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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다음 차원의 사랑(경배자로 서 가는 과정)Fam Worship 2024. 4. 17. 10:33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사실은 관심이 없잖아요. 평소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우리도 옛날에 관심이 없었어요.
관심이 없다가 누군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복음이라는 걸 듣게 되요.
그 복음이라는 걸 듣고 ‘아! 그렇구나. 내가 살아가야 되는 이유가 내가 지옥에 안 가기 위해서 내가 주님을 믿어야 되겠구나.’ 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해요.
교회에 나오기 시작해서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조금 더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래서 교회에 막 봉사를 하게 되요.
봉사를 하고, 말씀도 좀 보게 되고, 기도도 좀 하게 되고.. 그러다가 보니까 조금 더 갈망이 있어서 이것도 추구하고 저것도 추구하는 단계까지 가다가..
그 다음에 어느 단계까지 가면 이제 주님께서 귀한 종들을 통해서..
“그게 아니야. 주님이 원하시는 건 주님을 사랑하는거야.” 라는 걸 깨닫기 시작해서 거기서 이 모든 멍에가 풀어지면서..
주님을 이제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가기 시작하죠. 근데 거기서부터 또 하나님은 그 다음 여정으로 끌고가시는데.. 그게 뭐냐면?
사랑은 하되.. 아직은 우리가 내 위주의 사랑을 하게 되요. 나 위주의 사랑.
물론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그 반응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면밀히 다 점검해보면.. 나 위주의 사랑을 하게 되요.
그건 뭐냐면?
꼭 이기적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게 사랑이야.’ 하는 것을 주님에게 드리게 되고 그것을 가지고 고백하게 되요.
이제 그 단계에서 진짜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건.. 내 위주로 사랑하는게 아니라 상대방 위주로 사랑하는 게 사랑이에요.
내 위주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은 오래 못 가고요.. 변색하게 되요. 그 사랑은 힘이 없어요.
아직은 내 위주로 사랑하는 것도 너무나 아름다워요. 주님이 너무나 좋아하세요. 왜냐하면 세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무 식어져있고 아예 없기 때문에요. 그래서 그것도 하나님이 감격하세요.
그거 보시고 감격해서 막 쏟아 부으세요.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을 완전히 열고, 하나님이 전 존재로 우리에게 쏟아 부으시며 우리와 하나님의 눈물과 아픔을 나누기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이 가자하는 곳으로 우리가 갈 수 있고..
하나님이 올라가자 하는 곳에 올라 갈 수 있고.. 구름이 뜨면 동행하고, 구름이 가라앉으면 앉는 그런 삶까지 가기 위해서는..
나 위주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위주의 사랑으로 이제 바뀌어야 되요.
근데 하나님 위주의 사랑으로 바뀌는 이것이 바로 경배에요.
그러니까 그 경배로 이 성경이 마감을 하는 거에요.
우리 크리스천의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주님을 주로 삼는 사람의 그 마지막 단계가 뭐냐면?
하나님이 받을 만한 온전한 거룩한 경배의 삶으로 그분에게 올인하는 거에요.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사는 거에요.
거기까지 가려면 진짜 거룩한 경배를 드릴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안 되요.
근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대한 감격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또한 우리는 나 위주의 사랑을 하는 단계가 있어요.
그것이 절대로 죄는 아니고요.. 그것도 너무 아름다워요.
그러나 주님은요. 욕심이 많으시고요..
주님은 사랑에 한해서만은 절대로 중간에 중도하지 않으세요.
무섭도록 밀고 들어오시고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세요.
마태복음에 혼인잔치에 초정함 받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왕이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사람들이 “갈께요. 갈께요.” 해 놓고 ‘아~ 나 오늘 밭에 가야 되서 못가요. 뭐 했기 때문에 못가요.’ 그러고 못 간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리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여요.
못 간다고 얘기하니까 이 왕이 군대를 보내서 다 불태워서 죽여버려요.
그럼 그 왕이 선해요, 안 선해요? 말이 안 되요.
아니 결혼식에 좀 안 왔다고 결혼식 초청했는데 안 왔다고 불태워버리는 그런 사람이 어디있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런 다음에 길거리에서 사람을 다 데리고 왔는데.. 다 데리고 와서 가득 채웠는데.. 그 중에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내요.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내는 것은 또 뭐에요.
우리는 그런거에 대해서 질문을 안해요.
‘그냥 우리가 깨끗한 예복을 준비하고 부를 때 가야 돼. 안그러면 안 돼’ 이렇게만 생각해요.
그러면서 본문의 마지막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걸 가지고 본문 가운데에 제가 어떻게 느꼈냐면요.
도대체 결혼식에 초청을 했는데 안 왔다고 이렇게까지 진노를 하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가서 죽이고 불태워버릴 수 밖에 없는 그 왕의 마음은 뭘까?
근데 이 본문에 앞에 보면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준비했다고 말해요.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그러면 문제는 뭐냐면?
거기 초청받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손님으로 초청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게 문제에요.
손님으로 초청받았으면.. ‘안 오네. 에이~ 치사해. 안왔네. 정 못 붙이고 살겠네. 저가 결혼식할 때 내가 안가면 되지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준비했어요.
그리고 사람을 오라고 초청했는데 안 왔다고 죽이기까지 한다는 얘기는 초청받은 대상이 손님이 아니라 신부라는 얘기에요.
신부를 초청했는데 그 신부가 자기가 신부인지 몰라서 안 나타나는 거에요.
신부로.. “00야. 너 결혼식에 와” 그랬는데 그 신랑이.. 왜 왕이..
왜 나를 초청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거에요. 초청한 이유를..
근데 성경의 비밀은 뭐냐면?
그렇게 초청했을 때 하나님은 신부를 부르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오라고 말했을 때 거기에 “너가 신부야.” 그럼 신부는 어디 있어야 되요?
신랑의 자리 옆에 서야 되요.
그런데 신부가 안 나타났어요.
왜 안나타났냐면?
자기가 신부인지 모르니까.. 자기가 그냥 손님인 줄 아는 거에요.
왜?
신랑의 사랑을 몰라서 그래요.
그러니까 사랑의 질투하시는.. 불타시는 그 왕께서 나가서 다 진멸할 수 밖에 없어요. 이거는 완전히 고무신 거꾸로 신은 약혼한 여자인 거에요.
결혼식장에 아무 소식도 없이 안 나타났어요. 말도 안되는 거에요.
그리고 다 불렀는데.. 예복을 안 입어서 쫓겨나요.
예복 입은게 뭐에요? 결혼식에 누가 예복을 입어요?
손님들이 예복 입으세요? 결혼식장에 누가 예복 입어요?
신부요. 신부하고 신랑이 예복을 입어요.
그러니까 초청은 했는데.. 어거지로 다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그 사람들도 자기가 신부인지 모르고 들어온 사람들이 그 중에 있으니까 나가는 거에요.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봐요.
제가 신부, 신부 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자만 구원받는다라고 말하니까..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선교사님 말씀을 들으면 믿는 사람이 차원이 있는거 같대요.
나중에 구원받았는데..
신부 등급이 따로 있고, 믿는 등급이 따로 있는 거 같대요.
그래서 제가 “아니요. 저는요 신부가 아니면 거기 못들어간다고 생각해요.”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신부밖에 안 남아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신부 아닌 사람은 요한계시록 22장에 존재가 없어요.
성령과 신부가 기도하여 가로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다른 등장인물들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저는 제가 하나님의 그 신부에 대한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하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제가 알고 그것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본문의 비유를 들으면 그렇게 보이는거에요.
아! 초청을 했는데.. 우리 모두를 초청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내가 신부로 초청받았는지 모르니까..
“여기까지 가자.” 하는데 안 가는구나.
그걸 가르쳐주시는 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에요.
그런데 그 사랑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거기까지 끌려온 후에.. 진짜 신부의 자리로 가는 건..
내 위주의 사랑이 아니라 신랑 위주의 사랑이라는 거에요.
신랑 위주의 사랑이 뭐냐면?
경배에요.
왜냐면 경배라는 건 뭐냐?
당신 뜻이 옳고, 내 뜻은 틀렸습니다. 당신 뜻 만이 맞습니다.
무조건 이해를 하던 못하던.. 내가 이해 안하는 거 못하는거 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린 그러죠. ‘우린 이 상황.. 내가 이해 못해요.’
그러나 주님은.. “너가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내가 상관이 없어. 난 내가 뭘하는지 알아.”
하나님은 스스로를 믿으세요. 스스로가 어떤분인지 너무나 잘 아세요.
우리가 몰라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분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그러잖아요.
온전한 믿음은 뭐냐?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으로 믿는거에요.
왜냐하면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그를 기쁘게 못하나니 라고 말하지만..
그러면 주님이 말할 때 가장 큰 계명이 뭡니까? 그러면..
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믿어라.. 그것이 가장 크다..
그래야 앞 뒤가 맞잖아요..
근데 주님은 “믿음이 없이는 나를 기쁘게 못한다. 믿음이 없이는 안 돼.” 그래놓고 첫계명은.. 가장 중요한 건.. 니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는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면?
사랑하는게 믿음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는 얘기에요.
이제 그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 이제 우리는 그 단계로 와 있는 거에요.
이게 굉장한 초청인 거에요.
아가서를 한 번 보시죠.
아가서에는 신랑을 사랑하는 여자가 3번의 광야를 겪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 신부는 광야를 겪어요. 끝까지 광야를 겪어요.
그 3번의 광야가 꼭 예수님의 광야 시험처럼 3가지 에요.
첫째는 육적인 광야, 둘째는 혼적인 광야, 셋째는 영적인 광야에요.
예수님께서 돌이 떡이 되게.. 육적인 광야였어요. 육적인 시험이었어요.
니가 산에서 뛰어 내려. 그러면 그분이 너를 구할꺼야..그게 혼적인 광야에요.
“나에게 경배해. 그럼 내가 모든 걸 줄께.” 예수님께서 “하나님만을 경배할꺼다.”
그러고 마지막에 그 경배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면서 사단을 물리쳐요.
그것이 영적인 광야에요.
우리 인간의 욕심 가운데에 육적인 욕심, 혼적인 욕심, 영적인 욕심까지 다 다스려져야 경배가 시작되요.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서 보통 사람들은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이 영적인 광야에서 걸려요.
영적인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 못해요.
영적인 욕심으로 내가 취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요..
그 영적인 욕심까지 하나님 앞에서 내어 던질 수 있는 자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요.
그러고 나면 그 내가 구했던 모든 것들을 거룩한 것으로 다시 변화시켜서 우리에게 부어주세요.
근데 그것은 무엇을 입느냐?
겸손이라는 옷을 입어요.
경배는 경배인데.. 겸손하지 않는 경배는 경배가 아니에요.
사랑은 사랑인데.. 겸손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주님이 하신 사랑은 겸손이라는 사랑의 옷을 입었어요.
겸손의 옷을 입고 끝까지 가신것이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에요.
예수님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표현은 ‘하나님 사랑합니다.’ 를 넘어서서 겸손이었어요.
끝까지 아버지 앞에 겸손이었어요.
제가 이 아가서를 다 강해를 할 수는 없구요.. 그냥 전체 그림에서 지금 이 경배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조금만 나눌께요.
아가서의 여자가 내 위주의 사랑을 하다가 신랑 위주의 사랑으로 가는 이야기에요.
그 신랑 위주의 사랑으로 가는 때까지 광야를 3번 거치게 되요.
3번의 광야를 통해서 이제 점점 육적인 것, 혼적인 것, 영적인 것들이 정리가 되고.. 영혼육을 합해서 그것만을 추구하고.. 그분이 원하는 곳으로 이제 나아가는 존재가 되고요.. 그렇게 됐을 때 얻어지는 굉장한 열매가 있어요.
첫번째.. 그가 가진 육적인 광야는요.. 아가서 1장 5절에 있는 것이에요.
5절이 되기 전에.. 이 여인은 그 신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 전해들었어요.
괜찮은 사람이고.. 굉장히 사람이 많아서 다른 여자들이 그 사람 참 사랑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자기도 그 사람 사랑하고 싶고.. 그 사람이 ‘아! 좋은 분이야. 나도 그분께 가고 싶어.’ 라고 생각해서 이제 마음을 쏟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단계..
주님을 사랑하게 되서 아!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단계.
그런 다음에 누군가가 말해줘서 “아! 저분은 아름다워. 그분을 사랑하는게 예수믿는거야.” 그래서 이제 그 사랑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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