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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경배의 비밀(2)Fam Worship 2024. 4. 16. 23:29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에덴동산에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자리에 있었으면 피조물이 이렇게 탄식하는 자리에 가지 않아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그 자리에서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아담에게 벌을 주셔서 그 댓가로.. “너는 땀 흘려 일하고.. 땀 흘려 일해도 땅에서 이것이 풍성하게 안 날꺼야.”
땅이 그 당시에 함께 인간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탄식하며 이제 풍성한 열매를 못 맺게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피조물들이 지금 기다려요.
우리 주변에 땅에 기근이 있어요. 왠지 아세요?
인간이 이 경배의 자리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있으니까..
근데 이 피조물들은 알아요. 자기들의 결말을요.. 같이 끼어서..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쩍쩍 갈라져서 열매를 못 맺고 있는거..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면 해결 되는데..
지금 로마서 8장이 그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는데.. 그 하나님의 자녀가 어떠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
원래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땅에 있는 자들..
그 사람들을 기다린다는 거에요.
근데 처음에.. 맨 처음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이었어요.
그래서 그분이 오셨을 때.. “바다야 잠잠하라.” 바다가 말을 듣고..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배자로 이 땅에서 완벽하게 사시는 그 분이 움직일 때마다 피조물들이 그에 따라서 회복이 일어나거든요.
이 그림이 보여져야지 경배의 비밀을 알 수 있어요.
이건 그냥 우리가 교훈 정도 받고 마는 이 차원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예수님이 탄식을 하면서 내 아버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찾는다.
성전의 예배를 회복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원하는 그분의 소원 때문에 그러죠.
한 사람의 경배자가 하나 서면.. 진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
경배자 말고, 경배인도자 말고.. 워십 인도자가 경배자가 아니에요. 그거 말고..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 때문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자..
그래서 밥 먹는 것도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마시는 것도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
설교를 하는 이유도 하나님께 경배.. 찬양하는 것도 하나님께 경배..
내 숨쉬는 이유도 하나님께 경배가 되는 그런 존재..
그런 존재들이 그런 자들이.. 그게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이에요.
그 새로운 모습이 뭐냐?
‘하나님이 나의 주인입니다.’ 를 철저히 인정하는 자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자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새로운 피조물이지..
조금 인격이 바뀐 정도가 아니에요. 그걸로는 안되요. 그건 시작이에요.
그런 나의 인격이 바뀐정도가 아니라..
내가 완전히 주님에게 사로잡혀서 그분이 내 주인이다는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저 주인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이고요. 그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자연이 회복이 되요.
자연이 그것을 알아요. 로마서 8장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역대하 7장 14절에도 나와 있죠.
같이 연결이 되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요.. 경배자들을 세우기 위해서 너무나 열심이신데..
그 경배자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말 큰 위험부담을 안고 계세요.
그게 뭐냐면?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철저한 경배자로 사셨던 이유는..
이 세상이 그분에게 광야였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이 말한게.. 그분이 살기에 최적의 환경이었으면 하나님을 경배할 필요가 없었을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경배자를 세우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이 광야라고 하는 것을 용납하셔야 하는 위험부담이 있어요.
근데 그 광야의 위험부담을 안고 주시는데.. 거기서 더 큰 위험부담은 그 광야를 가면서 이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았으면 하는 위험부담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6절에..
이거는 주님이 세례요한에게도 그렇게 하셨거든요.
감옥에 있는 세례요한을 꺼내주지 않았어요.
세례요한이 예수를 위해 산 사람이에요.
태어나기 전부터 뱃속에서 예수님의 엄마를 보면서 펄쩍펄쩍 뛰놀았어요. 좋아서..
그만큼 태어나기 전부터 예수의 목을 맨 사람이었어요.
예수님 밖에는 없었어요.
그런데 그가 예수를 위해서 살다가.. 광야에서 살다가.. 이제 감옥에 갇혔는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다른 사람 다 풀어주고, 다른 사람 다 병 고쳐주고, 다른 사람 다 눈 뜨게 하면서 세례 요한은 찾아오지도 않고, 구해주지도 않아요.
근데 그에게 주님이 말씀을 전하는 거에요.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다. 너가 그 자고, 너가 복이 있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는 위험부담이라는 것을 가지고.. 이 성경 속에서 경배자들을 세우시는 이야기가 성경속에서 수없이 많이 나와요.
바로 욥의 이야기가 그런 거에요.
욥은 지금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아주 최고의 조건에서 살고 있어요. 애쓸 필요없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입장이었어요.
여기 있는 번제가 경배에요? 제사에요?
제사에요.
자기 아들들과 상관없이, 나도 상관없이 여호와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여호와를 높이는 경배가 아니라..
내 아들들이 죄를 지어서 생활할까봐..
그 두려움에 의해서 드리고 있는 건.. 경배가 아니라 제사에요.
보고 들은 대로 자랐고.. 하나님께서 은혜주셔서 마음도 정직했고, 하나님께 칭찬도 듣고 있는 자이지만..
아직까지 제사하면서 살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런 제사하는 자리에 있기 원하지 않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런 다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뭐라고 예언하셨어요?
현재의 모습이 그렇다는 얘기는 거의 안해요.
앞으로 그럴꺼라는 소원을 보고 얘기하세요.
뭐냐?
시몬을 보고 베드로라고 얘기하세요.
하나님은 지금 이 사단에게 얘기하는게 뭐냐면?
내가 욥을 세상 가운데서 나를 가장 경외하는 자로 만들겠다라고 하는..
어떤 약속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운 적이 있어요.
여호와께서 욥을 하나 놓고 사단과 전쟁을 하신다는 거에요.
이럴 순 없어요.
하나님은 이미 사단을 이기고 계세요.
사단은 하나님하고 게임이 안되요.
왜 사단이 이렇게 하나님께 도전하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게 우리에게로부터 사랑이라고 하는 경배를 받기 원하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요. 기가막힌 건..하나님이 사단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사단이 하나님과 게임이 되요? 안되요? 안되요. 도전을 할 수가 없어요.
근데 사단이 하나님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어요.
뭔지 아세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두고 하나님에게 도전할 수 있어요.
무서운 이야기에요.
사단은 그 어떤 걸 가지고 하나님에게 도전을 하거나 딴지를 걸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며, 어떻게 사랑하는가.. 그걸 가지고 딴지를 걸 수 있어요.
왜 그럴 수 있느냐?
사람의 속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기가막히게 그 도전을 받아들이죠.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는가에 따라서 하늘에서는 전쟁이 있는거에요.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이 있는거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승리라고 하는 그 놀라운 일을 우리하고 묶어 놓으셨어요.
우리가 아니면 뭘 하실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낮추셔서 내 나라가 이루어지기에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함으로 나를 경배하는 것을 통해서 내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겸손하게 우리를 거기 포함시키셨기 때문에 사단이 그것을 알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과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묶어놓으신 거에요.
그래서 지금 욥에게 위기가 왔잖아요..
이런 위기에서 욥이 어느 쪽을 서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조롱을 받으실 수 도 있고.. 사단을 참패를 시키실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감수하시는 거에요.
이것은 욥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위기 가운데 내가 어느쪽을 택하는가에 의해서 사단이 도전을 걸고..
하나님은 거기서 승리하시던지.. 하나님이 힘들어지시던지..
하나님이 사단 앞에서 잠깐 말을 못하실 정도의 입장에 가실 수도 있는 것이..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가에 의해서..
욥이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욥이 어떻게 하는가에 자기의 명예를 걸어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겸손한데..
우리는 그 하나님한테서 무엇인가 끌어내려고 끊임없이 제사를 하고 있죠.
우리는 얼마나 치사하고..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한지 모르죠.
그래서 욥이 이렇게 이야기하죠.
여러분 이게 경배같이 보이시죠.
그러나 여기 하는 내용을 보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당신이 주셨고, 당신이 가져가셨으니까 괜찮습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어요.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것에 머물러 있어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니까.. 그 다음 차원에서 계속 친구들하고 변론을 벌이는 거에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니까 계속 변론을 벌이는 거에요.
그렇게 변론을 벌이고 그냥 하나님에 대해서 막 떠들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죠.
욥기 38장서부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제 말씀하시죠.
“너희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역겹고 역겹고 역겹다.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내가 나무를 만들 때 어떠한 마음으로 그거 만들었는지 알어?
내가 산을 만들 때 내가 어떠한 떨림으로 그걸 만들었는지 너 알어?
내가 악어를 만들 때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뜻으로 그걸 만들었는지 너 알어?
니가 아는게 뭐가 있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어?”
그 얘기를 쭉 하시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이기 시작할 때..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들어가요.
그것이 욥기 42장이죠.
이것이 경배에요. 경배는 이게 경배에요.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가 욥의 삶에 이루어지고..
그 후에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축복은 말로 할 수도 없어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리라..
우리가 뛰어나가서 전도 하나 해서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거.. 하나님의 나라 일이에요.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게 내 안에서 지금 일어나는 걸 이야기해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그래서 드디어 욥은 제사 드리는 자리에서 경배의 자리로 들어가요.
자기가 복을 받았기 땜에 그 복을 잃어버릴까, 하나님앞에 범죄할까 두려워서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경영이든지 이루시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으로 알고, 그 앞에 감격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경배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은 사단을 무참하게 완전히 참패하게 만드시는 거에요.
그게 욥의 이야기에요.
창세기 22장 보시죠.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어요.
아브라함에게도 일생일대의 위기가 왔어요. 아까 욥에게 그게 위기였어요. 위기에서 어떻게 할꺼냐?
욥이 거기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거 아세요.
또 이렇게 제사할 수 있었던 거 아세요..
번제물을 어디서든지 구해서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를 구해주세요. 나 여기서 이 원수들 앞에서 나를 높이 드세요.
여기서 나를 해결해주세요. 내 잃어버린 재산을 돌려주세요.
내 아이들을 돌려주세요. 내 생명을 돌려주세요. 나를 고쳐 주세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진짜 헌신되게 살께요. 그렇게 해주세요.” 할 수 있어요. 그건 경배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있었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이야기하죠. 근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상한 얘기를 해요.
경배하고(예배하고)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 다음 문장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경배의 내용이 하나도 안 나와요.
분명히 종에게 “나 경배(예배)하고 올께” 라고 말하고 산으로 올라가요.
근데 올라가서 경배하는 모양은 지금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결론은 뭐냐면..
제가 알기로, 제가 깨닫고 있는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 인간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배의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자리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승리하시는데..
그걸 내가 알고 있는데..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뒤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세요.
이게 아브라함이 복 받는게 아니라요..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거거든요.
아브라함이 복 받는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대적의 문을 밟아버리고 닫아버리는 역사가 이 아브라함의 무엇인가를 통해서 일어났어요.
하나님이 사단에 대해서 완전히 대적의 문을 밟아버리고 완전한 승리하는 그 시작의 열쇠가 아브라함이 무엇인가를 한 것에서 일어났다고요.
그렇게 해서 제가 결과를 보니까.. 위기에서 경배함은 일어나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리고 앞에서 아브라함을 분명히 경배하러 간다고 했는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어? 경배한 거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제 속에서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너는 경배가 뭔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아브라함이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는 걸음..
올라가서 나무를 아이에게 지우고 가는 걸음..
한곳에 도달아서 나무를 쌓아놓고 아들을 결박하는 그거..
그리고 그 아들을 거기다가 누이는 거..
칼을 들어서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향한 경배다.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경배다. 그걸 통해서 내가 승리하였다.
내 자가 대적의 문을 취하였다. 내 소원이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가 어느 순간에서 삶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 작은 경배를 선택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승리하셔요.
아브라함과 욥을 통해서 봤어요.
우리의 위기 가운데에 우리 상황 가운데에 견뎌내거나 거기서 풀려나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을 한번 기억하고,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때문에 숨쉬는 그 한계 하나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대적해서 승리하고 계시죠.
그러면서 주님이 사단에게 “봤지. 봤지.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의 사건을 뒤집고 있는 내 사랑하는 자들을 봤지.”
주님의 승리.. 합법적인 승리는 우리의 그런 작은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죠.
노래하러 모이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삶 속에서 경배로 나아가는 거에요.
우리는 삶 속에서 매일 매일 순간순간마다 경배로 나아갈지 아니면 다르게 나아갈지 하는 그 상황에서 내가 경배를 선택하는 순간마다..
근데 그 경배라는 것이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며 작은 행동 하나 하나..
그것을 통해서 그 순간마다 귀에 음성에.. “봤지. 봤지.”
욥을 보면서 사단에게 “봤지. 봤지.”
그것이 하나님의 겸손이세요.
우리가 무슨 큰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작은 것부터 하는 거.. 그게 경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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