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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1)Fam Worship 2024. 4. 15. 10:28
성령충만이 뭔가 했더니요. 성령충만한 것도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나 행동만을 성령충만 이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성령충만이 과연 뭔가했더니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있어요.
고린도전서 2장 6~11절
6 그러나 우리가 2)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 성령이 진짜 하시는 일이 뭐냐면?
우리를 돌보는 게 아니고요..
성령의 진짜 원래 직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거에요.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는 거.. 그것이 성령의 직임이에요.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려고 할 때 아버지가 소원이 있었어요.
“세상을 창조하고 싶다.”
그 마음을 아시는 분이 성령이고요..
그것을 인도, 표현해서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말한 분이 성자에요.
성부, 성자, 성령이 아버지의 소원을, 하나님의 소원을 한번에 같이 연합으로 이루세요.
지금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원래 직임이..
우리는 성령의 하는 일이 저급한 차원에서 보죠.
나를 보호하는 것.. 나를 깨워주는 것.. 나에게 은사붓는 것..
그것이 성령의 직임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성령이 하는 일 중에 아주 작은.. 이 땅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맡기신 작은 직임에 불과하고요..
그분의 원래의 뜻은 뭐냐면.. 원래는 뭐냐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거에요. 하나님의 속사정을 아는 거..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을 아는 거..
근데 그것이 우리에게 감춰졌다는거에요.
왜 감춰졌냐면?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세상의 지혜를 먹었기 때문에 세상의 지혜.. 이 세상의 관점들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한 그 지혜를 알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선악과의 지혜를 보기 시작하면 성령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속사정을 성경을 통해서 절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다는 건.. 성령께서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의 속사정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 우리가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단계..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아는 거.. 그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알아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감격해서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거..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다 보니까 내 모습이 더 약하고 그 분은 더 아름다워서 그분 앞에 감격할 수밖에 없는 거.. 그래서 겸손하게 엎드릴 수 밖에 없는 거..
그래서 경배할 수 밖에 없는 거.. 그리고 거룩하다고 24시간 외칠 수 밖에 없는 거.. 그것이 성령충만이에요.
나가서 병자하나 고치는 거.. 이거는요.. 부수적인 드러나는 현상에 불과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 더한 성령충만은 없어요.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해서 성령을 보내셨어요.
성령 보내서 하시는 말이 뭐냐면 예수님이 이래서 부르신거야.. 예수님이 이 말을 왜 하셨는지 알아?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을 기억나게 하시고, 하신 말을 기억나게 하시면서 그를 통해서 뭘 나타내려고 하냐면?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분의 외모만을 봐서는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의 속 마음을 알아야 그분을 알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릴려고 하고.. 주님이 그걸 또 원하세요.
그래서 비밀에 감춰졌던 것을 우리에게 알게하려 하신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거에요.
더 나아가서 이렇게 얘기하죠. 보세요.
고린도전서 2장 12~16절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그리스도의 마음은 뭐냐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거에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요. 아버지가 형제를 너무나 사랑하는 걸 알아요.
내 아버지가 저 형제를 너무 너무 사랑하니 내가 저 형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신 거에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게 그리스도의 마음이에요.
거기에 메여서 살아가는 거에요.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근데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그 마음을 주려고 하신다는 거에요.
성령 충만은 주님을 아는 것인데..
주님을 알면 아까 요한계시록 4장에서 나온 것처럼 그 앎에 반응이 거룩한 반응으로 나와야 하는데..
안다는 걸 가지고 우리는 지혜로 바깥으로 다른 곳으로 뛰어 나갈 때가 많이 있죠.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는 그런 쪽으로..
근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건 이거야. 하나님 앞에 감격해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배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가는 것..
그게 하나님을 아는거야. 진짜 니가 하나님을 알면 그 자리에 갈꺼야.”
에베소서에는 성령충만을 뭐라고 얘기했나 볼까요?
에베소서 5장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해놓고 그 밑에 성령충만 받는 게 뭔지 풀어서 이야기해요.
에베소서 5장 19~21절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성령충만함의 모습이에요.
제일 처음에 뭐가 있어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하나님께 경배하라.”
그것이 성령충만함의 첫번째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 경배하는 모습이 무엇이냐?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거에요.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르 올바르게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우리가 성령충만이라는 것에서 점점 더 은사와 이런 것들이 나오면서 성령충만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성령이 충만한 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알아가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알수록 내가 감격에 사로잡히는 것.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
그 사랑에 복받쳐서 그분을 향하여 사랑한다고 노래하는 것.
그분만이 옳다고 고백하는 것.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동의하는 것.
그래서 그분에게 자원하여 항복하는 것.
그게 경배라는 거에요.
그래서 에베소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성령충만이 뭔지 알아?
첫번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노래해..
서로 화답하는 것이 우리끼리 화답하는 것도 있지만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거 보면 네 생물과 24장로가 서로 화답해요.
24장로가 뭐라고 하면 네 생물이 뭐라고 응답하고..
내가 하면 이쪽에서 받아서 같이 노래하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것의 모습에 가장 정말 두드러진 모습이고, 가장 중요한 모습 중의 하나인데..
우리는 이 본질적인 것들을 잊어버리고 부수적인 것들이 성령충만 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거에요.
그래서 그걸 추구하고 있는거에요.
이렇게 하고 살고 있는 사람은요.. 영적전쟁은 이미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다 해결이 되요. 영적전쟁을 내가 싸우려고 힘 쓸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이미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누구인지 인정하고 있는 자 앞에서 원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걸 모르고 원수하고만 싸우려고 하고 있는 거에요. 싸울 필요가 없어요. 게임이 안되요. 내 안에 계신 이가 이 원수보다 더 큰데..
내가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러니까 우리가 전쟁을 잘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고 있는 거지..
전쟁을 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고 있었던 건 아닌거에요.
경배하는 거.. 나는 경배하는 거.. 하나님이 전쟁하게 하는 것이지.. 내가 전쟁터에 뛰어들면 안 되요. 참패.. 참패..
멍들고 깨지고 부서지고.. 완전히 참패.. 싸워봐야 안되거든요.
예수의 이름으로 목 터지게 소리 질러 보세요. 그쪽에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소리 지르더라고요.
왜냐하면 귀신도 예수를 너무 잘 알아요. 사랑만 안 하지..
귀신이 예수를 더 잘 믿어요. 사랑을 못하지..
그런데 시편 25편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보세요.
하나님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리에 간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앎을 더 더해주세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같은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인정해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
가까이 오셔서 하나님의 비밀을 속삭여 주신다. 그 얘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비밀을 이야기 하시고,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또 더 경배하게 되고..
그러면 또 알게 되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진짜 진정한 경배자는 선지자적인 시야를 가져요.
그래서 시편에 나와있는 내용들이 그냥 시편기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언인 경우가 많아요.
예언 사역하시는 분을 많이 보지만 사람을 만지기 위해서 예언하는 거 말고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이야기하는 그런 예언적인 사역을 하시는 분들은 다 경배자에요.
왜냐하면 경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비밀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이요.. 다윗이 자기의 정체성이 뭔지 아세요?
‘나는 누구고 누구고 누굽니다’ 할 때요.. 맨 뒤에 나오는게 외국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에요.
예를 들면 “나는 밥도 잘하고, 음식도 잘하고, 나는 뭐도 잘하는데.. 사실은 나는 이런 취향이야..” 그러면 그게 정체성이라는 거에요. 밥 잘하는게 내 정체성이 아니에요.
지금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높이 올리움을 받은 적도 있고,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아서 내가 왕이 되기도 했어. 그러나 사실 나는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야.”
나는 경배자야.. 그 소리에요.
그러면서 마지막에 계속 자기가 유언처럼 남겼는데..
다윗은 평생을 경배자로 살았어요.
그리고 그러한 다윗을 보고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얘기해요.
왜냐?
하나님을 알아서 그 하나님에게 감격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그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그 다윗의 삶의 모습이었어요.
다윗이 시편을 대부분 썼잖아요.
시편의 사람들이 기도라고 이야기하지만요.. 사실은 기도라는 말이 경배에요.
다윗의 시편에서는 “이렇게 해주세요.”가 별로 없어요.
하나님앞에 내 아픈 마음을 토해내고 결론은 뭐냐면?
“그렇지만 내가 하나님을 믿을께요.”
하나님앞에 내 속상한 거 이빠이 부수세요. 저 놈의 이빨을 부수세요.
막 토해낸 다음에 끝에 가서는..
“다윗아! 내 하나님만 바라라.” 또 이렇게 얘기하고 끝내요.
다윗은 항상 경배자였어요.
다윗은요.. 기도로 무엇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다윗의 기도 생활은요 inquire of God 이에요.
뭐냐면? 하나님을 구한것이었어요.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구한 적이 없어요.
전쟁에 나가면서 ‘전쟁을 이기게 해주세요. 어떻게 이길까요?’ 그렇게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전쟁이 있는데 하나님은 이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하나님을 구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서 그냥 하나님이 누구시면 올려드리고 그걸 경배하고 그래서 다윗이 쓴 시편을 보면 예언적인 시편이 굉장히 많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가까이 오셔서 하나님의 속사정을 이야기하셔요.
그러니까 구약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성령이 가장 충만했던 사람이 다윗이에요.
여호와의 신이 가득하여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더니 악신이 쫓겨나고..
그 다윗이 노래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이거 한 것이 아니라요
“여호와께 노래하라. 여호와는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니..” 이렇게 했더니 악신이 떠나가요.
다윗의 시편 중에서 다윗의 이야기 같지만 예수의 이야기를 한 것이 너무나 많아요.
이게 다윗의 고백 같잖아요. 다윗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10절에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고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개역한글)
다윗은 썩었어요.
음부에 버리지 않고 썩지 아니하는 자가 누구에요?
예수님이에요. 이건 예수님의 노래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때에 하나님께, 아버지께 피하면서 사셨어요.
밤마다 산에 올라가셔서 그분의 음성을 들었어요.
(7,8절) 밤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니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그 아버지가 항상 내 앞에 계시니..
내 우편에 계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라.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며 법정에서도 자기를 참소하는 자들 앞에서도 가만히 서 계셨어요. 다윗은 요동했어요.
그러니까 다윗이 지금 노래하는 건.. 앞을 내다보고 예수님의 모습을 지금 자세히 예언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하죠.
9절에 내 마음이 기쁘고, 영혼도 즐겁고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고..
그래서 그렇게 살아갔던 그분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3일만에 구원시키셔서 썩지 않게 하셨어요. 다윗은 썩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얘기하죠.
11절에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아버지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아버지 우편에는 누가 서 계세요?
예수님이 서 계세요.
그것이 내가 서 있는 가장 즐거움있는 자리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고백이에요.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동안에 성령이 그 귀에다가 예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노래를 들으며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볼 수 있는 거에요.
경배자는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기 원하고 그 소원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런 시편을 읽으면 이 얘기를 나에게 조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를 봐요.
“아! 예수님의 노래구나. 예수님이 땅에서 이루셨구나. 그리고 이렇게 하셨구나.”
그런데 그러나 또 하나는 그 예수님이 땅에서 이루셨구나. 그리고 이렇게 하셨구나.”
그런데 그러나 또 하나는 그 예수님이 그러한 뜻이 너희에게도 이 소망이 있다고 또 말씀하시는 것을 또 봐요.
그런데 이 시편이 말할 수 없는 의문을 가진거에요.
이것이 만약에 다윗의 이야기이고 아니면 내 이야기이기만 하면..
땅에 떨어지는 얘기로 끝나요.
그러나 여기서 예수를 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그 놀라운 하늘의 비밀이 보이기 시작하면 여기서 능력이 나오는거거든요.
시편 22편도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있을 때 이렇게 고백하셨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4번째 말씀을 이렇게 하시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에요.
이걸 다윗이 미리 안 거에요.
자기의 작은 고통과 예수님이 겪을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되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어떤 고통을 당하고..
어떤 모습으로 갈 지를 미리 가르쳐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시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고요..
하나님의 비밀들을.. 하나님의 속마음을 이야기 하세요.
왜냐면 그것이 성령이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할 때 어떨 땐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노래로 나갈때가 있어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자에게 그 자리에 오셔서 말씀을 해 주시는 그런 상황에 들어가는 거에요.
지금 이 다윗이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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