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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Fam Worship 2024. 4. 19. 16:00
전 여러분들께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눈물의 자리에 멈춰있어도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그런 가난한 구원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
입맞춤의 눈물을 흘리는 자리로 데려가십니다.
그러나 그 시작이 어딘가가 중요하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입장.. 우리의 입장과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입장..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이 하나님 마음대로 운행하심, 하나님 뜻대로 역사하심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물결과 그 파도를 타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파도에 하나님이 억지로 끌려오는 것.. 그것이 아니에요.
그걸 이야기 합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실래요..
하나님의 눈물에 사로잡히고 하나님때문에 울면서.. 저같은 사람은 좀 부끄럽지만.. 저에게 남겨진 단 하나..
저의 집까지 포기하는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 받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까지도 내가 붙들고 끈끈하게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러나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사랑하다가 사랑하다가 그 자리에 간 것이지..
그것을 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가운데에 하나님은 거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가운데에 하나님은 거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본문에서 여러가지의 이야기를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에 집중을 하기 원합니다.
본문에 12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 새 라고 나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며 하나님의 궤가 들어오면 오벧에돔의 집처럼 복이 임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말도 맞아요.
그러나 우리가 이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건..
사랑하는 대상의 마음이 어떻고, 그분의 뜻은 어떻고, 그분의 입장은 어떤가 하는 걸 보는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어요.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의 입장에서.. 내가 복 받는 게 중요하며, 이 본문을 보면서 오벧에돔의 집처럼 내 집에 여호와의 궤가 들어오면 나도 복을 받아 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오벧에돔의 자리에 나를 두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내가 만약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하면 이건 다르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와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참 내용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이 본문을 얘기하기 전에 이런거죠.
주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무덤에서 그를 꺼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내가 나사로의 입장에서..
죽음에 있는 나를 꺼내신 예수, 그렇게 해서 은혜받을 수도 있고..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무덤에 있는데 그를 일어나라 나오라 풀어주라 하면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알면서도 3일동안 가지 않았던 주님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울던 마리아의 앞에서 애통해하시던 주님의 마음이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사람들이 그렇게 통곡하고 있을 때 거기서 그것을 보면서 우신 주님의 심정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경의 전체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것을 볼 수 있는 은혜에 우리를 데려간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포기하고 그 분의 마음으로, 내 뜻을 포기하고 그 분의 뜻으로, 내 힘을 포기하고 그 분의 힘으로, 내 목숨을 포기하고 그 분의 뜻으로, 내 힘을 포기하고 그 분의 힘으로, 내 목숨을 포기하고 그 분의 목숨으로..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어떻게 보이냐면 이렇게 보입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보내주신 이유가 뭐냐면?
그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줬다는 이야기가 다윗의 귀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여기 본문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사람들이 가서 다윗에게 “오벧에돔의 집에 궤가 들어갔더니 복을 받았대요.” 라고 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듣고 다윗이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그 궤를 집으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동안 복을 준 건 굉장히 기쁜 일이죠.
그러나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본다고 한다면..
얼마나 다윗의 집에 들어가길 원하시면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동안 복을 줘서라도 그 말이 다윗의 귀에 들어가서 다윗이 여기와서 그 궤를 기쁨으로 가져가게 하시려는 그 주님의 소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과연 이 주님의 소원은 어디서 왔을까?
왜 주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다윗의 집에 가시려고 하실까?
왜 그 동네에 들어가시려고 하실까?
그 동네에 들어가기 위해서 오벧에돔의 집에 보내줘서라도 그 소문이 다윗의 귀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이제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그걸 가져가게 하는 하나님의 열심..
과연 그 열심이 어디서 왔을까?
도대체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시기에 이렇게까지 일하실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소원이 뭐냐면?
여호와께서 들어가셔야 하는 그 영원히 원하시는 그곳에 들어가서 거기에 거하시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들어가시기를 원했던 곳이 시온 곧 다윗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그 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소원은 거기로 향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펴길 원하는데..
그렇게 펴지 못하도록 이 법궤가 빼앗김을 당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마음은 그 법궤가 오랫동안 돌아다니는 동안에 하나의 소원..
“내가 거길 들어가야 되겠다. 내가 거길 들어가야 되겠다. 내가 그것을 원한다. 내가 거기 들어가서 나의 처소로 삼고 싶다. 들어가서 내가 쉬고 싶다.”
근데 그 소원을 아는 자가 다윗이었어요.
이것에 대해서 여호와의 이 오래된 소원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소원은 이것이었죠.
사람들 가운데에 자기의 장막을 펴시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냐가 문제죠. 어떤 사람들이냐?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하나님의 소원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 들어가셔서 거기 안식하시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소원이셨어요.
그래서 다윗의 성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오벧에돔..
오벧에돔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모르겠어요.
오벧에돔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 않으니까요.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궤가 잠깐 머물렀을 때에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동안 말할 수 없는 복을 주셔서 그 복에 대한 이야기를 다윗이 듣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모든 두려움에서 일어나서 이제 그 궤를 가져가게 하는 자리까지 이끄시는거죠.
왜?
하나님의 소원이 거기 들어가시기 원하는 것 때문에 그러죠.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원하시죠.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궤가 다윗이 가지고 들어올 때까지는 방황하고 있었어요.
그 방황이 지금 사무엘하 6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방황이 언제 시작됐냐면?
사무엘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무엘상에서부터 오랫동안 하나님의 법궤가 바깥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으로 돌아다니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궤가 그렇게 빼앗기게 된 이유..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 시작이 어디에 있는지.. 이 역사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전에도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는 지금 이 다윗의 시대 그 전까지의 이야기만을 봅니다.
이 소년들이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없기 때문이에요.
진정 여호와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그 제사드리는 고기를 삶은 그 장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함부로 하지 못해요.
이 악이 더 가서 어디까지 가냐면요?
고기 덩이를 몇 개 꺼내던 죄가 이제 여기까지 가게 됩니다. 이 일도 뭐냐?
여인들과 동침하는 그 자리에서 여호와의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러죠.
무엇이냐? ‘여호와가 보지 못해.’
이것이 여호와를 경홀히 여기는데 이것이 어떠한 모습인지 시편 115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지 못해. 여호와께서 듣지 못해. 여호와께서 말도 하지 않으셔.’
엘리의 아들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 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우상취급한거죠. 여기 115편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상을 만들어놓고.. 우상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니까 그 앞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엘리의 아들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긴다..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 하나님은 보지 못해. 느끼지도 못해. 만지지도 못해. 말하지도 않아.
마음대로 고기를 꺼내고 마음대로 여자들과 동침하면서 그걸 불꽃같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죠.
왜?
하나님을 우상취급함이에요.
우상을 취급해서 그것을 보는 자와 그것을 만드는 자와 다 그와 같다.
그러니까 엘리의 아들들이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거에요.
“교회여! 성령이 교회에 하는 말을 들을지어다.”
왜 듣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우상취급하면서 ‘하나님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해. 괜찮아. 이렇게 해도 돼.’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을 멸시하는 경배를 계속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를 계속하고 있을 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배하는 줄 알았겠죠. 제사드리는 줄 알았겠죠.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전쟁이 나게 되요.
하나님의 궤가 빼앗김을 당했어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나서 ‘하나님의 궤가 빼앗김을 당했어’ 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것을 본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김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그곳을 떠나신 것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그곳을 떠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우상취급하는 그곳에 하나님은 더이상 머물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레미야 7장에도 이렇게 말해요.
실로에서 여호와께서 어떻게 행한 줄 아세요?
시편 78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고, 이렇게 하시고, 광야에서 이렇게 하시고, 사막에서 살리시고, 물을 주시고, 너희를 위해서 대적을 물리치고, 이것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궤가 빼앗겨진 게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그곳을 떠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경배받아야 되는 자리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고 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본다면..
그러나 하나님의 생생한 불꽃같은 눈과 하나님의 은혜를 만홀히 여길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 거하실 수 없어서 떠나신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고 나면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에스겔서 8장을 보시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 안에서 얼마나 우상숭배하는 일이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시작하십니다.
근데 이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픈 것은 우리가 쓰러지고 우리가 다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픈 상처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아픈 상처를 에스겔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을 보여줄 때.. 그것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한다라고 말한 것이 에스겔서 8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행한 가증한 일 때문에 내가 스스로 이곳을 떠나노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수모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수모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떠나시는 이유가 뭔가?
이 에스겔서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거룩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향연은 기도를 말하죠.
우리 기도 목숨을 걸고 해야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하나님에게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써 운행하시는 것..
거기에 주님의 그 움직이심에 그 파도에 몸을 실은 그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고 하나님 앞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기도..
하나님을 우상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생하게 알고 계시고, 모든 문제를 다 보고 계시고, 모든 해결점을 가지고 계시고..
그분께서 이미 운행하고 계시고, 그분에게 기도하면서 그분이 어디로 움직이시는 것을 보고 그에 따라서 기도하는 것..
하나님은 더이상 내가 정해놓은 어떤 심부름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해놓은 것을 하나님에게 구해서 그것을 따라오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가고 계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순응하고 그 파도에 몸을 실는 것..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인들이 앉아서 뭐합니까?
울고 있어요. 거룩한 눈물이 아닙니다. 담무스를 위하여 울고 있습니다.
울면서 중보기도하고, 울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있어요.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하고 있는지.. 왜 울고 있는지..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울고 있는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 때문에 기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정해놓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거룩한 것을 받으시죠.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들을 찾으시죠.
그들 가운데 거하시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생령.. 그것으로 살아가는 자들..
내 마음을 다하는 것은 내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교회에 완전한 리더들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 제사장들을 이야기합니다.
요엘서 (2장 17절)에 보면 이들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제사장들은 낭실과 제단 사이에서 통곡하며 울지어다.
왜?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는 이 하나님의 아픔때문에 울지어다.
하나님의 마음에 동행할 자.
이 모든 일 때문에 아까 8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모든 가증한 일 때문에 내가 나의 집에서 나간다. 내가 떠난다.”
예레미야 7장에서도 “내가 떠난다. 내가 떠난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여호와는 절대로 떠나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여호와는 ‘여호와의 집’ 이라고 문패를 건 모든 교회마다 모든 모임마다 거기 들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건 “아니, 내가 거기서 나가리라. 내가 떠난다. 떠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를 우상취급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왕으로 하나님이 왕이시기에 왕이 하시는 그대로 따라가겠다고 하지 아니하고..
너희가 정한 땅에 나를 묶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이때부터의 아픔이 주님으로 하여금 요한계시록 3장에서 그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죠.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거기 들어가서 너희와 먹고 마시리라. 너희끼리 먹고 마시는 것이 힘들고 지치지도 않았느냐?”
어쩌면 주님은 지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보며 그렇게 이야기 하시는지 모릅니다.
너희끼리 먹고 마시고 너희들끼리 입고 너희들끼리 춤추고 너희들끼리 노래하고 하는 것이 이제 힘들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느냐?
보라 내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지 않느냐?
나로 하여금 거기에 제발 들어가게 하라. 나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내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게 하라. 나는 거기 거하는 것이 내 소원이니라.
그러나 주님의 딜레마는 그거죠.
우리가 자원하여 문을 열기 전까지는 들어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으로 다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까 예레미야에서, 에스겔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그 거짓말을 믿지 말라.
문패가 걸려있는데 그 집안에 들어가보면 주님이 없어요.
그런데도 문패가 걸려있죠.
제가 2014년도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1년동안 눈물을 흘리며 울었어요.
무엇을 아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억울하시죠.
그런 바보같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1년동안 울었어요.
전에 말씀드렸죠. 에스겔서 9장 4절.
그렇게 애통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인을 치라. 그리고 그 이마에 인을 친 자들을 절대로 해하지 못하리라.
구별된 자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픔으로 함께하는 자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이 소원인 자들..
그들을 주님께서 찾으시죠.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에 너무 들어오고 싶은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다 들어오시고 싶으신데..
그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께서 마태복음 18장 20절에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두 세명만 모여도 내가 거기 있을거야.”
그렇게 말씀하셨죠.
우리가 그 말씀을 가지고 두 세명이 모여서 중보기도하면서 우리 두 세명이 주의 이름으로 모였으니까 주님 여기에 계십니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우리 마음대로 중보기도 하죠.
주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무엇입니까?
두 세명만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거기에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소원이 과연 무엇을 말합니까?
그 두 세명이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해서 모이는 것을 이야기하죠.
거기에 모여서 만약에 우리가 다른 것들을 구하고, 나의 욕심을 구하고, 내가 받아야 할 무엇을 더 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만약에 우리가 두 세명이 딱 모였는데..
부부 둘이 앉아서라도.. 부부 둘이 거실에 앉아서 기도한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히 되기를 원하는 그 소원 하나로 기도하고 있다면 거기에 여호와께서 임하십니다.
이 예배에 5명, 10명이 나와서 정말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는 그 소원 하나로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울고 있으면.. 여호와는 이자리에 임하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혹시 우리는 여호와의 전에 주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모인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것을 구하면서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때는 악하고 마지막 세대로 가고 있어요.
하나님은 지금 사람들을 찾으시는데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계실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 천명이 모인 교회라고 해서 믿지 마세요. 만명이 모인 교회라고 해서 믿지 마세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리라고 믿지 마세요.
어쩌면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미 발걸음을 옮기셨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문 밖에서 애절하게 매주, 매일 문을 두드리고 계실지도 몰라요.
이런 얘기를 아무데나 가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주님은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하는 거.. 끊임없이..
그러나 주님께서 들어오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 가운데에 어떤 우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쩌면 우상을 바라보는 눈길로 우상에게 앞에서 하는 그런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앉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리에 들어오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정말 살아계시다고 생생하게 믿는다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진정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기도문의 기도가 그 처음 시작이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들을 보고.. 제사 지내는 모든 행위를 보고.. 도저히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보신 다음에 그분께서 이야기 하시는 것..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원한다고.. 그것이 그분의 가장 처절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우리가 모이면 그것을 위해서 모여야 하고, 우리가 만나면 그것을 위해서 만나야 하고 우리가 기도를 하면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에 들어오셔서 좌정하시고..
그러면 여호와의 집이 되고..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있는 것처럼 그러한 은혜가 이 자리에 가득하게 되고..
이 자리에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자리에 사람들이 들어오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고, 만지시고, 다 치료하세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타자를 쳐서 모든 사람들을 움직이시고..
그것을 우리가 지금 이 마지막때에 봐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이 우상이 제거될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이 우상을 없애기 위해서 철저하게 열심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상이 어느 곳에도 서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말도 못하게 열심히 일하십니다.
유대인들이요.. 역사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둘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들이 유월절 행사를 할 때면 지금도 유월절 맨 마지막 행사에..
엘리야의 컵과 그릇을 준비해 놉니다.
“엘리야가 와야 메시야가 온다.” 그렇게 엘리야를 그렇게 받들고 있어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세례요한이 이 땅에 왔을 때 세례요한이 엘리야인 줄 사람들이 알았다면..
그 세례요한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 했을까요?
그 세례요한을 하나님 대우하듯이 했을 거에요.
세례요한은 하나님 전에 선 가증한 우상처럼 대우를 받았을 거에요.
세례요한이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 있게 하신 것..
그를 사람들이 임의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볼 수 있게 하신 것..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요..그것이 세례요한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엘리야인 줄 알았으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신 떠받들듯이 했을 거에요.
하나님 대신에 그를 섬겼을 거에요.
그러면 엘리야는 패망하였고, 이 세례요한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가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또 다른 우상을 섬기느라고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 거에요.
낙타털 옷을 입고 광야에서 사는 거.. 석청을 먹고 사는 거..
소리를 지르며, 소리를 지르며 있다가 마지막에 감옥 속에서 예수님이 살려주심을 믿지 못하고 그냥 머리 짤려 죽어 가는 거..
“이 땅에서 있는 자 중에 가장 큰 자다.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다.”
그러나 사실은 가장 보잘 것 없게 죽어갔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아무도 우상되지 않게 하려는 것..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게 하고, 인간끼리 인간을 우상 만드는 것을 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사랑..
왜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에 거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서 우상이 생기지 아니하도록 주님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사람들은 때때로 때때로 우상을 만듭니다.
내가 주님 외에 조금 더 사랑하는 거 우상입니다.
내가 주님 외에 조금 더 염려하는 거 우상입니다.
내가 주님의 일 때문에 속상한 게 아니라 내 일 때문에 조금 더 속상한 거 우상입니다.
좋은 것만이 우상이 아니라 나쁜 상처도 나의 우상입니다.
그것들을 다 주님 안에서 해결되기 전에는 주님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어요.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해결이 됩니다.
우리가 우상을 제거할 수 있을 거 같죠?
안되더라고요.
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더라고요.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면 우상이 싫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우상이 싫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하나씩 싫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사도바울이 그랬죠. 그래서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은혜.
사도바울이 우상 삼았던 많은 것들이 있었거든요.
주님께서는 지금도 여호와의 전에, 여호와의 문패를 걸어두는 곳에 들어오고 싶어하는데 우리의 각자의 마음 가운데 있는 우상들..
주님께서 지금 이 안에, 이 성전 안에 들어와서 완전히 주장하고 왕으로 사시기 원하는데..
내 심정 안에 있는 작은 우상들..
주님께서 우리의 직장과 우리 가정 가운데에 완전히 왕으로 임하셔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주관하여 주시고, 모든 것을 행하시길 원하시고, 하나님으로서 그 자리에 쉬기를 원하시는데..
내 가운데 있는 이 작은 우상들.. 우리 가정 가운데 있는 이 작은 우상들..
어떨때는요.. 나의 비전이 나의 우상이에요.
어떨때는요 죄송하지만 저의 헌신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우상이었더라고요.
이것보다도 하나님이 더 귀한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더 귀한지..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자.
내가 우는 일도 하나님.. 내가 웃는 일도 하나님이 되는 자..
하나님은 그런 자들 가운데에 그의 처소를 펴십니다.
처음부터 그게 하나님의 소원이셨어요.
아담을 만드시고 그렇게 계시기를 원했고..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렇게 있기를 원했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우리 가운데도 그렇게 있기를 원하십니다.
교회 안에 그렇게 있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초라한 자라 여기 서지를 못해요. 그냥 제 소원의 표시입니다.
여호와께서 서시고, 나는 옆에서 여호와의 수종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상을 제거하시기 원하는 소원은 야곱의 인생에도 있었어요.
야곱이 이렇게 기도하죠.
당신이 나를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렇게 하면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당신이 만약에.. If..
당신이 만약에 나를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면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니까 주님이 이미 15절에 함께 한다고 하셨어요. 이미 하셨어요.
그래서 야곱이 여기가 ‘벧엘’ 이라고 ‘하나님의 집’ 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이렇게 말하죠.
“진짜 그렇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전에 불러들이고, 내가 십일조를 드리고,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약속하셨는데..
문제는 이 ‘벧엘’ 이라고 그가 이름한 ‘하나님의 집’ 이라는 그 벧엘이 나중에 사악한 집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는데 있습니다.
이 벧엘을 호세아서에는 ‘벧아웬’ 이라고 변화되요. 이름이..
그 벧아웬이라는 이름이 ‘사악한 집’ 이라는 이름으로 뜻이 바뀝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었는데 사악한 집으로 이름이 바뀌어요.
그렇게 바뀌고 나서 호세아서 4장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이름이 바뀌었느냐 하면?
또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
그 벧아웬이 아까 야곱의 창세기 28장에서 말하는 ‘벧엘’ 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변개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온전하시며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하나님이 평안히 나를 집에 가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이미 나의 하나님 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야곱이 “당신께서 진짜 그렇게 하면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겁니다.” 라고 말하고 거기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는데 있어요.
아직까지 우상이 야곱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자기의 안위와 자기의 평안, 자기의 위험한 길 가운데서 구하시고 자기의 받을 축복, 자기의 안전지대.. 그것이 자기의 우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 우상이었어요.
나에게 이렇게 하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믿기보다는 나에게 이렇게 하시면..
너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창세기 35장에서 이 벧엘이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엘벧엘과 벧엘은 달라요.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고, 엘벧엘은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 아니면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 뜻이 달라요.
우리는 사악한 집으로 변한 벧엘에 있으면 안되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벧엘.. 엘벧엘로 이제 가야합니다.
그렇게 가기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 있는 우상을 상수리나무 밑에 묻어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에 내가 알지 못하는 우상들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 부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씩 싫어지는 은혜를 주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했다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사람 별 볼일 없잖아요.
이 사람 괜찮은거 같았는데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진짜 하나님이 허락한 사람 생기고 진짜 내 마음에..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저 사람 나 사랑할거야.’ 그러면 이 사람이 별볼일 없다고요.
이 사람을 쳐 내리려고 안해도 자연스럽게 멀어져요.
진짜 우리가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가면..
우상들이 싫어지기 시작하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그렇게 역사하셔요.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을 배워가면서 그 다음부터 우상을 쳐내는 것을 배워갑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처음부터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랑하게 되는 자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 싫어지는 것들..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서 떨어지는 거..
하나님이 우리에게 스가랴서 3장 3~4절에서 하나님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옷을 벗어라가 아니라.. 천사에게 명령하여 “옷을 벗겨라” 하시죠.
바로 그런거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우리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시냐 하면요..
하나님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기를 원하느냐?
그 모습이 아가서에 나와 있죠.
주님께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 뿐 아니라 우리가 모여있는 장소의 창살 밖에서 그 창살 틈으로 호시탐탐 엿보고 계시는구나.
‘언제 나를 봐줄까? 언제 나를 요만큼 봐줄까?’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끼리 뭘 막 하고 있는데..
우리끼리 너무 바빠서 우리는 뭘 하는 일을 하고 있고, 우리끼리 무엇을 하고 있는데..
주님은 문 밖에 서서 계속 두드리시다가 두드려도 두드려도 안 열어주니까 창틀 옆으로 가셔서 창틀 열려있는 틈으로 들여다 보시면서..
‘언제 나를 한번 봐줄까? 언제 나를 한 번 봐줄까?
언제나 되면 나하고 눈을 한 번 마주쳐줄까?
언제나 하면 자기들끼리 저러는 거에서 돌아서서 여호와를 한번 봐줄까?
여호와의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을 위하여 나를 바라볼까?’
하고서 계속 들어다보고 계시다가..
그중에 어떤 멍청한 여인이 눈을 돌려서 잠깐 바라봤다고요.
그랬더니 아가서 4장 9절에서 주님이 그렇게 말하시죠.
그 한 번 보는 눈길을 보며 주님은 마음이 빼앗겨서 끌려들어 오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소원이다. 그만큼 들어오시기를 원한다.
사실은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죠.
떠나가셨다고 이야기 하시는 주님께서 다시 그렇게 들어오시기를 원하죠.
제가 절대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떠나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전으로 하나님이 계셔요.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우리 가정에.. 내 성전에.. 이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는가 그 얘기를 하는 거에요.
여호와의 전.
첫째 목적은 tent of meeting 이에요.
구약의 성막에 원래 이름이 tent of meeting 이에요.
뭐냐?
만나는 장소. 만나는 장막.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자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만나는 자리. 그런데 만나야 하는데 하나님이 안 계시면 누구를 만납니까?
하나님은 교회에 2가지 소원이 있으세요.
진정한 tent of meeting 이 되길 원한다.
시편 132편에 말처럼..
내가 거기가서 내가 여기에 있기를 원해서 내가 영원히 쉬기를 원한다.
내가 거기 거하기를 원해서 내가 너희를 이 자리로 불렀다.
주님께서 이전의 영광보다 새로운 성전이 더 크다라고 말하시는데..
그것을 오해하면 안되요.
주님께서 그 다음에 풀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중 영광이 더 큰 것은 무엇 때문이냐? 거기에 내가 평강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금도 내 것이야. 은도 내 것이야. 그걸 니가 알면 평강이 있어. 내가 이전의 영광을 여기보다 더 크게 할 건데 그 영광이 더 큰 증거가 뭐냐면? 그 전에서 내가 평강이 있게 하리라.”
혹시라도 이전에 있을 때에.. 우리의 열심이 있었고, 우리의 아픔이 있었고, 우리가 그 가운데서 혹시라도 평강이 깨졌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평강이 있게 하리라.. 그것이 여기 있는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이라고 얘기 하셔요.
근데 그 평강이 언제 오느냐?
여호와께서 그 전에 오셔서 쉬실 때 이루십니다.
참된 안식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안식하면 거룩합니다.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죠?
하나님이 안식하는 곳이 거룩한 곳.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날이 거룩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편 132편에 말한 것처럼 “내가 이곳에 들어오길 원하노니 그것은 내가 여기에 쉬기를 원함이라.”
세상에 계실 때 인자가 머리둘 곳이 없다고 했고..
사람들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 의탁하지 않으시는 그분께서..
“내가 그 전에 내가 들어가서 내가 쉬리라. 그리하면 내가 거기 쉼으로 말미암아 내가 거기 있음으로 말미암아 평강이 임하리라.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이전보다 더 큰 평강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새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우상을 제거해야 해요.
우상을 제거하는 길은 주님을 더 사랑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우리가 정말 주님을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주님 외에 다른 것들이 싫어지기 시작하죠.
그러면 제거 되어집니다.
제거되어지는 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내 안에 근육이 생겨요.
그리고 제거할 수 있는 자리에 천천히 가게 됩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그 자리에 들어오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눈 한 번 힐끔 맞추는 것만을 보고도 그것을 빌미로 잡아서 뛰어들어오시는 주님..
그것이 그분의 겸손이십니다.
우리가 조금 움직이기만 하면.. 우리가 조금 그분과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그분께서는 들어오시기에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러한 갈망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정말 여호와의 전.. 진정 여호와께서 주인 되시는 여호와의 전..
주님께서 더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여호와의 전..
우리가 들어오면 평강이 충만하게 계시는 여호와의 전.. 그런 여호와의 전..
그 가운데서 우리 가운데에 평강이 우리를 사로잡고..
그 안에 우리가 평강할 수 있는 그런 여호와의 전..
그런 여호와의 전으로 주님께서 데려가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소원.
저는 그것을 느껴요.
그 길로 가는 시작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가 한 번 더 녹아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에 잠깐 기도 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는 어떠한 우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녹여버리시길 기도하십시다.
내 힘으로 그것을 제거하기는 힘들어요.
그러나 주님에게 동의하고.. 하나님! 다윗처럼 나도 같은 소원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그렇게 온전히 거하시는 것.
하나님이 이 전에 그렇게 온전히 거하시는 것.
하나님이 내 가정에 그렇게 온전히 거하시는 그 은혜를 구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내 눈을 감을 수 없을 만큼 간구했던 그 다윗의 기도를 생각하세요.
그래서 주님은 다윗의 전에 들어가기를 원하셨어요.
다윗의 집에 들어가기를 원하셨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소원과 합당한 맞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지금도 수모 가운데 계시면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당신의 사랑으로 내 안에 있는 지저분한 우상들을 녹여 주세요.
하나님! 내가 자원하는 심정으로 그것이 없어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녹여주세요.
그래서 싫어지게 하시고, 싫어지게 하시고, 싫어지게 하여 주세요.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고, 나를 아끼고 있고, 내 욕심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다 하고 있고.. 내가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하니 주님! 주님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주님 외에 이런 것들이 싫어지게 하여 주세요. 싫어지게 하여 주세요.
우리 하나님 앞에 그렇게 구합시다.
주님께서 나중 영광을 이전 영광보다 더하게 하시길 원합니다.
주님이 오셔야만 온전히 오셔야만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우리가 모일 때는 진짜 온전히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원하는 그 선함으로 모이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그렇게 되게 하여 주소서. 그렇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여! 우리가 거룩한 자리..
그 우상들이 제거되는 자리에 가게 하소서.
이 시간에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로 잡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의 불이 임하셔서 그것들을 다 태어 버리시옵소서.
내가 생각했던 나 자신이 우상인지, 내 사역이 우상인지, 내 자녀가 우상인지, 내 아내가, 내 남편이 우상인지..
아니면 나의 고민이 우상인지, 나의 상처, 아픔이 우상인지..
하나님! 그 모든 것들이 제거되길 원합니다. 당신을 허락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사랑의 불로 그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길 원합니다.
많은 불도 끄지 못하고 죽음보다 무서운 당신의 사랑이 오셔서 그것을 싫어지게 하시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에 있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님으로 이 자리에 온전히 임하시기를.
내 심장 가운데에 주님이 주님으로 온전히 임하시기를..
내 심장이 여호와의 집이 되며, 내 가정이 여호와의 집이 되며.
이 자리에 .. 여호와의 집에.. 온전히 임하는 역사가 있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가진 깨달음,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어떤 계시 그런것들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지 못하게 하는 어떤 우상이 된다고 한다면 주님 그것도 주님께서 녹여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정말 우리 소원이 주님 한 분이 되게 하시옵소서.
여러분 어떤 분들은 내 마음에 있는 아픔이라고 하는 것이 나의 우상이 되어 있는 분이 있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그것을 끼고 있어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가지고 나를 위로하고 그것을 가지고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어요.
하나님은 그것도 우상이라고 얘기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오시면 그것들 다 녹여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부으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고, 하나님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바치는 그 자리까지 우리를 이끄소서.
하나님이여! 우리가 하나님을 환영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전에.. 하나님이여! 이제 마음껏 임하소서.
우리의 눈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입니다. 내가 주님을 송축합니다.
내 마음과 뜻과 힘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힘을 택합니다.
그래서 내가 엎드려집니다.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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