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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경배의 비밀(1)Fam Worship 2024. 4. 16. 20:25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은 바로 하늘에서 요한계시록 4,5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만이 거룩하다고 하는 경배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근데 여기서 사실은 경배와 제사라고 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드셨어요.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인간을 만들어서 막막한 세상에서 살게 하시지 않으셔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기 전에 인간이 누려야 할 것을 다 만드셨어요.
세상이 캄캄할 때, 인간이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막막하겠어요..
그래서 인간을 위해 빛을 만드셨어요.
하늘에 해를 두시고, 별을 두시고, 잠자리에 그것들을 보게 하시고..
세상이 흑백이면 너무 이상하니까 세상에 색깔을 두시고.. 나무는 퍼렇게 꽃은 빨갛게.. 그리고 그렇게만 있으면 너무 적막하니까 하늘에는 새가 뜨게 하시고, 바다에 물고기를 있게 하시고, 동물들을 있게 하시고, 그 동물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두시고..
그러면서 성경에 보니까 땅에 물이 솟아올라서 안개가 올라와서 하나님이 거기서 각종 씨 맺는 채소와 과일을 나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 처음에는 풀만 있었지만 주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기 직전에 이땅에서 안개가 올라와서.. 그때는 비가 없었으니까요..
물기가 있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땅에서 각종 씨 맺는 채소와 각종 씨 맺는 과일들을 만들게 하셨어요.
그러고서는 동물들에게는 풀을 먹게 하고.. 인간들에게는 씨 맺는 열매들을 먹게 하셨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그렇게 땀 흘려 이것을 기른게 아니라 저절로 나게 하셨어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창세기 2장에 이렇게 나와있어요.
그런데 그리고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그 에덴동산에 두시고 경작하게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경작하게 하신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 힘으로 땀 흘려서 얻게 하려고 경작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 때 이미 먹을 것이 다 땅에서 나고 있었어요. 성경 본문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근데 에덴동산에 아담이 딱 눈을 떴을 때 “우와~!”
흑암에 있었거든요. 흙이었잖아요. 캄캄했어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는데..
갑자기 눈을 딱 떴는데..
그냥 맹인이 눈을 떴을 때 빛을 보고 깜짝 놀랜거 하고는 차이가 안되는거에요 이건..
아예 빛이라는 걸 몰랐던 존재가.. 흙인데.. 눈을 딱 떴더니 빛이 있고, 온갖 색깔들이 다 있고, 그 앞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고.. 그리고 모든 각종 과일들이 있고.. 눈을 뜨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과일들이 있어서 그냥 따먹을 수도 있었어요.
만약에 우리가 깊은 잠에 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눈을 딱 떴을 때 하나님이 모든 걸 준비해 놨다. 내 앞에 잔치상을 다 베풀어놨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나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다..
그랬을 때 그 감격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내가 떡이 없을 때 만나 하나 딱 떨어뜨려줘도 ‘감격’이러는데..내가 눈을 떴는데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어요.
그러면 아담이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뭘 할 꺼 같아요?
“와! 우리 하나님 굉장하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하는 차원을 넘어서 아담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냥 감탄이었을거에요. 어떻게 이렇게! 꿈인가 생시인가.. 감탄 가운데 있었을거에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경작하게.. 사람을 만들어 경작하게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했다는 그 말이 히브리어 원어로 ‘아바드’라고 하는 말인데요..
그게 뭐냐면?
일하다 1
경배하다
그러니까 사실은 ‘일하다’ 라는 뜻도 되고, ‘경배하다’ 라는 뜻도 되는데.. 지금 그 자리에서 아담은 사실 일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요. 모든 것이 준비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아담을 처음에 하나님께서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배할 사람이 없어서 사람을 만드신 거에요.
세상을 다 만들어 놓고 아담이 먹을 수 있는 과일까지 다 나오게 하신 후에 아담을 딱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아담 보러 다스리라는 말은..
아담이 다니면서 이렇게 하는 거에요. 시편에 나와 있어요.
시편 148~150편에 보면..
바다야 하나님을 송축하라. 땅들아 하나님을 송축하라. 새들아 하나님을 송축하라. 나무들아 하나님을 향하여 박수치고 노래하라. 그렇게 하는 성경 구절이 시편에 나와있잖아요. 호흡이 있는 자, 생명이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을 송축하라.
온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라.
그것이 아담이 하는 일이에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그것을 함으로 땅을 경작하는 것이고요..
그것을 함으로 땅을 다스리는 거고요..
하나님은 그 경배를 받으시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시는대로 에덴동산을 직접 다스리는 거였어요. 그러나 그 다스림이 아담의 그 경배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경작하다, 다스리라’ 는 그 원어가 ‘경배하다’ 에요.
그런데 그 경배하면서 세상에서 이 땅.. 하나님이 만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렇게 있으면서 모든 육축을 다스리고 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면서 놀라운 특권을 주시고.. 그 놀라운 책임을 맡기신 후에 한 가지 조건을 달으신 거에요.
그게 뭐냐면? “선악과만 따 먹지 마라.”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제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99.99999….를 다 준비해 놓으시고, 0.0000…..1 이거 하나를 남겨두신 것이 선악과 같아요. 이것만 먹지마.
“요거를 안 먹는 것이 나를 경배하며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표시야. 다른 건 다 내가 너한테 맡겼어. 요거 하나만 먹지마. 요게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표시야. 그것만 먹지마.”
그런데 하와가 그걸 먹어요.
하와가 그것을 먹고 지혜가 거기서 생겨나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내보내고.. 그때부터 그 죄 때문에 뭐가 생겼냐면..
경배가 빼앗기고 박탈당하고 제사가 들어왔어요.
죄 때문에 제단이 있는 거에요.
경배는 죄와는 상관이 없어요.
제사는요.. 제사드리는 자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한 거에요.
내가 내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려요.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려요.
그러니까 그 제사의 주인공이 누구냐면? 제사하는 자에요.
그 앞에 있는 존재는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것을 줄 곧 받아내는 거에요.
경배는요.. 이 앞에 있는 분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그분에게 올려드리는게 경배에요.
내가 무엇을 받는게 아니에요.
경배는 그냥 그분이 너무나 기가막히게 아름답고.. 요한계시록 4장처럼..
나는 거기 앞에서 보니까 그분을 높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만큼 감탄을 해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요.
나를 위해서 이 모든 걸 준비해놓고 기다리시죠.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진 거에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나니까 그 죄 때문에 그 경배의 자리에 가지를 못해요. 그래서 제사라는게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 제사를 통해서 내가 죄 지은 것을 하나님께 해결해야만 그 옆에 나갈 수 있는 그런 자리에 겨우 얻어지기 시작한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소원은..인간과의 사이에서 제사를 통한 언약을 맺고 싶은게 아니라 경배를 통해서 친밀한 교제를 원하신거죠.
왜냐하면 제사라는 것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는 거래의 방식이고요.. 경배는 관계에요. 관계.
하나님은요. 태초부터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원했어요.
그래서 시편에 써 있어요.
바다야 하나님을 송축하라. 하늘에 있는 천사야 하나님을 송축하라.
시편에 보면 인간이 하늘에 있는 천사도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명령하는 권한이 있어요.
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야 하나님을 송축하라. 바다에 있는 리워야단, 너 사단아 하나님을 송축하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어요.
그런데 그걸 박탈당했어요.
왜?
선악과를 따 먹고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요.
그래서 우리는 겨우겨우 제사 지내므로 그 앞에 가는 비참한 존재로 살아가는 거에요.
그러고 그 제사를 하면서 무슨 일이 생기냐면..
가인과 아벨 사이에 질투가 생기고, 살인이 들어오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합이 깨어지고, 비교하게 되고, 죽임이 들어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을 두실 수가 없어요.
인간을 다시 하나님을 영원히 경배하는 자리로 데려가셔야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넘어가면.. 제사라는 것은 더 이상 없어요.
경배만 있어요.
왜냐면 그분이 영원히 우리가 있을 자리이기 때문에요.
하나님과 우리의 정체성은요.
하나님은 영원히 경배받을 분.. 우리는 영원히 그분을 경배하는 자..
그걸로 끝이에요.
근데 그 경배한다는 그 모습의 최고의 모습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제사를 지내는 이것 가운데서 인간이 하나님의 경배하는 자리로 못 들어가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이 아프시고, 이건 아니다를 생각하시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제사를 드린다고 하잖아요.
단번에 희생 제물이 되서 제사를 드리니까 제사는 이제 끝이고.. 경배로 들어가야 되요.
그런데 인간은 아직도 제사를 드리는 습성이 남아 있어서 계속 하나님 앞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어요. 경배를 드리지 못해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사람이 거듭난다고 하는 것이.. 사람이 변화를 받는다, 거듭난다, 새로운 존재가 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왜 새로운 피조물이 되야 하는지 아세요?
원래 피조물의 자리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야 되요.
원래 피조물의 자리가 뭐에요?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리였어요.
거기서 경배를 박탈당하고, 제사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피조물이 되서 단지 원래의 경배의 자리로 가야 되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복음이라고 얘기했을 때.. 우리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복음이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지옥에 안가는게 복음인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을 넘어서요.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하나님이 원래 원했던 관계로 들어가서 그 관계가 점점 발전해서 진짜 온전한 관계에 들어가서 원래 하나님이 소원한대로 내가 하나님앞에 있는 것.. 거기까지 데려가시려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복음은 우리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 만이 아니에요.
왜 이것이 복음이 되냐?
너희들 선악과 따 먹을 때부터 너희로 하여금 경배하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만들게 했던 그 바벨론이 무너졌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거에요.
나 하나 십자가로 구원 받은게 복음이 아니라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진다! 이게 복음이에요.
근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 하나, 누구 하나, 넘어뜨리던 그 바벨론..
그 우상숭배하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제사로 비굴하게 남아있게 했던 그것이 무너졌다.
그래서 너희가 마음껏 복음의 자리로 이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그게 복음이에요.
경배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간다.
그게 복음이에요.
창세기 1장, 2장이 이루어졌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루어졌다.
그게 복음이에요.
하나님의 계명을 왜 지켜요? 예수에 대한 믿음을 왜 지켜요?
이 자리에 가기 위해서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그렇게 우리가 들어갈 수 있었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뭐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감격해서 그분을 한없이 경배하는 것..
그리고 경배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
마지막에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무엇을 하면서 다스릴 것 같으세요?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세상을 다스려요.
경배하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겠죠. 그 분야가 다르겠죠. 어떨지는 모르죠.
그러나 분명히 복음은 경배함으로 그렇게 된다라고 나와있어요.
그런데 이 마지막에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도 복음이에요.
왜냐하면 그것들을 행해야 비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요.
하나님의 진노하심도 아름다워요.
왜냐?
하나님의 진노하심 때문에 이것이 끝이 날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근데 하나님이 나를 그냥 안아주시는 것.. 이것만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도, 하나님의 심판하심도 다 아름다워요.
왜냐?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그 소원 안에 우리는 기가 막힌 자리에 들어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 경배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원수는 계속해서 공략하는 거에요.
원수는요 사실은 지금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경배하지 못하게 하는데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만 모르고 있어요.
밖에 나가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정말 알곡으로 설 수 있게 양육하는 것이.. 그게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왜냐? 하나님 앞에서 진짜 각 사람을 길러내야 할 때니까요. 지금 그럴때거든요.
근데 이 경배의 자리에 하나님이 데려가시려고 하는데.. 이 경배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제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 보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채찍을 휘두르신 거에요. (마21:12~13, 막11:15~19, 눅19:45~48, 요2:13~22)
장사하는 모습 꼴보기 싫어서.. 그것을 넘어서서..
피 비릿내 나는 그 제사의 자리가 너무 싫으신 거에요.
“이것이 아니었어. 하나님이 너희를 창조하신 이유가 이것이 아니었어.” 에요.
예수님이요.. 시시하게 장사하는 그것을 보고 채찍을 휘둘렀다. 이정도가 아니에요.
“이것이 내 아버지가 너희를 만드신 이유가 아니었어.”
이렇게 피 비릿내 나게 이렇게 제사하는 모습..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 제사를 단번에 끝장을 내시는 거에요.
그리고 주님이 흘리신 그 피를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답게 흠향하셔서.. 더 이상 제사가 필요없게 되어버린 거에요.
그래서 경배의 자리에 들어가요.
근데 문제는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과 이런 것들이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해서 그걸 못하고 있어요.
아직도 제사적인 습성으로 하나님앞에 나오고 있어요. 이게 바뀌어야 되거든요.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에 나오는 존재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아세요?
이 모든 성경이 다 끝났어요. 맨 마지막에 남아 있는 존재들이 있어요.
여기에 나오는 존재가 누구에요?
예수님, 교회, 성령, 신부.. 다에요. 그 외에는 없어요.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성령, 교회, 신부..
그것이 요한계시록 22장 맨 마지막에 나오는 존재에요.
왜냐?
신부가 신부처럼 주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자는 없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되 하나님에게 감격해서 그분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그 신부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고..
그 신부는 내가 주인공이 되거나 내가 뭘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랑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거기에 빠져들어 감격하고 있는 존재가 신부고..
또 그렇게 연합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신부에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교회고..
그래서 이제 그 교회, 그 신부가 성령과 함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셔서 당신의 심판을 행하시고, 이제 당신의 말을 이루시옵소서. 모든 경배를 홀로 받으시옵소서.”
하는 것이 그 마지막 장면이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경배자라고 하는 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경배를 받는 분이 주인공이라는 그 근거에서 말한다면.. 경배자가 바로 증인이에요.
증인이라고 하는 건..
내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그분의 얘기를 하는게 증인이에요.
증인이 내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증인이 아니에요.
본 것에 대해서..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우리가 본 것과 우리가 들은 것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본 그 분.. 내가 느낀 그 분.. 내가 은혜받은 그 분.. 내가 사랑하는 그 분..
나를 만드신 그분을 얘기하는 것이 증인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 뭐라고 말하냐면?
충성된 증인이라고 말해요.
근데 영어로 말하면 faithful witness에요.
무슨 말이냐면? 정절을 지키는 증인..
충성되게.. 죽도록 내가 열심히 무엇을 하는 증인이 아니라..
faithful 이라는 말은.. 정절을 지키는 증인..
정절이 왜 필요하냐?
사랑해서 정절이 필요해요.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 사랑의 정절을 지키는 증인..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키고 그 정절을 버리지 아니한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분이 증인이에요.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서 끝까지 그렇게 살아가셨어요.
한번도 본인이 주인공 되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경배자로 끝까지 그렇게 살아가셨어요.
그래서 “내 아버지께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하고 그 마지막을 마쳐요.
왜냐하면 그분의 33년의 생은 완전히 증인의 삶이었어요.
아버지를 증거하는 삶이었어요. 아버지를 높이는 삶이었어요.
그래서 최고의 경배자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최고의 증인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요..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사랑 못해요.
그 예수님이 내 안에서.. 그 예수님이 내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만큼 사랑하죠.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사랑 못하죠.
예수님이 아버지를 가장 사랑했고, 아버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경배자이고, 아버지에 대한 정절을 지킨 증인이에요.
근데 그분의 증인의 삶과 경배의 삶이 어디까지 갔냐하면? 그 어떤 모습으로 갔냐면 그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끝까지 사랑하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그게 빌립보서 2장이에요.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나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죽기까지 가시는 분..
그건 억지로하는 복종이 아니라요.. 그건 사실은 완전한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말해요.
아버지는 여기 ↑ 나는 여기 ↓ 완전히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겸손의 옷을 입지 않는 경배는 경배가 아니에요.
자긍하는 경배는 아니에요. 들내이는 경배 아니에요. 경배는 드리는거에요.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은 겸손의 극치였어요.
그리고 겸손이 바로 경배에요. 입술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것이 경배거든요.
하나님께서 그러한 경배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요한복음에 얘기해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왠지 아세요?
하나님의 멈춰진 소원이 그래야 이루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요.
하와가 범죄함으로 인간이 제사드리는 존재로 타락했을 때.. 아담이 받았던 벌을 기억하세요?
“너는 땀 흘려 땅을 갈구어 일할거고.. 일을 해도 땅에서 열매가 풍성히 나오지 아니하리라..” 그게 벌이에요.
왜 그게 벌인지 알아요?
그렇게 안했기 때문에요.
원래는 그렇게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으면 땅에서 그냥 이 흙에서 열매가 주렁주렁 나는 것.. 그게 원래 하나님의 계획인데.. 그 제사의 자리로 떨어지고 나니까 “너는 땀 흘려 일을 해야 되고.. 땀 흘려 아무리 일을 해도 땅에서 풍성하게 열매가 안 나오리라..” 그게 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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