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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 요약(2) -경배의 비밀2Fam Worship 2024. 4. 17. 14:38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영원히 경배하는 자들로 그렇게 24시간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노래하고 있었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누군지를 처절히 알고, 내 자신이 누구인지 처절히 알고..
그것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와 있는 네 생물들의 모습이었어요.
온 몸에 눈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보고, 안으로 있는 눈은 나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나의 낮은 가운데에서 그분에게 엎드려질 수 밖에 없는 존재..
하나님의 정체성과 나의 정체성이 확실한 단계..
그런 다음에 요한계시록 5장에 가서 그 찬란한 하나님이 그분께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그분께서 땅에 있는 인간들의 그 죄 때문에 아파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길 원하시고, 하나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하루가 천년같이 그렇게 기다리시는 말도 안되는 주님의 사랑..
네 생물들과 24장로가 그것을 목격하고 있어요. 많은 증인들이 목격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직접 자신의 몸을 던져 돌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사랑을 보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고백은 단 하나 밖에 없어요.
“당신은 너무나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들은 경배의 내용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에요.
다른 말로는 표현을 할 수 없는 거에요.
아름답다도 부족하고, 광대하다도 부족하고, 전능하다도 부족해요.
그냥 한마디로 “당신은 너무나 세상의 어떠한 존재와도 다릅니다. 다르십니다.”
그렇게 고백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24시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거..
그것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인데..
그 뜻이 이 땅에서도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어요.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그렇게 기도하신거고..
그 소원을 가지고 주님이 땅에 계셨을 때..
“내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의 시작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만드셨다.
그러나 경배라고 하는 것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제사로 타락하고 말았다.
제사라고 하는 건.. 내가 나의 죄 때문에 나의 필요에 의해서 어떤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가져와서 그것을 드림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길 원해서 나오는 것을 말하고..
그 제사를 하다가 보니까 그 제사에서 서로 비교하는 것이 나오고, 살인이 나오고 그러면서 점점 악해지는 인간 사회..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창조되었어요.
사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워십리더로 만들어졌거든요.
그래서 그 자리에 돌이키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단번에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시죠.
그래서 그 제사를 단번에 끝내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의 자리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아직도 제사에 익숙해 있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제사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경배의 자리에 돌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결국 경배자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승리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영원히 경배 받으시는 분으로 그렇게 영원토록 계신다.
아가서의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자 하나를 택하셔서.. 그 여자가 3번의 광야를 거쳐서.. 드디어 하나님 위주의 사랑을 하는 경배자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에 나오는 인물은 성령과 신부 밖에는 없어요. 거기에는 설교자도, 목사도, 전도자도, 교사도 없어요.
거기에는 신부 밖에 없어요.
요한 계시록 마지막에는 성령과 신부가 기도하고 부르짖어 노래하여 가로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성경이 끝나요.
그 신부가 최고의 경배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로 데려가시려고 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예 몰랐던 단계가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 왔는데..
하나님을 내 위주로 사랑하는 게 있고..
그 다음 단계가 하나님을 하나님 위주로 사랑하는 거에요.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던 자가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어져서 이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 믿음을 통해서 내가 구원 받으려 하다가..
그 다음에 열심을 내서 헌신을 하다가.. 이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건..
“주 너의 하나님을 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거야.” 해서..
그 자리에 들어와서 주님을 사랑하긴 하는데.. 이제 내 위주의 사랑을 하죠.
‘내가 사랑할 때 이게 사랑이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거야.’
그런가하면 또 그 속에 어떤 생각이 있냐면..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런 단계에서 이제 하나님은 그 사랑을 죄다 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은 아직 어린 사랑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자.
성숙한 사랑은 뭐냐하면..
“너를 위한 너 위주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나를 위한 나 위주의 사랑을 하는거다. 내게 초점 맞춘 사랑을 하는거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차원의 사랑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경배로 시작해서 경배로 결론 맺어져요.
근데 우리는 많은 차원에 나 위주의 사랑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나 위주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하죠.
하나님은 그것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아요.
아직 연약하다. 어리다라고 말해요.
아이들이 아버지 사랑한다고 어린 애기가 똥 기저귀 자기가 기저귀 뽑아가지고 아빠한테 가져와요 선물이라고..
그게 아버지에게 선물이 안 되요. 그러나 이 아이는 선물이라고 가져와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걸 받아요. 귀하니까 받아요.
그러나 아직 어려요.
아버지가 원하는 게 뭔지를 알려면.. 성숙한 자가 되야 아버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이제 아버지가 원하는 선물을 가져올 수 있어요.
사랑의 여정도 같애요.
처음에는 내 위주의 사랑을 해요.
내가 은혜받기 위해서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서..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면 하나님이 이걸 채워주니까..
그건 여전히 나 위주의 사랑이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받기에 합당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해서 그냥 사랑하는 거..
나에게 무엇이 올건지 안 올건지 그거와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거..
그게 진정한 사랑이에요.
나에게 무엇이 올건지 안 올건지 그거와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거..
그게 진정한 사랑이에요.
사랑을 받는 대상 위주로 사랑하는 게 진짜 사랑이거든요.
그게 뭐냐면 경배에요.
내가 무엇을 받기 위해서 예배하는 건.. 아직 제사에요.
하나님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그분 앞에 그분이 아름답다고 높일 수 밖에 없는 거..
그 외에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그것이 경배에요.
그것이 깨끗하고 순전한 바른 경배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까지 데려가시려고 하는거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마지막에 말하는 흠없고 온전한 신부에요.
그러니까 연약한 신부를 성숙한 신부로 데려가기 위해서..
그 중간에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거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크나큰 위험 부담을 가지고 아직도 내가 넘어져 있는 자리.. 아직도 내가 연약한 자리에 있는 거 하나님이 보고 참아 계시면서 거기서 빨리 건져주지 않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그렇게 있는 동안에 어느 순간엔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요. 이제 내 힘 포기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려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오면서.. 드디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자리에 오는 거 그래서 그분을 높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거..
“내가 이렇게 망가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러니 주님은 거룩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가는 거.. 그게 경배거든요.
사실은 잘나서 경배하는 게 아니라 못나서 경배하는 거에요.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한다는게요..
내 마음이.. 내 것을 가지고 와서 그분을 사랑한다는 건데..
이거를 이용해서 그분을 사랑하는게 아니라요..
언약이라는 의미는요.. exchange ..교환이에요.
히브리 문화에 교환 언약식을 할때는요.. 물건을 교환해요.
내 떨어진 겉옷을 내 언약 맺은 상대자에게 주고, 그 사람의 겉옷을 내가 가져요.
내 무기를 이 사람에게 주고, 그 사람의 무기를 내가 받아요. 언약식을 할 때요.
내 벨트를 그에게 주고 그의 벨트를 받아요.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
내 누더기 같은 옷을 그분에게 드리고, 그분의 겉옷을 받는 거고요..
내 이 약해빠진 벨트를 풀어서 그분에게 드리고, 그분이 주는 벨트를 받는거고요..
내 힘이라고 하는 이 무기를 내가 주님에게 드리고, 그분의 무기를 받는 거에요.
그런데 믿음이라고 하는 첫 계명에서 보면 사랑의 첫계명이 뭐냐면..
내 마음과 뜻과 힘을 가지고 와서 언약식을 맺는 거에요.
이거 주님에게 아무 가치도 없어요.
이거 가지고 주님 사랑할수도 없어요.
exchange(교환) 하는 거에요.
뭐냐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거 이거 안되요. 그래서 포기하는 거에요.
그 분 앞에 던지는 거에요.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게 해주는 은혜를 받는거에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거, 내 돈, 내가 가지고 있는 헌신으로 할 수 있는 거..
그거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나요?
아니요. 못해요.
그러니까 그거 할 수 있는 거.. 그거 가지고 와서 그거 그냥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은혜를 받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이 그래요. 이사야 55장 1절에 보면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 값없이 사라고 할 때.. 그 값없이 앞에 그 값의 값어치가 뭐냐면?
목마른 자는 내게로 나오라. 배고픈 자는 내게로 나오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화폐가 뭐냐면요?
우리의 목마름과 배고픔이에요.
나의 돈과 나의 능력과 나의 애씀과 헌신이 아니라..
나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하늘 나라에서 받으시는 화폐 통용이에요.
“목마른 자가 나와. 너의 목마름을 내가 받고, 나를 줄께.” 라고 하는 거에요.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거든요.
근데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가.. 내 마음을 다~ 하여서 사랑해봤자 하나님이 원하는 것 만큼 사랑이 안 되요.
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거.. 안 되는 거 포기하고 그분께 드려버리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서 하나님 위주의 사랑을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는 거에요.
근데 하나님이 원하는 건 뭐냐?
“나를 바라보고 내가 얼마나 괜찮은 하나님인지 알면 말해줘.”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에요.
우리의 자녀들이 방에서 내가 안보는 동안에 내가 그 방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 아이가 그 방에서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면서..
“아! 우리 부모님은 너무 맘 좋고.. 우리 부모님은 나를 너무 사랑하고.. 우리 부모님은 정말 착하고..”
혼자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근데 그 방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마음이 어떠실 것 같으세요?
기뻐서 녹아 내려요.
바로 그게 경배에요.
그 아이가 뭘 제대로 하나요? 잘 못해요.
내 말을 잘 듣던가요? 안 들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러셔.. 내 아버지가 이렇다.” 하고 아버지 자랑하고 있는거..
그거 지나가다가 들으면.. 모든걸 다 줘도 아깝지 않고요..
그게 그 아이의 진짜 사랑이에요.
내가 아직도 나쁜 습관이나 나쁜 생활 속에서 망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그 분을 높일 수 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그 쓰러져 있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당신은 위대하시죠. 당신은 거룩하시죠.” 라고 그 한 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그것이 천만인이 모여서 굉장한 경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그분에게는 더 가슴저미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고 있더라고요. 너무 몰라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차원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진짜 우리에게 원하는 건 뭐냐?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들어 놓고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주시고 “땅을 다스려라. 경배함으로 땅을 다스리라. 나를 높여.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다 니 말을 듣고 따라와서 모든것들을 행할꺼야.”
그런데 그러지 않고 내가 높아지려고 취하기 시작하다 보니까 경배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거든요.
그걸 지금 회복시키시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신학적으로 사람들은 말하죠.
이스라엘 민족을 택해서 이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니에요.. 그거는 그냥 부수적인 요인 중에 하나에요.
원래 근본적인 이스라엘을 택한 목적이 뭐냐?
지금 이 43장의 편지를 받고 있는 대상이 누구에요?
이스라엘 이에요. 일단은 처음 받는 대상은 이스라엘 이에요.
왜?
우리를 하나님에게 데려가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먼저 택해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이고, 우리를 접붙임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원래 이스라엘에게 지금 먼저 말씀하시고 계세요.
구약 이야기 속에 우리는 없어요. 여기 지금 야곱에게 말하는 거에요.
문장 쭉~ 나가다가
이스라엘 민족을 왜 불렀어요?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려고요.
왜요?
그것이 인간이 해야 될 단 하나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의 민족중에서.. 한 민족을 택해서..
“너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해.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원할거고..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해.”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택해서, 히브리 민족을 택해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쭉~ 얘기해 오셨는데..
그 백성을 왜 택했느냐?
“나를 위해서.. 나에게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그 백성을 택한 이유에요.
그래서 ‘Jude’ 유대인이라고 하잖아요.
Jude 유다라는 말이 ‘찬송’ 이에요.
우리가 ‘유대인, 유대인’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찬송할 자, 하나님을 찬송할 자’ 이렇게 그들을 부르는 거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유대인을 욕하면.. 하나님을 찬송할 자는 나쁜 놈. 이렇게 욕하는 거에요.
제가 이스라엘 편들려고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21절에서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했는데..
“너는 나를 경배하지 아니하였고, 너는 나를 오히려 싫어하였다. 내가 얼마나 선한 하나님인지 너는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씀하세요.
1~3절 지금 뭐라하는 거에요?
경배하라는거죠.
여기 지금 하나님을 전도하라고 써 있어요?
안 써있어요.
하나님이 지금 원초적으로 지금 하라고 하는 거.. 여기서 지금 해라. 경배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3절이 끝난 다음에 4절에 들어가 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법과 하나님이 주신 규칙이 뭐냐?
하나님을 경배하라 가 이 얘기에요.
1~3절이 하나님을 경배하라 인데..
4절에서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준 법이다.. 그렇게 써 있어요. 부인할 수 없어요.
내가 너를 거기서 해방시키고, 내가 나오게 했고, 내가 너를 살게 했고..
노예생활에서 해방했어. 왜 그랬는지 알아?
출애굽기 3장에서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이제 너가 바로에게 찾아가. 바로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해.” 라고 말할 떄.. 영어로 뭐라고 하냐면?
가서.. Let my people go. so that you can worship me in the wildness.
무슨 말이냐면?
“내 백성을 풀어놔라. 그래서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경배할 수 있도록” 이라고 말하라고 해요.
광야로 끌고 나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400년 동안에 그 노예생활에서 풀어 놓으신 거에요.
우리를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풀어놓으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우리를 해방하신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이 땅이라고 하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에요.
지옥 안 가게 하기 위해서를 더 넘어서.. 지옥 안 가는 건 당연하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떻게 하면서 뭘 하면서 살아야 되느냐?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이라고 하는 그 노예생활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이..
자기의 소원을 딱 말해요. 바로 앞에..
“내 백성을 내어보네. 더 이상 노예 생활하게 하지마. 광야에서 나가서 나를 경배할 수 있게.. “
우리를 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사서 구원하셨어요.
죄 가운데 있던 우리를 살렸어요.
왜요?
이 땅이라고 하는 70평생.. 이 땅에서 살면서 쉬워요, 어려워요?
광야에요.
우리가 아무리 행복하지만.. 여전히 광야에요.
왜?
우리가 있어야 할 땅이 아니고요.. 여기는 나그네 길이에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에요?
하나님 옆이에요. 영원히 살 곳은 거기에요.
거기 있다가 우리 여기 잠깐 왔어요.
여기 사는 거 그래서 광야에요. 나그네 길이에요.
너희들이 살아가는 이 광야의 삶에서 어떻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냈는지 알아?
우리가 그 노예생활에 우리가 묶여있다가 하나님이 우리를 출애굽시켰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어떻게 하려고?
광야에서 경배하게 하려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똑같이 그렇게 하셨어요.
그게 우리에게 주시는 본이에요. 이 그림자를 보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경배라고 하는 건..
그냥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배 순서에 쪼금 우둔하게 노래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본연에 있어야 할 존재의 모습이에요.
그걸 위해서 하나님이 구속하셨어요.
노예생활에서 내가 이제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내가지고..
우리가 구원 된 후에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우리가 필요하면 채워주시고..
이끌어주시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또 다른 광야에 딱 부닥쳐요.
기도하는데 안 들어지기 시작해요.
기도.. 그렇게 했는데.. 죽어라고 어떤 사람이 변화가 안 돼.. 죽을 꺼 같애..
므리바 물가에요.
거기서 이제 목이 마르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 목이 마르기 시작하는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어요.
출애굽기 17장에 보면요.. 그들이 이렇게 말해요.
물이 없어서 맛 봐서 아우성을 치면서요.. 그 영어로 보면 대게 재밌어요.
“Are you real?” 이렇게 얘기해요.
“당신 진짜 하나님 맞어?” 이렇게 얘기해요.
“하나님! 살아계신거 맞아? 하나님 우리와 함께 있는 거 맞아? 하나님 진짜 하나님 맞아?
하나님 당신이 진짜야 아니면 그냥 이야..” 이렇게 묻고 있는 거에요.
왜 그런 줄 알아요?
목이 마르다고 했는데 물이 안오니까요. 광야에 왔는데 물이 없거든요..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물을 줘야하는데 물을 안 준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이 철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당신 진짜 하나님 맞아? 내가 필요하면 채워줘야 하잖아. 근데 왜 안 채워주는거야. Are you real us God? 여호와 삼마라며요. 근데 어디가신 거에요?” 이렇게 물어보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그 물어보는 것의 끝에 그것이 점점점점 가니까.. 지금 이 이스라엘 백성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이 진짜 거룩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이 더 이상 아니에요. 그러다가 보니까 이제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오래 있다가 안 오고..
눈 앞에선 보이지는 않고, 자기들이 어디로 인도함 받는지도 모르겠고..
하나님이 생생하게 자기를 불꽃 같은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들이 한 짓이 뭔지 아세요?
금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금송아지를 보면서 “우리를 출애굽할 때 거기서부터 끌어낸 우리의 신이다.”
그 앞에서 여호와의 절일을 지키며 춤추며 뛰어놀아요.
그 앞에서 번제를 드리고, 그 앞에서 춤추고 뛰어놀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별걸 다 했어요.
왜 그렇게 되냐면요?
내가 필요하면 무조건 채워주는 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하는 거에요.
내 기도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하는 거에요.
그건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 심부름꾼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심부름꾼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안 들어주실 수도 있고요.. 구하지 않아도 주실 수 있어요.
물론 기도의 능력이 있어요.
그러나 기도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도를 채워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분은 아니거든요.
기도했는데도 안 들어주실 때도 있고요.. 기도 안했는데도 들어주실 때가 있어요.
제가 지금 기도에 대한 능력을 무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얘기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펄쩍펄쩍 뛰면서 이게 하나님이라고 하기 시작해요.
왜?
금송아지는요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어요.
내가 원하는 자리에 갔다 놓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사람들이 내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해요.
그러니까 경배가 안 되는 거에요. 그건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가 무엇인가 뭐 하고 있을 때..
지원하여 움직여주시는 것이지.. 내가 움직인다고 하나님이 움직이는 분이 절대 아니거든요.
그분은 절대자세요. 그분은 하나님이세요. 그분은 여호와세요. 스스로 계신 분이세요.
전능하신 분이에요.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어진 거에요.
내 마음대로, 내 기도로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상당히 부끄러운 이야기에요.
그래서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그렇게 하는 그 가운데에 주님께서 이제는 나타나셔서 결론을 내리실 수 밖에 없어요.
진노하셔요. 그러면서 말씀하시죠.
“누가 여호와편에 설 것인지 나와라.”
그랬더니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레위인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배자들로 영원히 섬기는 자들이 되었어요.
하나님은 그 광야 가운데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우상숭배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참 경배자들을 찾으셨어요.
지금도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은 참 경배자를 찾으세요.
칼을 내놓고 이야기 하세요. “여호와 편에 설 자는 나와라.”
똑같은 장면이에요.
지금도요 우리의 가르침과 세상에서 이야기하고 보통 크리스쳔들이 얘기하는 거 들으면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 에요. 그거 맞아요.
그러나 내 마음대로 내 힘의 내 능력으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해 주시는 거거든요.
그거하고 그거하고는요 천지차이에요. 아주 달라요. 완전히 달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경에서 말하죠.
“니가 구했으니까 내가 줬다. 니가 울었으니까 내가 줬다.”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준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신데다가 우리한테 우리에게 기 세워주기 원하니까 “니가 구해서 준거야.” 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그걸 우리 것으로 치부해요.
“내가 구했더니 줬어.”
그게 아니고요. 결론은요.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주신거거든요.
제발 내 마음 좀 들어라.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떤 살아있는 하나님인지 좀 봐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이방신에게 절하지 않으려면, 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길 밖에는 없어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지 않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무엇인가 우상을 계속해서 경배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속성에 그게 들어 있어요.
아담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했으면 하와가 내미는 선악과 안 먹었거든요.
아담이 경배한 게 누군지 아세요?
하와에요.
하나님이 선물로 줬잖아요. 아담의 기쁨이었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와를 경배하고 있는 거에요.
하와가 먹으라니까 먹어요.
요새도 여자들이 그렇게 많이 해요.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우상이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우상숭배하고 있는 삶 속에 지금 우리 모두 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처절하게 호소하시는 거에요.
“내가 지금 이 시대에 신령과 진정으로 나만을 경배하는 경배자를 찾는다.”
왜?
사람들이 다 이렇게 저렇게 무엇인가 우상에 휩쓸려있기 때문에 그래요.
10절에요 “입을 크게(넓게) 열라” 하는 말이..너 원하는 걸 위해서 입을 크게 열고 부르짖어 라는 소리가 아니고요..
“입을 크게 열어서 나를 경배하라” 라는 거에요.
“입을 크게 열어서 나를 경배하라 그리하면 내가 채우리라 너의 필요를 다 채우리라.” 1절부터 하나님이 얘기하고 계세요.
나를 경배하라. 그것이 법이야. 그래서 이렇게 해주고 이렇게 해주면서 나를 경배하도록 내가 얼마나 좋은 하나님인지를 너에게 보여줬는데..
그런데 나를 경배하는 줄 알았더니.. 상황이.. 어려운 상황이 와서.. 물이 없어지니까 넌 나에게 경배하지 않고.. 너에게 물을 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것이 점점 우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우상숭배하지 말고 나를 경배해라. 나를 경배해라.
니 입을 크게 열어서 나를 보고 소리쳐 노래하라. 내가 하나님이라고..
그러면 내가 채울께..
그런데 이것도 우리는 오해하고 있어요. 소리질러서 내 필요를 기도하면 채워주신다고.. 시편 81편 앞에서부터 앞 뒤가 안 맞아요.
여기 앞에는 기도하는 얘기가 아닌데.. 갑자기 이것만 딱 떼어서 기도라고 이야기해요.
아니요.. 여기서 지금 경배 이야기하고 있어요.
상식적으로 봐도요.. 소리지를때요.. 입 크게 벌리지 않아도 소리지를 수 있어요.
주여~
근데 노래를 크게 하려면 입 크게 안벌리면 노래 크게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안되요. 입을 크게 벌려서 뭘해요?
노래해요. 경배하라는 이야기거든요. 근데 경배 안 했다는 거에요.
그랬더니 그 다음 보세요. 11절에 니가 나를 경배했으면 나를 너에게 줬을건데.. 너는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광야에서 물 한 그릇이 필요했다. 그래서 물 달라고 소리 지르고 있지.. 나를 원해서 나를 경배하고 있지 않았다. 그 얘기에요.
이런 말하면 시험이 되요.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밖에 없어요.
왜냐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경배자로 세워서 이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는 하나님의 온전한 소원 때문에 전 이걸 있는 그대로 말씀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래 너 원하는대로 한 번 해봐.’ 그리고 내버려둬요. 그랬더니 세상 사람들이 마음대로 제사를 드려요.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바가 아니야. 너희의 기뻐하는 바야.
왜냐하면 너희가 이런 종교행위적인 제사를 함으로써 이것을 통해서 너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이건 너희의 기뻐하는 바야. 너희의 기뻐하는 바이니까 너희 임의대로 하도록 내가 내버려둘께.
그게 시편 81편의 이야기에요.
근데 하나님은 이 제사를 원치않고, 하나님은 경배를 원하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이야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또 이렇게 이야기해요.
1~4절 하나님이 백성을 판단하는 거에요. 세상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을 판단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인데.. 이렇게 말해요.
제사드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나에게 경배하라는 이야기에요.
이게 번역을 제사로 해놔서 제사 같지만요.. 이건 제사가 아니라 헌물이에요. 감사로 드리는.. 입술로 드리는 헌물..
경배하라고 하는 거에요..
나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경배하는 것을 내가 원한다. 번제 드리는 거 원하지 않는다. 나를 아는 것을 나는 원한다. 하나님 위주의 사랑..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의 사랑.. 제사드리는 게 아니고요, 번제물 가져오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아는 걸.. 하나님은 원하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래서 본문에 이렇게 말하죠. 호세아 6장 3절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근데요..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을 알죠.
근데 성경에 구약에 보면요.. 하나님을 만난자들은.. 하나님을 진짜 대면한 자들은요..
다 죽은 자 같이 됐어요. 다니엘도 에스겔도 이사야도..
하나님을 보자.. 하나님의 빛을 보자마자 다 엎드려 죽은자 같이 되버렸어요.
몸이 썩어버린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니엘, 에스겔, 이사야) 이 형님들 이 오빠들에게..
“일어나라. 힘내. 두려워말라.” 이렇게 격려해야만 했어요.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야만 했어요.
후들후들 떨려가지고 뼈가 썩는 것 같이 됐어요… 하나님을 봤더니..
근데 그 하나님이요. 저는요 하나님이 어떨때보면 참 재밌는게요..
출애굽기 32장에서 그 금송아지 섬긴 후에 하나님이.. 모세가 그러죠..
“우리와 같이 가소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이소서 보이소서 보이소서.”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러죠.
“나를 보고 산 자가 없으니 너는 내 등만 볼지라. 고 바위에 숨어.”
그러고 지나가시잖아요.
그 얘기를 제가 보다가요 너무 우스웠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한테 하나님을 보이기는 원하는데 우리가 죽기는 원하지 않으시는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시는구나.
그래서 우리가 죽지 않게..
육신의 몸으로 와서..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빌립에게 예수님이 그렇게 말해요.
9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래서 우리가 신약에서 이젠 나 하나님을.. 벽옥과 홍보석.. 이 하나님을 보자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봤기 때문에 하나님을 봤고.. 하나님을 봤는데도 우리는 안 죽었어요.
우리 하나님은요 진짜 자상하시거든요. 너무 자상하시거든요.
근데 문제는 예수님을 봤으면 하나님을 봤다고 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요.
우리는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냐면..
부드러운 선한 목자, 내가 울면 와서 내 눈물을 씻어주시는 분, 나를 위로하시는 분, 내가 앉아있으면 나를 품어주시는 분, 하나님 아버지는 좀 힘들지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분.. 그래서 예수님 사랑해요 하고 노래하면 편한 분..
여러분 그랬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아버지 마음 알기라는 그 유행이 있었잖아요.
예수님은 좀 쉬운데.. 아버지는 가기가 힘들어.. 왠지 엄격하고 힘든 것 같애.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 .. 아버진 너희를 사랑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한다. 이런거 강의하면서 다니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유행처럼 그게 한바탕 휩쓸었거든요.
왜? 우리의 본연의 생각속에 예수님은 좀 기대기 쉽고, 아버지는 좀 어려운 뭐가 있었어요.
예수님을 우리는 무슨 솜사탕처럼 생각해요.
예수님은 그렇게 내 편에 서 계신 분..
예수님은 내 편에 계신 분, 예수님은 선한 목자, 예수님은 죽임 당한 어린양
그냥 그걸로만 우리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앞으로 볼 예수님의 모습은 그게 아닌거 아세요?
우리가 앞으로 볼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건지 아세요?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우리가 앞으로 볼 예수 그리스도는 이분이세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솜사탕같은 내가 울면 눈물만 씻어주시는 부드러운 예수님이 아니라 심판의 왕.. 이분이에요.
지금 뭐가 문제냐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난당한 어린양이라는 것을 가지지 못하고 그냥 심판의 왕, 정말 승리하실 왕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놓쳤어요.
예를 들면 이스라엘 민족은 공의의 하나님은 알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몰랐기 때문이에요.
근데 우리는요.. 사랑의 하나님을 너무 알다가 보니까 하나님과의 친밀함 친밀함 친밀함 하다가 보니까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마음이 딱딱해져서.. 하나님 앞에서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받아들여서 저러고 있지만.. 우리는 사랑을 너무 절락시켜서 자긍하는 상태에 들어가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어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떨며 그 앞에 나오는 떨림이 없어요.
근데 시편 기자는 뭐라고 말하냐면요.. (시편 2장11절, 4장4절 참고)
그 앞에 나오되 떨며 나오라.. 그 앞에서 기뻐하되 떨며 기뻐하라 라고 말해요.
왜 떨며 기뻐하느냐?
그분이 두렵고 무서워서 그러기보다..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면 떨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근데 그것에 대해서 처절한 깨달음이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해도 불꽃같은 눈으로 지금 보고 계시다는 걸 알면 우리 그렇게 못 살거든요.
근데 그거에 대해서 ‘아~ 사랑하시지.’
물론 사랑하셔요.. 근데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도 계세요.
용서하시죠.. 그러나 검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분이거든요.
이 두가지 모습을 둘 다 알아야 하나님 앞에 바른 경배로 들어가요.
한쪽만 알고 있으면 발란스가 안 맞아요.
그러면 내가 진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놓은.. 내 맘에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어려운게 뭐냐면.. 제가 있던 아이합 같은 곳에서는 아가서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까 어린 여자아이들이 예수님을 연인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굉장히 즐거워요.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가 만들어놓은 예수라고 하는 다른 우상이에요.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모습과 예수의 모습을 알지 못하면..
진짜 온전한 경배에 들어가지 못해요.
그분은 또 이런 모습을 가져요.
이게 누구의 모습인 줄 아세요?
앞으로 장차 오실 심판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주님을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이 진노까지 사랑하는 걸 말해요.
그 분 전체를 다 사랑하는 걸 말해요.
나를 품어주는 그 따스한 것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것까지 다 사랑하는 걸 그분을 사랑하는거라고 말해요.
이것까지 사랑해서 여기까지 다 경배하는 걸 그분을 위해서 경배하는 거라고 말해요.
그런데 분명히 나와있기는 이분이 말씀하시기를 “나홀로 전쟁한다”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아까 요한계시록 19장에도 그분이 오셔서 그 입에 나오는 검으로 만국을 단번에 끝장낸다고 되있어요.
그러면 그때 가서 우리가 할 몫이 있어요, 없어요?
우리가 주님과 같이 가서 요만한 칼 들고가서 흔들을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할일이 없어요. 할 일이..
그분이 단방에 끝을 내셔요.
마지막에 천년왕국 끝난 다음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시 사단이 나와서 뭐 이렇게 저렇게 할 때.. 그분에게서 불이 나와서 한꺼번에 살라버린다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앗 하고 싸워볼 힘도 없이 그냥 끝장이 나버려요.
그냥 그 분이 한번에 내가 끝낸다.
그러니까 우리는 백마타신 그분 뒤에 졸졸졸 따라가서 우린 뭐 해요 그럼?
경배하죠. 그거에요.
그때도 지금도 그날에도 우리가 그렇게 경배해요.
전 이걸 이렇게 표현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응원단..
그게 경배에요.
그래서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전쟁하러 나갈 때 제사장들과 의인들이 앞에 나가서 막 ~ 나팔불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막 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승리하시잖아요.
하나님의 법은요.. 그제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변함이 없으세요.
이 경배의 능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 같아요.
주님은 그 경배를 포함시키기 원하세요.
제가 드리는 이 모든 이야기가 내가 은혜받기 위한 차원에서 들으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가 안가요.
내가 좀 인간적으로 개발되서 내가 조금 더 좋은 크리스쳔이 되겠다 이 견지에서 이 얘기를 들으면 전혀 이해가 안되고요, 이거 나한테 필요없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있다.’ 더 큰 그림에서 ‘내가 하나님 편에 서길 원한다.’ 그러면 이것처럼 중요한 건 없어요.
우리는요.. 봉한 샘이 되면 안되고요.. 살아있는 생명수의 시내가 되어야 되요.
내 것에만 이렇게 집착해서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어요.
거기서 나와야 되요.
그리고 거기서 나와서 하나님나라와 뜻을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뜻을 바라보기 전에.. 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것을 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요.
‘요것이 하나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거야. 내가 주님을 요렇게 하면.. 내가 주님을 이렇게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하면 이게~’
그게 아니라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보면 이건 다 더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런 이야기도 나 하나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이 부르심이.. 이 비밀이 얼마나 큰 건지 몰라요.
우리가 무슨 굉장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한 경배자들을 원하는 소원으로 여기까지 알게 하신 거에요.
저한테 2010년도에 찾아와서 잠을 못자게 4년동안 붙들어 놓으시고..
겨우 깨닫게 하셔서 겨우 걸음마 쪼금 하게 하셔서 엎어지면서 여기까지 온 거에요.
하나님의 소원때문에..
여러분들 지금 힘든 상황이요?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거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이 경배자로 부르시려고 “그 상황에서 나만 바라 봐.” 라고 지금 하고 계시는 것이지 다른 이유 없어요.
누구 조금 더 죄 짓고, 들 죄 짓고, 조금 더 나쁜 습관, 조금 더 괜찮은 거..
그거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에요.
그 자리에서 누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일어설 것 인가가 문제에요.
누가 하나님을 믿을거며, 누가 ‘하나님만이 옳습니다’ 라고 나올 것인가.. 그게 중요해요.
그렇게 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면..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이 해결 해 주세요.
짐승의 수를 이기고, 모든 것을 다 이기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세와 아브라함과 그 모든 사람들이 서서 지금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하고 있어요.
왜 노래를 하고 있는지 알아요?
이제 예수님께서 전쟁을 치룰 때가 가깝거든요.
그래서 노래를 하는 거에요. 뭐라고 노래를 하느냐?
“하나님의 소원이 이제 드디어 이루어질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때에 짐승의 수를 이기고 나와서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오셔서 싸우세요.”
응원하는 거에요. 그게 우리가 할 일 이구요.
그 때가 되기 전에 지금서부터 우리는 그걸 하는 거에요.
내 삶 속에서부터.. 그게 경배에요.
그 경배의 작은 모형이 아주 작은 모형이 예배시간에 와서 30분 노래하는 거에요.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그것도 너무 중요해요. 너무 중요해요.
왜냐?
공동체가 모여서 경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없어요.
그러나 내가 내 삶 속에서 내가 엎드려지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지.. 하나님이여 당신이 옳습니다.”
하고 일어설 수 있는 거.. 그 처절한 경배..
하나님이 가슴 터지도록 기뻐하시는 경배에요.
이게 지금 하나님의 비밀이거든요.
“내가 전쟁할꺼야. 그러나 너희들은 그 때 다 나의 응원단으로 서 있을꺼야.”
다윗이 이 비밀을 알아서요 자기 평생에 하나님을 응원하고 살았어요.
다윗은 자기 영성 개발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성은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개발시켜 주셨지..
영성개발을 위해서 산 사람이 아니에요.
완전히 하나님 편에 서서 이야기 하는 거에요.
“하나님! 당신만 옳고요. 다 틀렸어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뭐라 그래요.
1절에 보면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한다.’ 그 손으로 뭐해요? 열 줄 비파 튕겨요.
1절에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는도다
9절에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열줄비파’ 열가락의 손가락이 다 필요해요. 열줄비파를 다 치려면.. 다윗이 하는게 뭐냐?
하나님이 나를 경배하게 하는 거..
내가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전쟁하는거다.. 이걸 아는거에요..
경배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선지자적인 관점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었고요..
앞으로 올 일을 이미 예언한 거에요.
이스라엘을 지으신 이유가 그분을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죠.
이스라엘에게 준 법이 나를 경배하라 였어요.
내 힘으로 전쟁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한 것이고요.
“하나님이 전쟁하실거고 나는 그 분을 응원할 뿐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한 거에요.
그리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데요.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경배를 통해서 이 자리에까지 갈 수 있는 영광이 있도다.
경배자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건.. 이렇게 놀라운 거에요.
하나님의 응원단.. 상상이나 할 수 있어요?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하고 사는 그 한가지 한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승리하신다.
내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될 때 하나님이 승리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전쟁에 나선 하나님의 응원단이다.
그게 경배자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하셔서 그 응원단을 원하시고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응원단을 포함시키기를 원해요. 그게 경배자에요.
시편 24편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이렇게 기도하는 거에요.
전주 땅에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광주 땅에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이렇게 노래하는 거에요. 경배하는 거에요. 하나님을 응원하는 거에요.
이게 진짜 경배거든요. 나하고는 상관없어요.
나 하나 어떻게 좀 해 주는거.. 그거 말고..
영광의 왕이 들어오셔서 하고 싶은대로 다 하시라고 하는 거..
그래서 그걸 노래해 드리는 거..
그게 경배.. 그게 온전한 응원이에요.
근데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
거기에 초점이 맞으면 우린 또 경배를 우상화하게 되요.
이게요 살얼음판이에요.
그런데요. ‘문들아 너희 문을 들지어다’ 하기 전에 전제조건이 있어요.
그 앞에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노래할 자가 누구며, 그 자리에 서서 말 일에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할 자가 누구냐?
이게 전제 조건이에요.
이게 없으면 경배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짜 소원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해서 경배하고 있는 동안에..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이것이 청결해지기 시작하고, 내 손이 깨끗해지기 시작하고..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이 거짓 맹세가 되지 않길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거에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지 않으면.. 우리는 자긍한 그런 교만한 경배를 드리게 되요.
예수 그리스도의 경배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모습을 띄어요.
죽기까지 복종하신..
우리의 경배가 겸손한 것이 아니면 안되는데..
겸손한 경배가 되는 것의 문제는 뭐냐면?
이 앞에 있는 것 때문에 갈등하는 거에요.
하나님!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근데 내 속을 들여다보니까.. 내가 아직 손이 깨끗하지 않아.
하나님! 이거 갈등해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내가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하나님을 원하고 있을꺼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할 때.. 이거 주님이 해결하실 것이다 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갈등 안하는 건 아니에요.
갈등을 안한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사기꾼이에요. 사기꾼.
갈등은 되요. 내 손이 안 깨끗하거든요. 내 마음이 하나님 성산에 오를만큼 정결하지 않거든요.
내가 허탄한데 뜻을 많이 두거든요.
내가 주님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돌아서서 돈 사랑하는 거 했거든요.
거짓맹세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갈등하죠.
그러나 이 갈등에 메여서 하나님을 경배 못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을 때..
이 모든 것들의 하나님의 빛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의 왕이..
전주 땅에 임한다고 한다면.. 그 영광의 왕이 여기 먼저 임하죠.
오셔서 전쟁하실거죠.
하나님은요.. 오늘 우리에게 단 한 마디도 책망하시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소하시는 거에요.
“나의 응원단으로 이 막막한 세상 가운데 서 있을래? 내가 너희의 응원을 받으며 입성하길 원한다. 내가 너희의 응원을 받으며 이 세상을 심판하길 원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것이 하나님편에 서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내 편에 서기 시작하면.. 내 문제 때문에 그 자리에 못가요. 내 문제 때문에 거기 못 가는 건.. 내가 내 편에 서 있는 것이고.. 여호와의 편에 서 있지 않는 거에요.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건.. 내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주님이 그러시니까 그 자리에 갑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 하고 나아가는 것이 여호와의 편에 서는 거에요.
레위인도 “누가 여호와의 편에 설꺼냐?” 자기들도 추잡하게 금송아지 섬겼어요.
근데 여호와 편에 서겠다고 나왔어요.
그 뒤에도 많이 넘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고집하는 거에요.
왜요? 하나님이 원하시니까요.
마지막에 말 일에 주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회복한다고 하셨어요.
아이합처럼 24시간 기도의 집을 회복한다는 게 아니고요..
다윗이 가지고 있던 그 경배의 영을 회복한다는 거에요.
우리가 다 그 사람들이에요.
그 부르심을 받고.. 그래서 이런 호소를 듣고 있는 거에요.
이제 반응은 여러분들의 몫이에요.
저는 이 음성을 듣고 반응을 한 거에요.
돌로 나를 쳐서 나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나는 얘기를 할꺼고 칼을 맞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 편에 설 겁니다.
하나님편에 서야 되요.
마지막 숙제는 뭐냐면요.. 내 편에 설꺼냐, 하나님 편에 설꺼냐? 에요.
세상편과 하나님편이 아니라.. 내 편이냐, 하나님 편이냐..
내가 내 편을 들꺼냐 아니면 하나님 편을 들꺼냐..
그것이 경배에요.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마칠꺼에요.
우리가 마음껏 하나님을 응원해야 되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삶의 살아가는 방식이 되야 되요.
여러분 힘들 때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응원하세요.
하나님을 응원하고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
내 지금 이 상황에 영광의 왕이여 입성하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편을 드는 거에요. 그렇지만 나의 약함은 인정하는 거에요.
그것이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예배하는 거에요.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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