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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다음차원의 사랑(경배자로 서 가는 과정 3)Fam Worship 2024. 4. 17. 13:10
이게 정결하게 유지 된 것 같지만요.. 잠근 동산은 썩어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요.. 꽃이 만발할 수도 없고요.. 향기가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요. 그 안에서 나만 좋아요.
덮은 우물.. 물이 그 안에서요. 물 떼로 나와서 썩게 되있어요.
이끼가 끼게 되어 있어요.
봉한 샘.. 샘은 흐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그런데 나는 이렇게 되길 원해.”
나는 그렇게 바라본다.
잠근 동산이 아니라 동산의 샘이 되길 원하고, 덮은 우물이 아니라 생수의 우물이 되길 원해.
너를 통해서 생수가 흘러가는 우물이 되길 원해. 봉한 샘이 아니라 흐르는 샘이 되길 원해.
내가 너를 거기까지 데려가려 함이야.
너를 통해서 내가 그렇게 되길 원함이야.
이게 주님의 꿈이에요.
그런데 이 여자는 그냥 방에 들어가서 자요.
이게 주님이 여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이에요.
솔로몬의 병거를 타고 권위와 능력을 가진 왕의 모습이 아니라.. 초라하고 초라한 모습.
밤이슬에 발을 적시고 머리에 이슬이 젖어서 머리는 다 늘어진..
그러면서 신부의 사랑을 찾아서 오시는 그분의 모습..
아무것도 줄 게 없는 것 같은 모습..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 초라한 모습..
거기서 사랑을 고백하세요. 문 좀 열어봐..
이러한 모습으로 문을 열으라고 밖에서 기다리세요.
그래서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동안에 이 여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드디어 죽음의 자리에 가는 거에요.
그 죽음이 뭐냐면?
내 영적인 욕심.. 그거 내려놓는 거에요.
그 마지막 내 욕심까지 내려놓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 몰약의 자리..
거기 가는 거에요.
그래서 내 손에서 몰약이 뚝뚝 떨어져요.
“주님! 내가 몰약산과 유향산으로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내가 당신 위주의 사랑으로 제가 이제 나아갑니다. 당신이 가자 하는 곳에 내가 갑니다.”
어쨌든 광야는 끝나서 그 영적인 광야 속에서 물을 열었죠.
근데 그 분이 없죠.
드디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리에 가요. 이전까지는 아니에요. 여기까지 가야 의를 위하여 핍박 받아요.
그전에 내가 쪼금 집에서 아니면 삶 속에서 쪼금 힘들 것 가지고..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다. 영적 전쟁이다. 죄송하지만 아니고요..
그냥 그건 혼적인 광야일 뿐이에요.
내 안에 있는 그런 혼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인 거에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리는 여기에요.
그러고 나서 이 여인이 드디어 9절에서 사람들이 물어보기 시작해요.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이 그거에요.
“주밖에 없네. 주는 나의 모든 것 되시네.. 그와 같이 비교할 자가 없네.. 주님과 같이 나를 만지시는 분은 없네..”
이 단계에서 이제 고백이에요.
그러면서 이 여자가 ‘나의 엔게디’ 이거 다 없어지고요.. ‘능력’ 이거 바라봤던거.. 다 없어지고요..
그 신랑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기 시작해요.
예수님의 고통도, 예수님의 돌아가심도, 예수님의 아픔도, 예수님의 심판도, 예수님의 말씀도.. 그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 하는 자리.. 이것이 경배에요.
그래서 아가서는..
주님을 알아서 사랑한다 하는 자가 온전히 참 경배자로 가는 과정의 이야기에요.
성경 전체가 사실은 전 그렇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주님이 경배자를 찾는다고 하잖아요.
주님이 신부를 찾는데.. 참 경배자로 존재하는 신부를 찾으세요.
엉성한 사랑을 하는 신부가 아니라.. 이 단계가 성숙한 사랑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가기까지 육적인 광야, 혼적인 광야, 영적인 광야를 거치는 거에요.
그러나 그 광야를 하나님이 용납하셨고.. 하나님이 그 광야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거에요. 이끄시는 거에요.
근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하나님이 99.999… 다 아시고.. 우리의 몫은 0.00000….1..
그게 뭐냐?
“당신 뜻대로 하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어요.
“당신이 맞습니다.” 그게 다에요.
그게 그분이 주님이라는 뜻이잖아요. 예수를 주로 믿으면 이거에요.
그냥 예수를 주로 믿으면 그거 아니에요. 입으로 시인하는거.. 그거 아니에요.
입으로 시인하고 해가지고는 절대로 안 되거든요.
그런 다음에 보세요. 너무 너무 재밌어요.
이제 나의 사랑하는 분이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요.
아가서 1장에서요.. 이 여자가 질문을 했었어요.
너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그게 어디냐? 당신이 어디가서 뭐하냐? 양 떼는 어디서 먹이냐? 하고 물었거든요.. 근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안하세요.
그러시다가 이 영적인 광야까지 끝나고 나니까 이제 알게 되요.
‘자기 동산에 내려가셨구나. 향기로운 꽃밭에서 동산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고 백합화를 꺽고 계시는구나.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기를 원하는구나.’
내가 그 분을.. 나를 보러 달려오라하지 않고, 내가 거기에 함께 들어가야 되겠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해요.
앞에서 말한 그 속하였다의 반응.. 이게 순서가 뒤집혔잖아요.
이제 제대로 된거에요. 질서가 잡힌거에요. 관계의 질서가 잡힌 거에요.
그전까지는 뒤죽박죽이었어요.. ‘내가 앞섰다. 내가 지나쳤다. 내가 주님 앞에 뛰어갔다. 내가 주님보다 더 사랑했다.’ 막 뒤죽박죽이었는데.. 딱 질서가 잡혔어요.
당신은 여기 ↑ 나는 요기 ↓.. 질서가 딱 잡힌 거에요.
내가 당신 안에 당신은 내 안에..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그랬더니 그 다음에 주님께서 여자에 대해서 하는 찬사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쭉 나가다가
“나 사랑한다고 쫓아오는 여자가 너무 너무 많은데.. 너 하나야.”
사랑한다고 그런 사람 무지하게 많아. 근데 너 하나네..
왜냐?
지금 이제 나 위주의 사랑이 아니라.. 그분 신랑위주의 사랑을 하는 자리에 들어와서 그분을 경배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의 전체가 다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진노하심도 아름답고, 나를 광야에 두게 용납하시는 그 자체도 아름답고, 나를 돌보지 아니하심도 아름답고, 내게 이걸 주지 아니하심도 아름답고, 그리 하지 아니하심도 아름답고..다 아름답습니다.” 하는 그 자리에 들어가는 거.. 그게 경배에요.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세요.
“왕비가 60이요, 후궁이 80이요, 시녀가 무수하다. 그런데 너만 나의 비둘기다.”
근데 이게 너가.. 우리 하나님 앞에요.. 나, 목사님, 여기 우리 다죠.. 우리 교회..
영광스런 교회.. 영광스런 교회들이 이 자리에 들어오길 주님은 너무나 기다리세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가장 초라한 여자였어요. 길거리에 포도원 지키는.. 얼굴이 시커먼 여자였어요. 근데 그 여자를 어느 왕후보다 더 가장 아름답고.. 왕후와 귀빈들이 그 여자를 보고 ‘복되다’ 하고 고개를 숙여요.
무엇 때문에요?
온전한 사랑 때문에..
주님 위주의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요.
그러고 나서
2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요.. 옛날에 그 밭이 있었던 그룹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여기는 제 생각에는.. 나처럼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그 귀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내가 교제하기 시작하니까..
옛날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와. 왜 거기 가 있어.” 이 두 그룹이 갈라지는 거에요.
심하게 얘기하면 가라지와 알곡이에요.
그래서 이 차원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 차원에 들어간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어지고요.. 그렇게 되면 마음이 기쁘고요.. 그 가운데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도전하고.. 그러면서 이것을 더 가게 되요.
혼자서는 절대로 못가요.. 혼자 여기까지 왔어요.
그러나 그 다음에는 그 귀한 수레를 탄 백성들을 만나서 함께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가게 되요.
근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나님 위주의 사랑을 하면서 그분에게 온전한 경배를 드리는 경배자에요.
시편 133편 한 번 보세요.
시편 133편에 보면요.. 거룩한 연합에 대해서 나와요.. 거룩한 연합..
우리가요. 귀한 백성들이 모이면 거룩한 연합이 이루어져요.
그러지 않고 요새 세상에서 말하는.. 요새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연합은..
거룩한 연합이 아니라요 야합이에요. 야합.
그래서 요새 기독교인들 중에서 영성운동 한다는 사람들이 천주교하고 손을 잡고 있어요. 야합이에요. 야합.
지금 아가서에 의하면.. 그 귀한 백성들이 누구냐면?
주님 위주로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경배자들이 모이면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시편 133편이 그걸 딱 증명해 보여요. 보세요.
영생이 이럴 때 주어지는데.. 그 기름부음이 어디서 흘러 내려요?
아론에게서요. 모세가 아니고요.
선생이 아니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고, 영적인 리더가 아니라 경배자인 아론..
경배자인 아론.. 제사장인 아론.. 레위 족속인 아론..
레위 족속이요.. 금송아지 섬기려고 사람들이 했던 그 때에..
누가 여호와의 편에 설꺼냐 하고 딱 나왔던 사람들이 레위 족속이에요.
하나님 편에 선 자들..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편에 선 자들..
그들이 그들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기름..
그것을 통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이루는데.. 그것이 하나님 보실 때 영생의 모습이에요. 왜냐?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리에 다같이 있을거니까요.
모든 눈이 하나님에게 맞춰있을 것이지..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거에요.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질투하고, 다투고, 싸우고..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위주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약한 자를 보고 손가락질 절대로 안해요. 소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요.
그것이 마지막으로 아가서 8장에 나오는 마지막 모습이에요.
그 연합이 왜 이루어지냐면요?
아가서 8장에 그러한 신부들.. 그러한 참 경배자들은 이렇게 하기 때문이에요.
이 별볼일 없는데.. 그가 청혼함을 받았어요.
신랑이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서 사랑의 자리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도 삐딱되고, 다리 껄쩍껄쩍하고, 유방이 작아서..
아직도 시집가기게 철이 없는 이 미성숙한 이 자매.. 그 자매를 보면서 손가락질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까.
그 사람의 허물이 보이는 게 아니라 신랑의 소원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신랑에게 초점이 맞춰있고 신랑 위주로 하다보니까..
판단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리고요.. 그렇게 세워주기 위해서 가게 되요. 그러니까 연합이 이루어져요.
왜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눈길이 주님에게만 다 향해있기 때문에요.
이 길이 경배자에요.
경배한다는 사람..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이 소원하는 사람들을 판단 할 수가 없어요. 욕할 수가 없어요. 약하지만 그를 향한 주님의 소원을 바라봐요.
흠 투성이이지만..주님의 소원대로 ‘너는 아무 흠이 없구나’ 로 보면서..
그의 약한 면에 판자를 달아주고, 은망대, 성벽 다 세워주게 되요.
그래서요 진정한 신부들이 모이면.. 그 가운데서 불협화음 없어요. 잡음 없어요.
잡음이 있는 이유?
아직 우리가 그 자리에 가지 않아서 그래요.
주님이 약속하셨어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면?
그분이 보기에도 내가 평강을 얻은 자 같아요. 그러고 나니까..
여자가 어떻게 되냐면요?
“솔로몬! 당신이 받을 만한 일천 그거 다 받으세요. 그거 받으시는 거 내게 기쁨이에요.
열심히 일한 저 일꾼들 또 이백냥의 상급 받는거.. 그거 내게 기쁨이에요.. 그것 때문에 나는 저걸 못 받아서
전전긍긍하거나 억울해하거나 그러지 않을 꺼에요. 다 가지고 다 갖고 다 가져가세요. 그거 욕심내지 않아요.
왜냐면요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면 되니까요.”
그게 평강이에요.
남이 이백 받은 거 때문에 내 마음이 들썩들썩하면 평강이 없는거에요.
아직도 남에게 초점 맞춰있고, 나에게 초점 맞춰있고, 주님에게 초점 맞춰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거든요.
이게 평강을 가진 자의 모습이구요..
이렇게 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아요. 그런 후에 기가막힌 이야기가 있어요.
이 동산이 제가 보기엔 에덴동산 같아요.
이제 드디어 주님이 창조때부터 원했던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에덴동산의 자리에 들어간 그에게 주님께서..
“이제 나한테 기도해. 내가 너 소리 듣기 원해. 내가 너 기도 들어줄께. 니가 하는 기도는 무엇이든지 그 입에서 나오는 건 내 뜻대로 하는 기도일꺼야. 왜냐하면 너가 나에게 초점 맞춰있고, 내 위주의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너가 구하는 기도는 다 내뜻에 맞는 것일꺼야.”
‘그의 뜻대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들으신다.’
그랬더니 이 여자가 이제 구하는 거 딱 하나 밖에 없어요.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 기도 밖에는 없어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성령과 신부가 되는 기도에요.
저는 경배자로 살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그것 때문에 몸부림을 치며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런 말씀이 그렇게 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다른 부르심이 있는 목사님들은 이것을 또 다르게 보실 수 있어요.
그것도 옳고, 제가 보는 것도 틀리지 않아요.
하나님은 이렇게 크고요. 각자는 요만큼 티끌도 못한 것만큼 붙잡는 거에요.
근데 이거 가진 사람이 이쪽에 이거 가진 사람보러 “틀렸어” 이렇게 말을 못해요.
난 요거밖에 모르는데.. 요거 아는것 나눌 뿐이에요.
저는 요걸 알고요 그분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나누는 거고요.
제 삶에서 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모든 걸 다 하셨어요.
제가 여러분 앞에 서서 이렇게 설교할 만한 존재가 못 되요.
제가 이렇게 말할 때 무슨 권위가 있겠어요. 제 입에..
근데 여러분이 눈 동그랗게 뜨고 듣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이 과정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저의 나누는 말이 왜 저렇게 권위가 있을까?’
그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 알아요?
아버지를 죽도록 사랑하는 것.. 그 권위에서 와요.
그 죽도록 사랑하는게 뭐냐?
아버지 하는 말만을 내가 하겠다. 극한 겸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버지의 말이에요.
권위가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자기 생각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거든요.
주님이 주신 소원은 그거였어요.
내가 그들을 시편 45편에 나오는 존재로 높이 들기 원한다.
사람들이 보는 그런 높이들림이 아니라 내가 볼 때 가장 높은 정상에..
내가 가자고 하는 몰약산과 유향산에 올라간 자들..
나 위주에.. 하나님 위주에 사랑을 하는 그런 사랑에 절정에 가는 경배자들을 내가 만들기 원한다.
그래서 그들의 공동체가 진정한 연합이.. 아름다운 연합이 이루어진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시편 45편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아가서에서 그 여자가 ‘당신의 전체가 다 아름답습니다.’ 라고 고백한 경배가 있었어요.
내가 내 사랑하는 그분에 대해서 내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내 혀가 달달달달 나간다. 이거에요.
그분을 사랑하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그분의 아름다움이 너무 많아서..
이러면서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움을 쭉 ~ 열거해요.
쭉 9절까지 열거한 다음에.. 이제 왕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해요.
이게 숙제죠. 이게.. 그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집을 돌보지 마라. 아비 집을 돌보지 마라.. 그 소리가 아니라 내가 내 것으로 움켜 잡고 있는 것에서 이제 떠나 나오라는 거에요.
그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주님의 음성이 여기에도 있는거죠.
“니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철저하게 사랑하는 신부에게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게 뭐냐?
경배.
그랬더니 12절부터 아까 아가서에서 말한 축복이 주어지기 시작해요.
이런 일들이 막 일어나기 시작해요.
그러나 이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건 그냥 주어지는 거에요. 여기에 관심을 두면 안되요.
주님이 그냥 주는 거에요. 없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주셔요.
주님과 동행하는거.. 주님 위주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거
내 위주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제가 지금 가고 있는 길.. 그것에 의거한 아가서를 나눴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된 여자들의 모습이 아가서 8장 6절에 나와있는 모습이에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너의 나를 사랑함도 나를 바라보면서 나 위주로 하고..
너의 섬김도 나 위주로 하라. 니 위주로 하지 마라. 인 새겨라.
너는 내 것이다 하는 너의 사랑도 이 모든 것도 내 것이다 하는 인을 새겨라.
주님이 그렇게 아가서에서 말씀하세요.
그게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호와의 불’ 이라고 하는거.. 우리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요..
우리 가슴이 주의 사랑으로 뜨거워지는게.. 여호와의 불이에요.
하나님! 우리에게 죽음보다 강한 사랑 주세요.
많은 물이 끄지 못하는 그 사랑을 우리 가슴에 새겨주세요.
우리 심장에 인 새겨주세요.
우리 팔에 인 새겨주세요.
이것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세요.
하나님! 내 소원이 아니라 당신의 소원이에요.
사로잡으소서. 내 떨리는 심장.
온전히 주님의 것 되도록 사랑의 인을 치소서.
주의 숨결로 새롭게 하소서. 거룩한 주의 임재 안에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
죽음 보다 더 더한 사랑으로 많은 물이 끄지 못하는 사랑의 인을 치소서. 주의 사랑을 내 연약한 팔에 새기소서.
주님의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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