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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다음 차원의 사랑(경배자로 서 가는 과정 2)Fam Worship 2024. 4. 17. 11:00
첫번째, 육적인 광야
지금 이 여자가 그분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분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그분을 위해서 내 포도원을 지키기를 원하고 그러는데.. 주위의 환경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요.
나의 오라비들이..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미워해서 포도원에서 포도원지기로 일이나 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나는 신랑을 사랑하고 싶은데.. “여기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 라고 말해요.
나는 그분을 사랑해서 “사랑합니다.” 하면서 이렇게 나가고 싶은데..
예를 들면 교회에서 “그냥 이렇게 일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거야 이렇게 해.” 라고 막 밀어붙이게 되요.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자기 마음에 있는 이 사랑을 지키지 못하게 되요.
점점 지쳐버려요. 점점 지치고 그 부담 때문에 멍에 같이 무거워지고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리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를 바라보면서 주님은 말씀하시죠.
“너 그렇게 힘들지. 그래도 아름다워. 그래도 나를 사랑하려는 너의 마음을 내가 알아. 그것도 귀해.” 하고 이야기 하세요.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무슨 말이냐면? 바로의 준마는 신부가 되지 못해요.
바로의 준마는 바로의 사랑을 그렇게 받아도 결국은 준마에요.
결국은 일꾼이에요. 결국은 그 신랑을 태우고 다니는 도구에 불과해요.
지금 이 사랑에 담겨 있어서는 신부가 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칭찬하시는거에요.
“니가 바로의 준마처럼 진짜 충성하고 있다. 정말 애썼다. 내가 가자하면 가고 그렇게 다 했다. 귀하다. 그런데 그 바로의 준마를 내 신방에 데려갈 수는 없다. 내가 바로의 준마와 결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줄려하는게 있다. 금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어서 너에게 주겠다.”
그렇게 약속을 하셔요.
그 다음 단계로 데려가겠다고 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어떤 특별한 말씀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깨달음..
하나님의 사랑의 그 찬란한 빛을 다시 보여줌으로 내가 그 다음 차원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하시는 거에요.
근데 그 때 문제가 뭐냐면?
이 여자의 반응이 문제에요. 이 여자가 이렇게 얘기해요.
이 3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뭐에요?
바로 ‘나’에요. 나, 내 위주에..
나에게 이렇고, 나에게 이렇고, 나에게 이렇고..
그냥 그분이 그렇고, 그분이 그렇고, 그분이 그렇고.. 그분 자체로써가 아니라..
나에게 이렇고.. 나에게 이렇고.. 나에게 이렇고..
여전히 나 위주의 사랑이에요.
내가 주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서.. 내가 맘이 평강하기 위해서..
내가 조금 더 어떻게 되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에요.
아직은 나 위주에요.
이 사랑이 악한 것도 아니고.. 이 사랑이 추한 것도 아니에요.
그냥 어린 사랑일 뿐이에요. 그러나 보석처럼 귀한 사랑이에요.
왜냐면 그 사랑이 없으면 성숙한 사랑으로 갈 수가 없어요. 이 사랑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귀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에요.
“내가 금사슬로 달아줄께. 그래서 그 다음 사랑으로 가게 해 줄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건 “그 사랑 틀렸어. 어떻게 너는 니 위주의 이기적인 사랑을 하냐.” 아니에요.
“귀하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로 가자.” 라고 말씀하신 후에 이제 끌고가세요.
거기서부터 이 육적인 광야는 이제 그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요.
그 다음의 차원 2장을 보면..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약간의 평안이 있어요. 사랑이라는 차원에 들어왔기 때문에..
약간의 평강이 있어요. 약간의 안식이 있어요.
그러나 아직 온전한 건 아니에요.
평강을 받았는데.. 평강이 활성화 된다고 해요.
평강이 있는데.. 그 안식이 활성화 되서.. 내 안에서 활성화되서..
그것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야 되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 평강이 있기 때문에 흔들림 없는 자리에 가야 되는데..
아직은 이것을 주님이 주셔서 거기에서 안식도 해봤지만..
상황에 부딪치면 평강이 흔들리고 깨지게 되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아아! 예수를 열심히 믿기는 한데.. 어려운 상황이 오면 좀 힘들어하는구나.’ 라고 그냥 봐주면 되요. 괜찮아요.
아직은 그런 단계일 뿐이에요.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그러죠.
어리지만 보석같이 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단계..
그 하나님은 거기서 이제 그 다음 위험부담을 안고 내려가시는데..
그것이 뭐냐?
혼적인 광야로 이제 끌고가시는 거에요.
그런데 그 상황 가운데서 주님은 전전긍긍 이 여자를 창틀 밖에서 바라보시면서 상태가 어떤지 계속 보고 계세요.
‘어디까지 갔나.’
그러면서 지금 보는 건 그거에요.
‘자기 모습 좀 그만보고.. 나를 좀 봐서 나랑 좀 눈이 마주쳤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창 밖에서 계속 바라보는데..
이 여자는 자기의 모습 바라보느라 눈 밖을 쳐다볼 여유가 없어요.
나의 엔게디, 나의 품에, 나의 이거.. 하느라고 아직 그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은 밖에서 계속 “눈 좀 맞춰라. 눈 좀 맞춰라.” 이러고 있어요.
그러다가 뒤에 나가면..
“어머나! 놀래라. 니가 나를 한 번 바라보니 내 마음이 붙들려서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 하는 장면이 나와요.
왜냐하면 그때까지 호시탐탐 ‘언제 눈이 마주칠까’ 하고 보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아직은 나 위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눈을 돌려서 주님과 눈을 맞춰주질 않아요.
그러면서 그냥 이렇게 얘기하죠. “날 보세요. 나에게 말씀하세요.”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냐면.. “잠깐 창 밖 좀 내다봐.”
그거 안하고 있는 단계..
왜냐하면 나로 가득차 있어서 그래요.
악한 건 아니에요. 연약할 뿐이지요.
주님께서 그래서 10절에서 이제 나가세요.
이제 혼적인 광야로 끌고 나가세요.
두번째, 혼적인 광야
“제발 니 얼굴을 나에게 좀 맞춰다오. 나를 보면서 내 앞에 기도하지만.. 내 얼굴과 마주 대하고 있지 않는 니가 나는 가슴 아프다. 내 얼굴 좀 쳐다봐라. 너 혼자 허공을 바라보면서 ‘주님 사랑해요’ 라고 고백하지 말고..
내가 들리게.. 내가 원하는 내 스타일로.. 나에게 초점을 맞춘 사랑의 고백으로 이제 나에게 가자. 그 소리가 나는 사랑스럽다. 그걸 내가 기다린다.”
이렇게 말씀하시거든요.
그런데 여자는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주세요.
그 작은 여우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안에 있는 이 감정적인 요소들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밖에서 작은 여우가 타고 들어오는 것 같지만.. 이 작은 여우.. 밖에서 들어오는 건요..
이미 우리를 흔들지 못해요.
이 작은 여우는.. 내 안에 있는 작은 여우..
큰 여우가 아니고 그래서 작은 여우에요.
내 안에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주님에게 올인하지 못하는 그 작은 여우..
내 감정에 사로잡히고, 내 문제 속에서 나를 내가 평가절하시켜서..
주님을 바라볼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그 작은 여우들..
‘내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해. 주님은 나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애. 그렇지만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은 해. 그런데 주님이 내가 사랑한다는 건 듣기는 하실까?’ 그러면서 여전히 나에게 집중해요.
‘그럼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으면 왜 이 상황은 아직도 이런거야?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수십번도 고백했어. 수백번, 몇 년 동안 했는데..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거 해결되야 되잖아. 근데 왜 아직 이런거야?’
그러면서 주님에게 말해요.
“이 작은 여우 잡으세요.”
근데 주님이 볼 때는 “그 작은 여우.. 니 속에 있어. 니 생각이야. 너 자체야. 그러니까 그 작은 여우 하지 말고, 너가 숨어있는 거기서 나와. 나와 같이 가자. 내 손을 붙잡아. 거기서 나와. 나를 바라봐. 내 얼굴을 봐.”
이렇게 얘기하면서 손을 내미시는데.. 이 여자는 가지를 않아요.
가지 않고 핑계 대요. “작은 여우 때문에 안 돼.”
“부모에게서 내려온 저주 때문에 안 되요.”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 사랑 못 느껴요.
아버지가 나를 그렇게 안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감각이 난 그렇게 없어요.”
이렇게 핑계 대요. 핑계에요. 절대로 핑계에요.
주님의 사랑은 그런 모든 것들을 이기고 삼키고도 남아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가계가 쫙 나오잖아요.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우리는요.
우리 할아버지의 가계에 속하지 않아요.
우리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 속했어요.
대대로 흐르는 저주가 나에게 절대로 힘이 없어요.
이제 그런 것 때문에 넘어지면서 그런 핑계대는 작은 여우들.. 다 없애야 되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 신랑에게 “당신이 없애주세요.” 라고 말해요.
그분이 못 없애요. 내가 없애야 되요. 그건 내가 버려야 해요.
그것을 붙잡고 있는 것도 모세의 아내 같은 거에요. 핑계에요.
내 아픔이 나로 하여금 주님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핑계로 딱 잡고 있어요. 내 스스로 쌓아놓고 있는 거에요.
그 작은 여우를 주님한테 없애라고 하지 않고, 내가 내려놔야 되요.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마태복음 13장에 주님께서 땅에다가 씨앗을 쫙 뿌리잖아요.
옥토에 뿌리고, 가시밭길에도 뿌리고, 돌짝밭에도 뿌리고, 길거리에도 뿌려요. 세상에 씨 뿌리는 사람은요.. 길거리에 씨 안뿌려요.
세상에 씨 뿌리는 사람은요 가시밭 길에 절대로 씨 안 뿌려요.
근데 하나님은 거기다가 뿌려요.
왜?
하나님은 세상의 씨 뿌리는 사람하고 다르거든요. 소망을 가지세요.
가시밭에서도 열매가 나길 기다려요.
근데 가시밭과 돌밭이 해야되는 것이 있어요.
흙이 스스로 옥토가 될 수 없어요.
근데 그 말씀을 가지고 너희 밭이 옥토가 되야 된다.
흙이 혼자서 어떻게 옥토가 되요?
가시밭길이에요. 가시가 하나 가득해요. 그런데 씨앗을 뿌려요.
이 흙이 가시를 내어놓아야 되요.
이 흙이 돌을 움켜쥐지 않고 그 잡고 있던 돌을 풀어야 되요.
그래서 그 흙을 갈러왔을 때 그 돌이 뽑혀 나가야 되요.
근데 흙이 돌을 꽉 쥐고 안 놓는 거에요.
그러니까 씨앗을 뿌렸는데 이 열매를 못 맺어요.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흙보러 옥토가 되라고 하는데.. 옥토가 되는 방법을 모르죠.
내가 돌이 있으면 그 돌을 치우라고 내어 드려야 되요. 작은 여우에요.
하나님은 소원을 가지고 이야기하시거든요.
소원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리세요.
우리 얘기 아니에요. 주님의 얘기에요.
주님이 눈물을 흘리며 가시밭길에도, 돌짝밭에도 씨를 뿌리세요.
그리고 거기서 열매가 나길 기다리세요.
그러면요 가시밭길에 있는 이 못난 흙이 이제 그 가시를 ‘내꺼 아니야.’ 풀어놓으면.. 주님이 걷어가시고 열매가 나게 되 있지요.
그런데 그 가시와 돌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여우..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혼적인 요소들이에요.
나의 과거, 나의 아픔, 나의 욕심, 나의 핑계.. 그런 것들이에요. 죄는 아니에요.
그러나 주님과의 사랑을 가로막아요.
회개라고 하는 것이.. 땅을 치면서 “나는 죄인~” 이거 아니라고요.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을 다 벗겨내는 것이 회개에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뿌린 씨와 열매를 내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이 가시와 돌 때문이에요.
그걸 내가 부둥켜안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걸 도려내야 되요.
주님이 도려내실 때.. 풀어드려야 되요.
할례.. 바로 그거거든요. 다 연결이 되요.
그래서 이렇게 하는데.. 이 여자는 이렇게 말해요.
작은 여우 잡으라고 핑계대고..
이거 주객이 전도 됐어요.
주님이 내게 속했고, 내가 그에게 속했다.
이게 순서가 바뀌어야 되요.
내가 주님에게 속했고 그분이 내게 속했다지..
어떻게 그분이 내게 먼저 속할 수가 있어요?
이건 나 중심인거에요.
나 위주로.. “하나님! 나에게 속하세요. 하나님! 내 편드세요.” 그 소리에요.
내 위주의 사랑이에요.
하나님 위주의 사랑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거. 내가 하나님께 속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3번의 광야를 거치면 맨 마지막에 이 여자가 드디어..
“나는 그 분에게 속해요.” 고백하는 자리로 가요.
근데 가지 않으니까 3장.. 드디어 그 광야가 시작이 되요.
주님의 임재도, 주님의 사랑도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 와요.
답답해지는 상황이 오기 시작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혼적인 광야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나는 찾아오리라.”
그 광야 때문에 이 여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길거리에 나가서 그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시작해요.
이전에는 “내가 있는 곳에 당신이 오셔요. 당신이 내게 속했고, 나에게 엔게디 꽃 같은 분이니까 여기 오세요.” 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겸손하게 그분을 찾아가기 시작해요. 추구하기 시작해요.
그분을 갈망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분을 만났어요.
이제 그래서 그분하고 사랑에 다시 빠지고, 만나서 이제 신나가는 그 다음 단계가 시작이 되요.
“혼적인 광야 끝났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여자의 고백이 나와요.
세번째, 영적인 광야
왕이 가진 모든 권위와 능력이 이제 보이기 시작해요.
영적인 욕심이 생겨요. 왕이 가진 모든 능력과 권위가 보이기 시작해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여기까지 뛰어왔는데.. 2번째 혼적인 광야를 지나서..
이제 그 분을 만났더니.. 이전에는 몰랐는데.. 그분이 가진 능력이 굉장한 거에요.
그분이 가진 그 부요가 굉장한 거에요.
그것에 대한 영적인 욕심이 생기기 시작해요.
가난한 예수 싫어요. 그래서 그걸 추구하게 되요.
그래서 주님은 할 수 없이 영적인 광야로 데려가실 수 밖에 없어요.
4장에 보면 주님께서 그래서 그렇게 영적인 욕심이 높아가는 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요.
너는 내가 그렇게 능력이 많고 권위가 있는 자로 보이지.
내게 가진 부요만이 너는 보이지.
그런데 내가 갈 길은 몰약산과 유향산이야.
난 죽으러 가는 거야. 난 가난한 구주야. 난 죽임당한 어린양이야.
너에게 능력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함께 죽자고 왔어.
이 여인은 그게 싫어요. 싫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초청해요.
주님이요 너무 불쌍해요. 흠이 있거든요.
근데 “흠이 없구나.” 이러면서 앞으로 될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막 소원하세요.
시몬아! 너는 베드로야. 베드로야. 베드로야. 그러다가 보니까 베드로가 되요.
우리 주님의 마음이요 처절해요. 처절해요.
저는 이걸 읽으면서 이 앙큼한 속이 보이는데.. 주님은 그걸 안 보세요.
안보시고 오히려 이렇게 말해요. “너는 흠이 없구나. 정말 순전히 아름답구나.”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초청해요.
아까 창틀 앞에서 계속 들여다보시다가.. 이 여자가 이제 혼적인 광야를 거치고 길거리에 나가서 막 찾아서 눈이 한 번 마주쳤어요.
그랬더니 주님이 “와! 날 보지마라 보지마라. 놀랬다. 놀랬다. 놀랬다. 내 마음이 뺏겼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된다고 얘기하거든요.
주님의 겸손함은요.. 한량이 없어요.
뭐 우리 이 별볼일 없는 눈으로.. 그 분을 한 번 쳐다보는게 뭘 그렇게 좋으셔서.
왠 줄 아세요?
워낙 안 쳐다보니까. 워낙 안 쳐다보니까.
말씀을 듣고 앉아 있어도 그분의 눈을 안 보고..
기도하러 나와서도 그분의 얼굴은 안 보고..
‘주님 날 보세요’ 이것만 관심있지.. 내가 주님을 볼려고 하지는 않거든요.
나 위주거든요.
근데 주님은요.. 제가 거듭 말씀드려요. 악하다고 말 안해요.
“그래도 아름답다. 흠이 하나도 없다. 네가 흠이 하나도 없어서 이제 내가 너를 위하여 죽으러 갈꺼다. 그러면 이제 내 마음 알꺼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시죠. 12절.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건.. 제가 제 나름대로 하나님이 저에게 개인적으로 제 삶의 광야를 통해서 가르쳐줄 수 있는 이 아가서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하고 많이 달라요.
다른 분들은 그냥 이걸 신나는 사랑의 이야기로 보지만.. 저는 그렇게 안 보이고요..
초점을 신부에게 두고 있지 않고, 저는 신랑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보는게 각도가 달라요.
왜 다른 사람하고 다를까?
주인공을 저는 신랑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신랑의 심정에다가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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