정도의 권위가 있어지는 이야기에요.
이렇게 되고 나면요..
자유케 하는 구원의 메세지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진짜 해방시키면.. 양 우리에 누워 안식을 가지게 되죠.
근데 그 앞에 11절을 보면 이렇게 나오죠.
신부들이에요.
이제 그 자리에 들어가서.. 종노릇하는데서 나와서 해방이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주님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서 동행하는 자리에 들어가는데..
그 동행의 모습이.. 포도나무에 가지가 매달린 것처럼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그분께서 아까 아가서 8장 2절에 뭐라 그래요?
집에서 교훈을 가르친다..
말씀을 받기 시작하고요.. 그러면 뭐가 되요?
증인이 되요. 증인..
그래서 신부는 증인이에요.
그런데 신부가 증인으로 헤롱 헤롱 하고 있느냐? 아니요.. 그다음에 12절 보니까..
이게 신부의 이야기에요.
이 자리까지 데려가시려고 주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거에요.
하나님의 가족.. 그러나 마지막에 신부의 자리..
그러나 위험한 것은 그게 사랑의 언약이기 때문에 위험한 거죠.
사랑의 언약은 깨질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주님이 말하죠. “죽도록 너의 정절을 지켜라.”
죽도록 충성하라가 아니라.. 죽도록 너의 정절을 지켜라..
remain faithful.. faithful이 뭐냐면? 약혼하기로 해 놓고 신발 거꾸로 안 신는 게 faithful 이에요.
만약에 약혼해 놓고 남자가.. 남자가..
“내가 가서 집을 준비할 테니까 나 올 때까지 기다려. 내가 얼마가 걸릴지 몰라” 그리고 집을 지으러 가졌다고 해봐요..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잖아요.. 그죠..
갔다고 하면.. 떠나는 남자의 믿음이 큰 거에요? 기다리는 여자의 믿음이 큰 거에요? 남자가 떠나갈 때 그 여자가 기다릴꺼라고 믿으니까 떠나가지 않아요? 기다릴 거라고 믿지 않으면 떠나 가요, 안 떠나가요?
안 떠나가요..
근데 주님께서 지금 ‘나를 사랑하는 여자들이 내가 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꺼야’ 라고 믿으니까 가시는 거에요.
근데 그분이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지 난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들을 믿기 때문에 가시고 그래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간에 그 일을 이루실거고..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돌아오시는거죠.
사실은 우리가 주님이 그렇게 돌아오실 걸.. 기다리는 걸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분이 우리를 믿어줌이에요.
그래서 이게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원어에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믿음안에서 산다.” 라고 나와 있어요.
faithful that Jesus has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가지신 그 믿음 안에서 산다는 거에요.
그분이 믿으신 믿음이 뭔지 알아요? 그분이 돌아가시면서까지 믿었던 게 뭔지 알아요?
아버지의 신실하심이에요.
그분이 아버지를 믿는 그 믿음..
아버지가 아버지 소원을 반드시 이룰거라고 믿는 그 분의 믿음 안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지.. 내 알량한 믿음 안에서 내가 알량하게 그 분을 믿을 수 있어서 믿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분의 믿음 안에서..
그러니까 처음에 믿어준 것도 그분이고.. 지금도 믿는 것도 그분이고..
믿음으로 이기실 분도 그분이에요.
우리는 그 믿음 안에 붙어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쉽다, 어렵다? 쉽다.
근데 우리가 지금 어렵다.. 왜? 어려운 길을 택했으니까..
근데 이 길을 가려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데..
“동행하자, 동행하자, 동행하자. 거기까지 가자.” 라고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그렇게 신부가 됐을때..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권위가 임하는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는게 아니라..
그분과 사랑을 하다보면 그 자리에 가는거죠.
근데 그 사랑이 값 싼 사랑..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온전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랑이라는 거죠.
근데 그 사랑을 하려면.. 값을 치루는 거에요.
사랑은 값을 치르게 되어 있어요. 그냥 값도 치루지 않으면서 하나님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지 마세요.
값을 치루게 되어 있어요. 그 값을 치루는 것이 뭐냐?
내 생각을 뜯어 고치는 거에요. 내 생각을 버리는 거에요. 내가 가지고 있는 선악과적인 생각을 버리는 거에요.
내가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이용해 먹었던 것을 버리는 거에요.
그러려면 하기 힘든 일을 한 번 해야 되요.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도제목을 버리는 거에요.
그걸 버리고 주님을 택하는 거에요.
만약에 그 기도제목이 하나님만을 원하는 거라면.. 붙들고 계세요.
근데 그거 아니고.. 다른 것이 제일 처음에 가지고 있는 기도제목이라면.. 그거 버릴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되요.
그거 버리고 하나님을 택해야 되요. 하나 택하고, 하나 택하고, 하나 택하다 보면.. 주님만을 택하게 되요.
근데 우리는 계속해서 내 부스러기를 택하고 있는 거에요.
내 부스러기.. 조금 더 부스러기 얻어먹을 것만 택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여전히 부스러기에요.
하나님이 아니에요. 이런 얘기하면 사람들이 싫어하죠.
“기도하면 들어줘요. 기도하면 축복이 와요. 기도하면 재정의 기름부음이 와요” 라고 말해야 좋아하시죠.
그러나 그건 복음이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거 아니에요. 사랑은 값을 치루는 거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값을 치뤘고요.. 우리도 값을 치루는 거에요.
근데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세요.
“우리에게 집 팔아라.” 얘기 하지 않으세요.
우리에게 ‘뭘 어떻게 해라’ 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생각을 바꾸라는 거에요.
이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던 생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것들을 사랑했던 것을 제발 좀 포기하라고 하는 거에요.
이제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서.. 아직도 이것을 주는 것이 하나님 이라고 생각했던 그거를 버리라고 하는 거에요. 차라리 그걸 버리라고 하는 거에요.
힘든 일인 줄 알아요.. 그러나 한 번 포기하고, 한 번 포기하고 나가는 가운데에.. 내 안에 하나님의 분량은 더 커지고요.. 내 분량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낄 거에요.
그러면서 점점 나는 선악과가 아니라 생명나무로 가고 있는 걸 느낄 거에요. 그런데 이걸 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어요.
우리의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이 불처럼 뜨거울 때 밖에는 없어요.
오늘 2가지를 간구 할 꺼에요. 2가지 간구..
우리의 심장이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불 태워지기를 구하고.. 그렇게 되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 결단을 하게 되기를 원해요. 동의하지 않으면 안 해도 좋아요.
그러나 진정 하나님을 원한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그 기도제목보다 하나님을 더 원한다고 한다면.. 그 기도제목을 한 번 버리는 거에요.
“하나님! 그거 아니라도 되요.”
아산에 계신 어떤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분이 능력을 막 추구하다가.. 저를 만나가지고 하나님과 사랑을 하고 싶어서 막 안달을 하시다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았어요.
그리고 가슴에 뜨거운 불이 있었어요. 불이 생기고 나니까 너무 가난한 교회인데.. 하나님이 갑자기 10억짜리 건물을 줬어요.
그래서 이분이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나님 사랑하니까 10억짜리 건물을 주셨어요. 하나님! 너무 신나요. 너무 감사해요.” 막 이러고 있었어요.
그랬더니 주님께서 뱃속에서부터 소리가 나는데 “정말 좋으냐?”
“어! 그럼요. 하나님! 너무 좋아요.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얼마나 좋아요. 내가 하나님 사랑한다고 했더니 이렇게 주셨잖아요.”
하나님이 “정말 좋아?” “정말 좋아요.. 너무 감사해요.”
3번째.. “정말 좋아?”
그러니까 이분이 ‘쫌 이상하다.’ 이렇게 된거에요.
그분이 그 다음에 묻는 말이 뭐냐면? “나보다 더 좋으냐?”
“10억 건물이 온 게 나보다 더 좋으냐?” 라고 물어보셨대요.
그래서 그분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앞에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 건물 가져 가셔도 좋아요. 난 하나님이 필요해요.” 그렇게 기도하셨대요.
그러고서 그 분이 마음은 사랑으로 불타오르고요.. 그분을 만났는데.. 말 한마디도 안하는 남자가.. 앉으면 그 수다가 그치질 않아요.
내 왕에 대해서 좋은 것을 말하니 내 입술이 필경에 붓과 같도다
그 입에서요.. 하나님 자랑이 끝나질 않아요. 그게 사랑의 불이에요.
뭐 내가 기도해서 좀 얻은 거.. 이거 다 .. 죄송하지만 쓰레기 같은 거에요.
그거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서 막 나와야죠.
그게 신부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 그게 경배에요.
그분에 대한 이야기 밖에 할 게 없는 거.. 그게 경배에요..
그래서 신부는 증인이고, 경배자에요.
제가 거꾸로 이야기하면.. 신부가 아니면 증인도, 경배자도 될 수 없어요.
온전한 사랑을 안하기 때문에..
여러분 기도하는데.. 제가 여러분의 심장에 하나님의 그런 불을.. 사랑의 불을 주시기를 제가 기도할께요.
저도 부족해요. 그래서 항상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간구해요. 더 사랑의 불을 달라고요..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에 너무 사랑하셔서 지금 가슴을 치고 들어와서 너 그거 나를 위해서 포기할 수 있어? 라고 묻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아실꺼에요.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벌써 그것 때문에 떨고 있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 마음을 알아요.
왜 그렇게 치고 들어오냐면?
이렇게 말씀하세요..”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온전한 신부 삼기 위해서.. 내가 그래서 그렇게 하는거야.”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이 필요한지 주님께서 너무나 아세요.
그러나 주님은 그것보다 주님 자체를 주기 원하시는 거에요.
만약에 내가 내 안에 소원이라곤 단 하나 밖에 없다면 그 소원 붙드세요.
내 소원이 주님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외에 아무 소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거 붙드세요. 담대하게 그거만 이야기하세요.
그러나 그거 아니고.. 우리가 스스로 잘 알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드리는 첫번째 기도가 무엇이며, 내가 무슨 기도에 가장 많은 힘을 쏟고 있는지 내가 알아요.
그런데요 그건 기도 아닌거 아세요.
기도는요.. 하나님과의 대화고.. 나의 필요를 아뢰는 게 기도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을 높이는 게 기도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하나님에게 말해드리는 게 기도에요..
그게 경배하는 기도에요..
주님은 그 자리에 우리를 데려가기 원하세요..
왜 그렇게 하시느냐?
우리를 너무나 원하기 때문에.. 그게 처음부터 하나님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만을 구하는 거 외에 무엇인가 더 절박한 기도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한 번 용기를 내보는 거에요.
하나님! 난 하나님이 더 귀하기 때문에 그 기도제목도 내려 놓을께요.. 그 기도제목 차라리 포기할래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스스로 종의 위치에 가기 위하여 이름도, 모습도, 보좌도, 포기했던 것처럼 나도 작으나마 사랑의 값을 치르기 원해요.
“하나님! 어려워요. 그렇게 하기 힘들어요.” 주님이 아세요.
그리고 그 기도했던 자리를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으로 채우는 거에요.
내 열심으로는 그게 이루어질 수 없어요.
주님이 우리 가운데 뜨거운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그 사랑에 불일듯해서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분들이 있을 꺼에요..
주님은 그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로 잡으소서. 내 떨리는 심장. 온전히 주의 것 되도록 사랑의 인을 치소서. 주의 숨결로 새롭게 하소서. 거룩한 주의 임재 안에 거하게 하소서.♬
주님 오셔서 사랑으로 사로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많은 물도 끄지 못하고, 죽음도 삼키지 못하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에 불 태워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아닌 것은 원하지 않는 자리에 가지 않도록.. 하나님이여! 주님께서 그리도 원하는 신부의 자리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부스러기들을 만족하는 고아와 과부같은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원하느라고 고아와 과부처럼 기도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신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움… 하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그것을 아뢰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원하고, 하나님 때문에 만족하는 자리에 한 사람 한 사람 다 데려가시옵소서.
그래야 이 위기의 때에 우리가 마지막에 믿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것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소서.
지금 내가 있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가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리에까지 갔음을 내가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제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손을 내밉니다. 연약합니다. 또 넘어질지 모릅니다. 주님! 그러나 한 걸음씩, 하나씩.. 하나님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드디어 나는 하나님이 하나님됨을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갈 것입니다.
창세기 1장 이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소원과 그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자리에 갈 것입니다. 내 병을 고쳤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무엇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자리에 갈 것 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을 선택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런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값을 치루는 자리에 가게 하시옵소서.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느끼지 못해도 주님을 선택합니다.
웃음가득해도 갈등가득해도 눈물가득해도 주님을 선택합니다.
다 빼앗긴데도 너무 외로워져도 나 혼자 남은 것 같아도 주님을 선택합니다.
너무 가난해도 내 비전을 버려도 가난한 자 같은 자리에서 주님을 선택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선택합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선택합니다.
너의 그 기도제목보다 내가 더 소중하냐?
너가 그것을 받겠다고 하는 그 귀하다고 생각하는 그것보다 내가 더 소중하냐?
나만 있으면 되냐? 나만 있으면 되냐? 나는 너만 있으면 되는데..
진정으로 너가 나에게 내가 너의 보배라고 한 말이 진정이더냐?
그러면 이 보배만 있으면 되냐?
내가 이 마지막 때에 이 위기의 때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데 그들이 바로 참 경배자이며, 그들이 나의 신실한 증인인 것을..
내가 너를 얻기 위하여 너의 삶의 광야를 허락한 것을 아느냐?
내가 너의 고생하는 것이 보기에 좋았던 것 같으냐?
너가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시원했을 것 같으냐?
내가 더 아파하지 않았을 거 같으냐?
너에게 그것이 주어지지 않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내가 더 아파하고 있는 것을 모르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광야를 허락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너의 사랑이 진실하여 지기 때문인 것을..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너의 기도의 응답으로 다가오는 것 가운데에.. 이제 내가 너를 선택했듯 너도 나를 선택하지 않으려느냐?
나만 있으면 되느냐? 나면 되느냐? 그거 아느냐?
마지막 때에 결국 니 옆에 서 있을 것은 너의 회사도 아니고, 너의 남편도 아니고 결국은 나 인것을 아느냐?
결국은 내가 니 옆에 서 있을 자 인 걸 아느냐?
너의 사역도 아니고, 너의 생전도 아니고, 결국은 나 인것을 아느냐?
니가 가지고 있는 지혜도, 지식도 아니고.. 니가 가지고 있는 그 비전도 아니고..
너가 가지고 있는 기름부음도 아니고.. 나 인것을 아느냐?
이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이제 나를 택할 수 있느냐?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 두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들 앞에서 주님이 칼을 내미시면서 말씀하시죠. “누가 여호와 편에 설거냐?”
하나님께서 이 위기의 때에 지금 그리 하신다고 생각해요. 주님의 놀라운 두 날 선 검은 앞으로 내미시면서 “누가 내 편에 설거냐? 누가 나를 선택할거냐?”
때가 되면 주님께서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는 것이 실제가 될 때가 와요.
마지막 환란의 때가 오면 다 먹을 게 없을 거에요. 다 입을게 없을 거에요.
그때가서도 아직까지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버림을 받는 자가 될 꺼에요.
그때가서 주님이면 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지금 주님이면 족하다고 말하는 자들이에요.
그들은 마음속에 그 뜨거운 사랑 때문에 지금도 절대로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택하는 자들이에요.
주님은 그러한 신부들을 기다리세요.
그렇게 세마포를 입고 그 분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갈 그 자들을 기다리세요.
그들은 에덴동산에 같이 들어갈 자들이에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질 거에요.
주님이 이 교회에 오늘 찾아 오셨어요. 주님이 가실 곳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이런 얘기를 하면서 찾아갈 곳이 많지 않아요.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행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이 여기와서 마음껏 이야기 하시는 거에요.
내가 너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지 않아도 나를 선택할거냐?
내가 너의 병을 고치지 않아도 나를 선택할거냐?
너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도 나를 선택할거냐?
주님이 여러분들을 믿으세요.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셨어요. 주님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믿으세요. 내 사랑하는 자로 끝까지 남을 여러분들을 믿으세요. 그래서 그분께서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묻고 계세요..
내가 너를 이렇게 믿는데.. 니가 나를 사랑하냐? 나를 선택할거냐?
그분이 우리를 믿지 않으시면 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지도 않으세요. 그분이 여러분을 믿으세요. 여러분이 끝까지 사랑의 자리에 설 것을 믿으세요.
♬사로 잡으소서. 내 떨리는 심장. 온전히 주의 것 되도록 사랑의 인을 치소서. 주의 숨결로 새롭게 하소서. 거룩한 주의 임재 안에 거하게 하소서♬
그렇게 주님 때문에 값을 치루는 거.. 그 주님 때문에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는 거.. 그것이 바로 순교자의 모습이에요.
그렇게 조금씩 순교의 삶을 살다가 보면.. 우리 그 영광스런 순교자의 자리에 다 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작은 것부터 시작해요.. 주님이 너무 귀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에게.. ♬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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