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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짐의 자리. 영광스러운 자리.Fam Worship 2024. 4. 20. 18:30
♬ 약할 때 강함되시네.. 경배 한 곡 하죠.
우리요. 소리를 너무 높이면 내 소리에 내가 감동을 해요.
그래서 그러지 아니하고 영으로 찬양하고 우리 정말 속에서 존재 자체가 찬양하게 해서 음도 낮추고 소리도 낮추고 나의 혼과 육은 약하여지고, 내 안에는 영이 강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여러분이 지금 말하는 가사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되요.
가사가 그렇기 때문에 그냥 부르는 거 가지고는 안 되요.
가사가 ‘약할 때 강함되시네 주 나의 모든 것’ 그렇기 때문에 그냥 불러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요.
진짜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면 내 전 존재로 그렇게 노래하는 거에요.
나의 목소리에 감동하지 마세요. 진짜 주님에게 고백을 하세요. 진짜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인지..
여러분!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은..
주님 아닌 모든 것은 다 포기한다는 말이에요.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내가 포기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건.. 주님 아닌 모든 것은 내가 포기하겠다는 고백이에요.
그것이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는 거에요.
경배는.. 우리가 혼과 육으로 들리는 경배에 눌려서 우리의 영이 찬양을 못하고 있어요.
우리가 소리를 들내이고, 멜로디에 펄쩍 펄쩍 뛰고 있을 때 우리의 혼과 육이 너무나 소리가 커서 영은 눌려 있어요. 영이 자유함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이제 혼과 육은 작아지고.. 내 안에 아직도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초라한 쪼금한 영이..
하나님을 자유함으로 경배할 수 있어야 되요.
처음부터 그 영은 경배하길 원했어요.
여러분! 주님 안에서 진짜 보물이 있고 주님 안에 다른 것들은 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포기하겠다는 그런 결단으로 이 고백을 하시나요?
진짜 그렇게 되면 나는 약해지지요. ♬ 약할 때 강함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
하나님!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는 고백이 거짓 고백이 되지 아니하도록 아버지! 우리를 겸손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내가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습관적으로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던 것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주님 밖에는 나의 보물이 없기에 주님만 있으면 되기에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지게 하소서. 내가 존귀하지 않기에 주님이 더 존귀하며.. 내가 약하기에 주님이 더 존귀한 은혜가 있어지게 하시옵소서. “나만 있으면 되냐” 라고 묻는 주님 앞에 “주님이면 된다” 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시간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물어 주시옵소서. “나만 있으면 되냐?”
주님이 그렇게 묻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부유하여서 당신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만 있으면 되냐?”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은혜가 겸손한 은혜가 있어지길 원합니다. 주님 앞에 “예. 주님이면 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정직한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제자들이 질문을 하면 엉뚱한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사실은 이 질문에서도 지금 제자들이 나와서 물은 건..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라고 물었는데 처음에 시작하시는 답변은.. 천국에서 이런 자가 크다가 아니에요.
“누가 큽니까?” 라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 답변한 것은 뭐냐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해. 절대로.
너희가 나에게 누가 크다고 묻느냐?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누가 큰 지 안 큰지를 물을 만한 너희가 그런 입장이 되느냐? ”
무슨말이냐면?
여러분이 아실거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는 그 경로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큰 가를 따지고 있었어요. 마지막 성만찬 때요. (누가복음 22장 24절)
그러면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지금 누가 크냐 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주님에게는 너무 역겨운 거에요. 그것에 대답할 만한 가치도 없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 말씀하시는 거에요.
“누가 큰 가를 생각하고 있는 한 너는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 존재이다.”
그 얘기로 답변을 하시는 거에요.
“누가 크냐고 묻고 있느냐? 그 질문 자체가 나는 너무나도 역겹다.”
왜냐하면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 같다는 말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해석들을 하죠.
우리가 우리 혼적으로 우리가 좋기 위해서 어린 아이 같다는 건..
‘천진난만 한거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거야. 주님의 몸에 주님의 사랑을 믿어서 몸을 던지는거야..’
뭐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해요.
그러나 그렇게 여기저기서 가져오지 않고 본문 말씀에서 그냥 보면..
어린 아이 같은 자가 누구라고 말하냐면?
4절에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린아이와 같은 자는 낮은 자라는 소리에요.
그리고 어린 아이 같은 자를 또 다시 풀어서 말하기를 작은 자, 소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환상적으로 어린 아이라는 게 무슨 고상하게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
이렇게 고상한 게 아니라.. 어린 아이 같은 자는 뭐냐?
낮은 자. 낮은 자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근데 그 낮은 자라는 것이 뒤에 가서 어느 정도까지 가냐면?
10절에 보면 업신여김을 받는 자.
“낮다 못해서 이제는 업신여김까지 받는 자. 그가 낮은 자다. 그리고 그가 어린 자다. 그런 어린 아이가 아니면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런데 교만한 너희는 나에게 누가 크냐고 묻고 있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계세요.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말은 사실은 무슨 말이냐면?
낮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겸손한 자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지요.
하나님이 이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스바냐 3장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본문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우리는 알지를 못하고 있어요.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여호와의 놀랍고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심판을 행하시고..
행하시는 중간에 모든 열방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인 줄 알고 그 앞에 와서 하나님 앞에 열방의 입술이 깨끗해져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그 때.. 그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냐면?
하나님의 성소에 하나님을 믿는다 하고 모여든 자 가운데에서 제거해서 없애버리는 자들이 있는데 그게 누구냐?
교만하여 자긍하는 자들이라는 거에요.
열방이 깨끗한 입술이 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모여들게 되는 그 과정.
그 과정이 있어지는 그 중간에.. 여호와의 성산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왔는데..
거기에 왜 왔냐면? 주님을 믿는다고 지금 모여들어 온 거에요.
그 모여들어온 자들 가운데서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제해 버리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다. 크리스천이 아닌 자들이 아니라..
크리스천이라고 모여들은 자 가운데에 교만하여 자긍하는 자들을 제하여 버린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다시는 내 성소에서 너희가 교만하지 못하게 하겠다. 너희가 크고자 하느냐? 누가 크다고 묻느냐? 크다고 묻는 한 결단코 너희는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람을 골라내는데..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들을 제하여 버린다고 하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겸손해야 겸손한 길을 걸어야 구원받는다. 겸손하지 못하면 구원 못 받는다 라는 법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영접해서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었으면 교만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그 분이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그분의 생각만이 옳고, 그분의 뜻만이 옳고, 그분이 이끄는 대로 나는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교만해 질 수가 없는데..
교만하다는 것은 뭐냐면?
나의 생각이 그분의 생각을 넘고 있는 걸 말해요.
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분의 생각은 생각하지 않고 나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나가는 것을 이야기 하죠.
그것을 주님은 교만하다고 이야기 하시죠.
그리고 그것을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커지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죠.
사단이 하나님 앞에 커지려고 했어요. 하와가 커지려고 했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주님께서 “내가 정말 너희의 주인이냐? 내가 진짜 너희의 주인이냐? 너희가 그러면 나에게 항복하였느냐? 그러면 너가 내 앞에서 진짜 낮은 자가 되었으리라. 그런데 아직도 크고자 하는 생각이 너희에게 있고, 아직도 누가 큰 자인가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결단코 너희에게 말하는데..
천국은 너희에게 멀다. 아직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내가 주인이 아니라 너가 주인이라는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계세요.
여호와의 성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서 교만하고 자긍한 자를 제하여 버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세요.
그런 말은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도 이 성전에 예수님께서 만약에 지금 진짜 입성하셨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에 우리 심정을 들여다 보시고 우리 가운데에 교만하여 자긍하는 자를..
나가라고 하실 수도 있다는 이야기 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소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가 과연 누굴까?
요한복음 9장 한번 보세요.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소경이 있습니다.
그 소경에게 주님께서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그 다음에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어라. 그래서 그 소경이 눈을 뜬 이야기 입니다.
그 소경이 눈을 떴다는 이야기를 듣고 13절 부터 이제 그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여러가지를 볼 수 있어요.
안다고 하는 자들, 본다고 하는 자들이 여기 있는 바리새인들이에요.
소경의 이론과 바리새인이 가지고 있는 이론이 비교가 안되죠.
이 소경은 토라를 읽어본 적도 없을 거에요. 눈이 안 보이니까요.
바리새인들은 토라를 달달달 외우고, 모든 율법을 다 알고 율법을 지키고, 율법대로 십일조와 유향과 번제와 이 모든 것들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전에서 그렇게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본다고 하는 사람들,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본다는 사람들,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이런 일이 일어나요.
안다고 하는 자들이 모이면요.. 목소리가 커지고, 니 견해가 옳다 내 견해가 옳다.
내 판단이 옳다. 니 판단이 옳다. 쟁논을 하기 시작해요.
그것이 안다고 하는 자들이 모인 표시에요.
그래서 사사기에서 말하잖아요.
왕이 없음으로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고, 말하고, 움직여요.
왕이 없어서.. 왕을 보지 못하니까..
그러나 아는건 있어서 자기의 소견대로 하는 거에요.
지금 이 바리새인들이 아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아는게 있고 보이는게 있으니까 자기들이 본다, 안다라고 믿으니까 모여서 그냥 얘기들을 하는 거에요.
그러다가 보니까 논쟁이 되고 쟁논이(분쟁) 많아지기 시작해요.
“니가 옳아. 내가 틀렸어. 아니야. 내가 옳아. 니가 틀렸어.”
그런 식으로 논쟁을 하기 시작해요.
그 다음에 바리새인들이 또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어떻게 되냐면요?
교만한 모습이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냐면 이렇게 나와요.
육적인 교만
안다고 하는 자들은요 목소리가 커져요.
그리고 그 큰 목소리를 가지고 안다, 가졌다 하는 걸로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누르기 시작하죠.
억지로 자기들이 결정한 것으로 그들이 움직이게 그렇게 조종하려고 하죠.
가졌다고 하고, 안다고 하고, 본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조종하기 시작하는 거..
이것이 바로 육적인 교만 때문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죠.
‘그 사람들이 한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혹시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그 다음에 또 이렇게 되죠.
혼적인 교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있어요. 안다고 하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게 중요하다고 말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들이 하고 있는게 뭐냐면?
죄인이 아닌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정을 짓죠. 그 판단의 극치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혼적인 교만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에요.
자기의 혼적인 사고와 자기가 알고 있는 이론을 가지고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함부로 판단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 것은 저 사람은 이러니까 틀렸고, 저 사람은 이러니까 맞았어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혼적인 판단의 자리에 들어가서 혼적인 교만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요.
3번째는 또 어떻게 되냐면요?
하면서 계속 대답을 하는데.. 27절에 바리새인이 또 다시 물어보고 또 다시 물어보니까 소경이 이렇게 얘기해요.
영적인 교만
심플하게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글자 그대로 이야기하면 믿지를 않아요.
“뭔가 복잡하게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그 뒤에 숨은 뭔가 의도를 이야기 해봐.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해봐.”
성경 말씀을 읽어도 글자 그대로 글씨에 있는 그대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 뒤에 뭔가 숨은 것이 있을거야 하고 쪼개고, 부수고.. 막 이러고 있어요.
바로 이것이 영적인 교만이에요.
그래서 그대로 글자 그대로 읽는 것.. 단순하게 받아드리지 못해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다. o.k. 그러면 그분이 주인이시니까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냥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것들을 가지고 계속 이론적으로 무엇인가를 풀려하고, 조금 더 새로운 것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고.
저거 다 아는 이야기야. 그거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거 가지고는 만족이 안 돼.
더 쪼개는 이야기. 더 쪼개지는 이야기..
하나님의 말씀을 쪼갠다고 말을 하면서까지 나가는 그런 깊이 있는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그거..
그러다가 보니까 진리를 이야기해도 못 알아들어요.
단순한 것을 이야기하고, 눈에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못 알아들어요.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가진 영적인 교만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안다, 본다 하면서 가지고 있는 모든 3가지 교만이 육적인, 혼적인, 영적인 교만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가지고 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느냐 하면.. 이 결과를 가져오죠.
교만의 결과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가 어디에 왔는지 알지 못하게 되는 거에요.
육적인 교만, 혼적인 교만, 영적인 교만을 가지고 있을 때..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무리 말씀을 읽어도 토라를 아무리 외워도, 종교생활을 아무리해도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몰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로 내 몰았어요.
근데 그들이 안다고 하는 자들이었어요. 본다고 하는 자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스바냐서 3장에서 주님께서 “마지막에 내 성소에 모여있는 자들 가운데.. 안다고 하고, 본다고 하면서 가지고 있는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를 다 제하여 버리리라. 다시는 내 성소에서 안다고 하고 본다고 하면서 가졌다고 하면서 교만하게 부리는 그러한 자들이 다시는 있지 못하게 하겠다. 어린 아이 같은 자가 아니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 아이 같은 자가 아니면 내 성소에 있을 수가 없다. 어린 아이 같은 자는 낮은 자들이다. 그들은 교만하지 않은 자들이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업신여김을 받을 만큼 낮아진 자들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다.”
여러분 이사야서에 잘 아시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갖힌 자를 풀어주고.. 내가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었다. 여러분! 복음을 누구에게 준다고 되어 있어요?
가난한 자에게..
가난한 자가 아니면 복음을 들어도 모른다는 이야기고요..
눈 먼 자가 아니면 눈 뜨임을 받지 못하고.. 갇힌 자가 아니면 포로에서 풀려날 수가 없어요.
가난한 자, 소경된 자, 갇혀있는 자들이 오히려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죠. 약한 자들이죠.
주님은 그렇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라는 말을 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 다음 절에 설명하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어떤 견고한 진이 서 있어요.
견고한 벽이 서 있는데 그 벽이 무언지를 얘기해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을 막는 견고한 벽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1 모든 이론 2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거 3 모든 생각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 막는 담이라는 거에요.
근데 그것을 파해서 그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복종케 되는 자리까지 데려간다고 하는 거죠.
그러면서 6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앞에서 아는 모든 생각과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높아진 것이 되고 그것들이 부서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함께 이 담이 부서질 수가 없는데..
하나님 앞에 그 담이 부서졌다고 하는 모습은 뭐냐면?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걸 이야기하죠.
그게 뭐냐면?
정말 낮아진 자를 이야기하죠.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이 옳습니다.
이사야서 55장에 말한 것처럼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데 하나님의 생각은 높고.. 내 생각은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인 거죠.
무서운 것은 뭐냐면?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한 우리가 아무리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중보 기도를 하고, 금식을 많이 하고, 철야 기도를 해도..
내 안에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높아진 것이 있다고 하면..
내가 아는 것이 이론에 여기로 들어온 것에만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내 삶에서 교만한 모습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건데..
그 교만한 것은 사람 앞에서 교만한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는 겸손한 척해도 하나님 앞에 교만하다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너희는 천국에 결단코 들어갈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내가 주님이라고 말했던 너의 말이 거짓말이기 때문에.. 입으로 시인한 그 말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너가 주인 노릇하고 너의 생각이 나의 생각을 이기고 있는 한 너가 주인이잖아. 그러면 너는 나를 주님으로 영접한 적이 없어. 말로만 영접한 거야. 그러니까 당연히 내 성소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 영생이 없는거야. ”
잘못 들으시면 안 되요. 겸손해야 영생 받는다가 아니라 주님이 나의 주인되야..
근데 주님이 주인 된 사람의 그 삶의 모습이 어떤거냐?
하나님 앞에 항복한 거라는 거죠.
근데 행동으로는 다 항복한 것 같지만 내 깊은 속을 보시는 그 분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론과 생각이 하나님 보다 더 높아진 데 있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가지고 있는 사람을 처벌하려고 하시냐?
아니요.. 그 사람들을 돌이키려고 하시죠. 그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려고 하시죠.
새롭게 만나서 그들이 영원히 여호와의 성소에 교만하지 않은 자로 같이 살게 되기를 원하죠.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 가운데에 자기의 장막을 펴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장막에 거할 사람들 가운데에 교만하고 자긍한 자를 제하여 버린다고 한다면.. 그날 그 마지막 시간에 가서 70, 80 평생 하나님의 성소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있었는데.. 그 마지막 순간에 가서 ‘너가 교만하고 자긍한 자야’ 하고 제해버림을 당하는 자리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아직 생명이 붙어있을 때에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몇 년이라고 남아있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시죠.
그리고 우리가 낮아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시죠.
그리고 드디어 주님이 주인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죠.
그래서 호세아서는 말하죠.
여호와를 알라. 이 백성이 망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세요?
솔로몬이요.. 잠언 16장에 보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를 알고 있었더라고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 다 알고 있었더라고요.
솔로몬이 다 알고는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천 명의 여인을 두고 같이 살고 그로 말미암아 그 이후부터 나라가 둘로 갈라졌어요.
그가 가지고 있는 고귀한 지식과 이론이 그 지식과 이론으로 겸손해야 되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야 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잠언에도 써 놨거든요.
그런데 그 알고 있는 것이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됐더라고요.
왜냐?
그 아는 것이 여기.. 머리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여기 머리에 들어간 것을 우리는 안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 들어간 것은 아는 것이 아니고요..
여기 들어간 건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높아지게 만들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이것(머리)이 여기로(가슴) 내려가야 된다.”
여기(머리) 있는 것이 여기(가슴)로 내려가지 못하더라고요. 안 내려가더라고요. 사람들은 말하죠. “시간이 가면 내려가. 어떻게 하면 내려가. 이게 내려가게 해.”
여기(머리) 있는 게 여기로(가슴) 내려가는 척 하다가 다시 무슨 껀 수만 나면 여기(머리)로 다시 올라가거든요.
왜 그런지 아세요?
처음부터 여기(가슴)로 받아야 되는 거에요.
신부라고 말하면서도 나와의 약속을 파한다.
왜?
신부라고 말하는 거.. ‘나 그리스도의 신부에요’ 하는 거 다 여기서 (머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내 언약을 파한다.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아는 모든 것이 여기(가슴)에 새겨지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
그런데 계속 머리에만 새기고 있으니까 바리새인처럼 안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리에 가는 거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게 되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말한 것처럼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아느냐?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그 자리에 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죠. 그날이 되면 여기다가 여기다가 (마음) 말씀을 새길꺼야. 주님은 여기로 간 머리를 여기로(가슴) 가라고 하지 않아요.
“여기에다(마음) 새겨야 돼.” 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보세요.
더 이상은 누가 누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아주 어린애부터 노인까지 마음으로 예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아무리 성경을 외워도,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계속 머리에서 맴돌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송하지만 아니에요.
여기(마음)에 새겨져야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머리에 새겨지면 교만하고 자긍하고요.. 여기(마음)에 새겨져야 마지막 여호와의 성소에 교만함이 없이 남아있는 자가 되요.
여기(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속에서 너무나 많은 일을 행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심중을 보고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계시지 않으시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어떻게 하냐면?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로 오셨죠. 빌립보서 2장에 나와 있잖아요.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가장 낮은 자로 오셔서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세요? “나를 먹어라.”
그분은 말씀을 먹으라고 이야기하지 말씀을 읽어서 깨달으라고 말하지 않아요.
말씀을 먹어서 여기(마음)에다 집어넣으라는 거죠.
주님께서 그래서 어떻게 하시냐면?
우리가 그 자리에 갈 수 있도록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하세요.
여러분 이 본문을 가지고 모세에게 대적해서 문둥병에 걸렸다. 그러니까 리더에게 대적하면 안되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제가 아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가 겪은 거.. 성령이 자기에게 조명해주는 한도 내에서 성경을 바라보잖아요.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는 그렇지가 않아요. 저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이유가 뭐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이유가 그들이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인가요?
그게 아니죠.
그거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볼 때는 ‘아! 내가 노예생활을 했으니까 나를 풀어주신 거야. 나를 자유케 하신거야. 감격해.’
그거는 그들의 관점이고요.. 하나님의 관점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출애굽시킨 목적인 무엇이냐?
민수기는 떠나지 마시고 출애굽기 29장 잠깐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하여 내신 이유는?
그들을 애굽 땅에서 노예 생활하는 거 불쌍해서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살기를 원해서에요.
이것을 출애굽기 40장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죠.
드디어 여호와의 장막이 그들 가운데에 구름으로 임하셨다.
그래서 구름이 뜨면 가고 구름이 앉으면 또 서고, 그렇게 해서 드디어 주님이 주인되셔서 구름으로 표시한 그 분께서 움직이면 가고, 서면 서는 주님이 완전히 주인되는 그 가운데서 그분이 장막 가운데 거하는 삶.
그것을 원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거에요.
우리가 보는 관점과 하나님이 보는 소원이 너무도 다른거죠.
그런데 지금 놀라운 것은 민수기 12장에서 이야기를 하실 때 거기서 놀라운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그분이 그 백성들 가운데에 거하기를 원해서 거기에 오셨는데..
그분이 절대로 그 사람들을 떠나기 원하지 않고, 거기에 같이 살기를 원해서 그들을 끌어내리셨는데 그분이 그 장막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에요.
가장 놀라운 건 그 이야기에요.
도대체 이 일이 얼마나 크길래 주님께서 거기서 떠날 수 밖에 없었나?
그냥 미리암을 내보내면 되잖아요..
우리가 생각했던대로 모세에게 대적해서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어. 그러면 넌 도대체 안 되겠다. 나가라. 하고 미리암만 제해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나가시거든요.
왜 여호와께서 나가시냐고요.?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는 또 있어요.
13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했더니.. 고쳐달라고 부르짖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말하길 이렇게 말하죠.
무슨 말이냐면?
“미리암이 문둥병 든 거.. 내가 그 얼굴에 침 뱉었기 때문이야. 내가 그 얼굴에 침 뱉었기 때문에 문둥병 들었어.”
여러분 우리의 자식이 말을 안 듣거나 못되게 굴 때 모든 사람 보는 앞에서 그 얼굴에 침 뱉는 아버지 있으세요? 만약에 우리 아이가 잘못해서 아버지가 이 아이의 얼굴에 사람 보는 앞에서 침을 뱉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누구를 욕하겠어요?
아버지를 욕해요. 그러지 않아요?
아이가 무얼 얼마나 잘못했다고 아이 얼굴에 침을 뱉느냐?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건.. 걔 문둥병 걸린 거 내가 침 뱉음이야.
무슨 말인지 아세요?
아버지가 책임지시는 거에요. “내가 잘못한거야. 내가 그렇게 한거야. 그 문둥병 든 거 내가 침 뱉은거야.”
그 미리암이 받은 죄 값을 본인이 책임을 지시는 거에요.
그 수치를, 그 모멸을, 그 책임을 지시는 거에요. 그 손가락질을 다 받으시는 거에요.
문둥병이 걸린 것보다 문둥병 걸리게 하려고 침 뱉은 그 아버지가 더 나쁘게 생각이 되잖아요. 근데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 말은 또 무슨 말이냐면?
“얘는 문둥병 걸린 내 딸이야.” 그 소리에요.
“내가 침 뱉었고, 얘는 문둥병 걸렸지만 내 딸이야.”
모세가 제발 고쳐달라고 기도하죠.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죠.
왜냐하면 레위기에 보면 문둥병 환자가 얼굴이 전신이 하얗게 되면 이미 나았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밖에 나가 있지 않고, 진에 나가지 않고, 같이 있어도 되요.
그러니까 문둥병이 걸렸는데 고름이 안 나오고 이미 하얗게 됐으면 사람 눈에는 ‘문둥병이야.’
그러지만 레위기에 나오는 법에 의하면 문둥병에 걸렸지만 바로 고침을 받은 상태에요. 전염이 안되요.
인간의 눈으로 볼때는.. 아론은 그것을 못 보니까.. ‘살이 반이나 썩고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막 기도하는거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듣기 전에 이미 내 딸이기 때문에 죄를 줬고, 벌을 줬고, 그것에 대해서 이미 갇췄고, 이미 고쳐주셨고, 이미 그 책임을 자기가 지고 계신 거에요.
여기에 나오는 장면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그런 분이에요.
그런데 그 아버지께서 더 놀라운 건 이 미리암을 쫓아내지 않고 본인이 나가세요.
왜 본인이 나가셔? 왜 나가셨을까 제가 여쭤봤어요. 나가셔서 뭘 하셨을거 같으세요?
그 장막 가운데 너무나도 거하고 싶은데 본인이 나가계세요.
왠지 알아요?
미리암을 7일동안 내보내야 되잖아요.
미리암을 진 밖에 혼자 둘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먼저 가셔서 미리암과 둘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시고 진 밖에 그 미리암이 이 7일동안에 수치를 겪고 있을 동안 같이 수치를 겪으면서 진 밖에 있다가 같이 돌아오는 거에요.
진토에서 건진 내 딸.. 그러고 같이 돌아오는 거에요.
그가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출발하는 거에요.
그게 우리 아버지에요.
미리암이요.. 모세가 살아났을 때.. 모세가 강가에 던져져서 죽임당하지 않고..
아니면 애굽 바로에게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났을 때 그 큰 공을 누가 했는지 아세요?
미리암이 했어요..
미리암이 그 갈대숩에 갔다놓은 거 보고, 그 다음에 공주가 가져가는거 보고, 그 다음에 공주한테 가서 “유모가 필요하십니까?” 그러고서 자기 엄마를 유모로 붙이고..
미리암의 공이 크다고요..
그러니까 미리암이 어떻겠어요?
모세가 장성해서 모세가 저렇게 주인이 되서 모든 사람의 리더로 있는 것을 보면서 미리암 마음 가운데 당연히 자기도 커지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겠죠..
‘모세.. 내 동생 저렇게 된 거.. 내 덕이야.’
그러나 그 가운데 미리암 속에 진짜 있었던 소원은 뭐냐면?
‘왜 하나님이 모세와만 이야기를 하나?’ 그것에 대한 것이었어요.
우리하고도 이야기를 하는데..
근데 하나님께서 그 포인트를 딱 집으시죠.
“뭐가 다른지 알아? 모세와 나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있어.”
보세요. 미리암은요.. 겉으로 볼 때에는 지금 교만하게 행한 것 같죠. 거칠게 행한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심증.. 저 깊은 곳을 보시잖아요. 하나님이 아시죠.
미리암이 그렇게 교만한 행동을 했지만 그 심증.. 저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은..
‘나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자기도 있고 싶은 그 소원이구나!’ 그걸 바라보시는 거죠.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을 보시죠.
표현은 교만함으로 나왔지만, 표현은 커지고자 하는 거 같이 나왔지만..
미리암의 원래 가지고 있던 소원은.. 나도 모세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있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소원을 보시고 진 바깥으로 미리암을 데리고 나가서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두분이 있어요.
문둥병 걸린 내 딸의 얼굴을 바라보고, 문둥병 걸린 딸은 그 아버지를 바라보고 단둘이 앉아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7일을 지내요.
미리암의 가난한 소원이 이루어지고 거기서 미리암은 감격하게 되고..
가장 낮은자리.. 문둥병에 걸려서 처절한 자리.. 모든 사람에게 참소를 받고 있는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함께 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은 그 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자원하여 그분에게 항복하게 되요.
다시는 교만하게 커지려고 하는 소원을 가질 필요도 없어요.
왜?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앉아봤거든요.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았거든요.
그분이 앞에 선 자에게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거든요.
낮은데.. 가장 초라한 자리에 문둥병 걸려서 정말 망신스러운 자리에 있을 때 찾아오시고 거기 함께 했던 하나님을 보았거든요. 그리고 그분이 내 아버지인걸 알았거든요.
더 이상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더 이상은 아무것도 원할 게 없고..
그 하나님에게 자원하여 항복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지는 거죠.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미리암을 가장 낮은 자리까지 가게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어요.
마태복음 18장에 말씀처럼.. 가장 어린 아이, 가장 낮은 자처럼 데리고 가셔서 거기서 만남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가장 낮은 자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시 진으로 돌아오는 미리암.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자리를 주세요.
왠지 아세요?
여러분! 이렇게 거들먹거리고 신앙생활하다가 마지막에 주님이 오신 그때에 우리를 거기서 제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우리가 거기서 영원히 그분과 사는 걸 소원하기 때문에 그 순간에 우리가 이 인생이 끝나서 하나님 보좌 심판 앞에 섰을 때에.. 우리가 다 성소에 모였을 때에..
너 교만하고 자긍하니까 제해내는 거.. 그거 하기 싫으신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에 우리가 낮아질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문둥이가 되는 기회..
우린요.. 다 문둥이 같은 존재들이에요.
역대하 26장.. 또 다른 문둥이가 있어요. 웃시야가 있어요.
여러분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진짜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으로 받으면..
이제 미리암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만난거에요.
이론으로 만난 게 아니라 마음으로 만난거에요.
그러고 나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 질 수가 없는거죠. 마음에 새겨졌거든요.
마음에 새겨지고 나면 말씀을 보는 것이 이제는 이론이 아니라 그분의 심정을 알기 시작해요.
그분의 마음을 알기 시작해요. 그분의 마음을 알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져요.
그분의 마음을 알면 그분 앞에 감히 교만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분의 뜻에 토를 달 수가 없게 되는 거에요.
“토를 달지마. 하나님에게 항복해.” 이렇게 야단치지 않아도 그분의 마음을 알기 시작하면..
자원하여 항복하는 자리에 가고.. 드디어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거죠.
웃시야 왕이 있었어요. 성경에 보니까 웃시야 왕이 진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왕이었더라고요. 26장을 보면 그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진짜 웃시야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했던 왕이었어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어떻게 보여도 그 안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했던 씨앗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런데 그가 교만해졌다고 이야기하죠.
웃시야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어요.
그러다가 이제 강성하여 졌어요. 강성하여 졌는데..
강성하여져서 이 사람이 인간적인, 세상적인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제단에, 향단에 분향을 하려고 했어요.
이스라엘 율법으로는 거기는 제사장 밖에는 분향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아시죠.. 예수 그리스도가 온 후에는 그 옆에 우리도 다 분향을 할 수가 있어요.
그렇죠.. 기도의 자리거든요.. 우리도 다 그 자리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사장 밖에는 가지 못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볼 건.. 웃시야가 제단에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해서 문둥병이 발한 것이 아니라 분향하려 하다가 제사장이 뭐라 그러니까 노를 발했어요.
노를 발하며.. 화를 낼 때에 문둥이가 됬어요.
분향단을 잡았더니 문둥이가 된 게 아니라 분향단을 잡고 있는데 제사장이 와서..
“너 그거 안 돼. 불법이야. 이거 하면 안돼.” 그랬을 때 노를 발했더니..
노를 발하매, 화를 내매, 분노 하매, 거기서 소리를 지르매.. 그가 문둥병이 됬어요.
제가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어요.
‘왜 이 사람이 올라가서 이 향단에 분향을 하려고 했을까요?’
물론 교만했어요.
그것이 과연 제사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을까요?
제가 거듭 말씀드려요. 세상적인 이론과 신학적인 이론으로는 그게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보면 저는 이렇게 봐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거든요.
교만하여진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향단 앞에 분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죠.
법으로는 안 되죠. 그러나 은혜로는 가능해요.
어쩌면 분향하려고 거기다 손을 댔다가 제사장이 말했을 때 “아! 제사장 오셔냐고 이것을 도와달라” 고 이렇게 해서 했었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어쨌든 간에 저는 여호와께서 그를 문둥이 되게 한 것이 은혜라고 생각해요.
왜냐?
자기가 여호와의 제단 옆에 분향을 하면서 여호와의 옆에 있고 싶었어요.
속에 있는 소원은 그거에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법을 어긴 것 같지만.. 주님은 그것을 보시죠.
그리고 문둥이 되게 하셔서 별궁에 그를 가둬요.
별궁에 혼자 있었을 거 같아요?
전 하나님이 같이 계셨다고 믿어요.
여호와의 전에 나가서 분향단에 가서 향단에 불을 지피는 그 소원을 … 그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별궁에서 하나님 앞에 계속 향단에 불을 지피고 있었겠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죽을 때까지 둘이 앉아 있었겠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겸손한 자 중에 겸손한 자로 만들었겠죠.
가장 낮아진 자. 왕으로써 문둥병이 걸린 존재.
그러나 별궁에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몰라요.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라고 했나요? 이것보다 더 은밀한 곳이 어디 있나요?
문둥이가 들어있는 별궁에 아무도 안 들어와요. 하나님 밖에는 안 들어와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디까지 아는지..
제가 웃시야를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죽은 다음에 받았다는 것을 제가 여러분에게 제 나름대로 증거해보이자면 이거에요.
이사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본 날이 있는데.. 그 날이 언제냐면?
웃시야가 죽던 해에요.
여기다가 특별히 웃시야가 죽던 해라고 기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런데 웃시야가 죽던 해가 무엇인가 의미를 갖는 거에요.
여러분! 누가 죽을 때 하늘 문이 열려서 보좌가 보인 적이 있는 이야기 아시죠?
스데반이 죽을 때요 하늘 문이 열리고, 스데반이 보면서 인자를 보았어요.
스데반을 받아주신 인자의 모습을 보고..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그럴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참람하도다” 하고 욕했어요.
사도행전 7장. 다 아시지만 확인하십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이를 가는 사람들이 뭐냐면?
이론이 하나 가득한 본다 하는 사람들이에요.
스데반이 죽을 때 하늘 문이 열렸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옆에 서신 하나님의 보좌가 보였어요.
특별히 이사야서에 웃시야가 죽던 때에.. 하늘의 보좌가 열리고 이사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는 은혜가 있어져요.
저는요.. 웃시야를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반역하고 대적했기 때문에 문둥병해서 버렸다고 생각 안 해요.
눈으로 보이는 잘못이 있었어요.
그러나 심증과 중심을 들여다 보시는 주님께서 하나님을 구하는 그의 마음을 알죠.
그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죠.
낮은 자 중에 낮은 자..
그 당시에 문둥병이면 가장 추한 자에요.
문둥병으로 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그래서 주님 앞에 매순간 분향할 수 있는 기회를 그 별궁에서 주시고.. 그리고 그가 죽을 때 저는 그를 받으셨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늘의 문이 열렸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디까지 보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어디까지 보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어디까지 경험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을 보는 하나님을 아는 한계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은대로 낮은대로 데려가실 때가 있어요.
처참한 실패의 자리로 데려갈 때가 있고요.. 모든 것을 빼앗기는 자리로 데려갈 때가 있어요.
정말 문둥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가 문둥이 같다.. 처절하게 내가 죄인임을 알고, 처절하게 내가 가진 것을 다 빼앗긴 것 같고, 처절하게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처절하게 내가 모든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같이 여겨지는 그 때..
그 때에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가슴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시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러고 나면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죠.
다른 누구도 주인이 될 수 없죠.
별궁에서 웃시야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고요.
진 밖에서 미리암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분도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소원을 가지고 계시죠.
우리가 하나님 옆에서 영원히 사는 거..
그분께서 우리 안에 영원히 사는 소원을 가지고 계시죠.
저도 문둥이였었어요. 수없이 문둥이가 됐었어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제가 문둥이로 되었던.. 모든 것을 빼앗겼던 그 순간마다.. 모든 것에서 실패했던 그 순간마다..
하나님은 별궁으로 저를 만나러 오셨고, 거기서 함께 있었고, 거기서 다시 일어나게 했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을 조금 더 알았고, 거기서부터 자원해서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기를 원하게 되고, 거기서부터 그분의 생각만이 옳은 것을 인정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의 생각은 점점 조금씩 없어지는 자리에 가고..
드디어 하나님이 나의 주인되는 자리로 데려가시는 걸 봐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이것이 다 라고 생각했던 거.. 그것이 갑자기 없어지는 거..
그것을 갑자기 빼앗기는 거 같은 거..
왠지 아세요?
우리를 마지막 때에 제하여 버리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이에요.
지금 나에게서 그 모든 것이 제하여지는 것이 낫지.. 그때에 가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제하여지는 건 끔찍해요. 이거보다 더 큰 은혜는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문 밖에서 돌아가셨다고 하죠.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는 그 분의 복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값어치 없이 저 차원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죠.
제가 느끼기에 여러분 가운데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내가 상상할 수 없던 낮은 자의 자리에 지금 데려가시고 계시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은 내가 하나님이 나를 문둥병 되게 하는 것처럼 그런 지금 느낌을 가지는 분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내가 눈 먼 것 같애. 왜 더 이상 말씀을 읽어도 깨달음이 안 오는거야. 왜 기도가 안 되는 거야. 왜 마음 문이 안 열리는거야. 왜 하나님 전에 나왔는데 내 마음은 점점 답답하고 눈물도 메말라 버린거야
그 모든 상황이요.. 문둥병 되고 있는 거에요.
거기서부터 드디어 우리는 어린 아이 같이 낮아지는 자가 되는 거에요.
낮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거든요. 낮아지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가장 약한 자가 됐을 때 하나님의 강함은 더 빛을 발하고,
가장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가 됐을 때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이 되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나를 주장하시고, 하나님이 주인되시고, 하나님의 구름이 뜨면 가고 구름이 앉으면 같이 앉는 역사가 진짜 꿈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이제 살아가기 시작하죠.
그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끝없이 낮추실 때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죽도록 헌신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헌신하면.. 옛날에 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이렇게 헌신하면.. 내가 창대하고 잘 되야 되는데.. 왜 갑자기 내 몸에 병이 들고, 왜 갑자기 내 사업이 안되고, 왜 갑자기 사람들에게 참소를 받고, 왜 갑자기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기고.. 왜 그렇게 되느냐? 왜 그렇게 되느냐..
하나님이 나를 살리려 하심이죠.
왜?
나에게 있던 교만을 없애려하심이에요.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해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요.. 하나님 앞에서는 굉장히 교만하거든요.
항상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이기고 있어요.. 우리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죠.
아버지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면 그렇게 못하거든요.
내 생각이 이제 없어지기 시작하죠.
그것이 겸손하고 낮아진 자의 표시죠.
그것을 요한복음 9장의 그 이야기를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9장의 결론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다시 또 시작이 되는데..
성경은 어떠한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를 참 좋아해요.
어린 아이와 같은 자가 어떤 자냐?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어린 아이 같은 자가 어떤 자냐 하면?
양과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해요.
그 어린 아이 같아진 자의 모습이 양이에요.
그분이 목자라고 부르짖기 이전에 내가 양이 되야 해요.
우리는요. 나는 양이 되기를 원치 않고 예수님 만이 목자로 나를 인도하시라고 기염을 토하고 있거든요.
나는 황소로 남아 있으면서 그분이 나를 인도하기를 원하고 있거든요.
근데 주님이 목자가 되시려면.. 우리가 처절하게 양이 되어야 되요.
양은요.. 생각이 없어요.
양이요.. 포슬포슬하게 예쁜 줄 아세요? 이스라엘에 한 번 가보세요.
더럽기 더러운게 양이에요. 온 털에 똥이 묻고요..
이스라엘에서 말하는 양.. 사막에서 굴러가지고 이 털이 하얀 색이 아니라요 시커머죽죽해요.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요. 전혀 이쁘고 고상한 그런 순수한 양이 아니라 진짜 더럽고 더러운 양이에요.
이 양의 자리에 가는 거.. 목자가 끌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거.
목자가 먹여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거..
이 양이 얼마나 생각이 없냐면.. 개를 써서 개가 그 양을 몰게까지 만들잖아요.
안그러면 딴데로 가요. 여기 풀만 있으면 딴 데로 가거든요. 생각이 없어서..
목자의 생각대로 움직여지는.. 그래서 그대로 이끌어야 되는 것이.. 그것이 양이거든요.
지금 주님께서 말하는 어린 아이 같은 자가 되는 거..
그것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하는 양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주님만이 목자가 되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주님은 양이 아닌 사람들을 목자로 데려가실 수가 없어요.
이것을 아는 사람이 누군가요?
다윗이었죠.
우리가 시편 23편을 좋아하지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 진짜 그 분이 부족함이 없으려면.. 내가 양이 되어야 되거든요.
말로는 그러죠.. 교회 성도들이 양떼다. 내가 양이다. 근데 우리 양 아니거든요..
우리 생각이 늘 하나님을 이기고 있거든요.
양이 되겠다고 이야기하고.. 양으로 되서 그분이 이끄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기 시작할 그 때에 그때면 끝난 것 같애.
우리 가운데 정말 양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죠.
하나님이 이끄는대로 가고 싶죠.
그리고 그분만이 나의 모든 것이라고 그분이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도다. 그가 푸른 초장에서 나를 먹이도다. 그런 결론을 내고 그렇게 나아가죠.
그렇게 나아가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 어디로 가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왜?
거기가서 그 양이 진짜 낮아지는 양이 될 때 거기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주님이시거든요.
그리고 드디어 내가 아버지 집에 영원히 사는 자가 되는데..
그건 그냥 양이 아니라 죽음의 계곡을 지나가는 양이에요.
왜?
문둥병이 된 양. 거기에 주님이 오셔서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시거든요.
그랬을 때 그 양이 그 죽음의 계곡에서 상을 베푸시는 그 분의 모습을 어떻게 잊겠어요.
더 이상은 이제 꼴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은 내게 시원한 물을 줬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계곡에서 진짜 보잘 것 없게 처절하게 있는 나를 찾아오셔서 거기에 나와 함께 하신 그 분을 마음에 새겨서 더 이상은 그분 앞에 어떤 방향도 없이 완전히 항복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거죠.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것이 내 소원이 아니라 목자의 소원이죠.
그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그래서 낮아진 자리에 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이고요..
거기서부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시작을 하는 거에요. 거기서부터.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고, 누구에게 야단을 들을 필요도 없고, 이제는 그분이 마음에 새겨지고 나면.. 내가 그분을 아는 거에요. 그분을 알고 나면 순종해라 뭐해라 말하지 않아도 그냥 끌려가게 되어 있죠.
그분의 양이 됬으니까요.
여기(마음)에 그분이 새겨지고 나면..
가장 약한 양 같지만.. 그러나 사실 가장 강한 사람이 되죠.
그래서 아가서 8장에서 그렇게 말하잖아요.
광야에서 사랑하는 자의 품에 기대어 나온 여인.
바로 그게 그 모습이죠.
이제 기대어서 그분이 가는데로 끌려가는 여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이끌던지 그를 따라가는 자.
지금 다 똑같은 맥락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 광야에서 사랑하는 자의 품에 나오는 여자가 약하기만 한 줄 아세요?
죽음 보다 강한 사랑.
많은 물이 끄지 못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담대한 사람이 되는 거에요.
보기에는 가장 약하나 가장 담대한 자.
그 예수의 흔적이 어디 새겨졌냐면?
여기(마음)에 새겨졌죠.
가장 낮은 곳에서 그분이 찾아오셔서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낸..
가장 어린 자가 된, 가장 약한 자가 된.. 그분의 심장에 예수의 흔적이 새겨졌죠.
그래서 이제 이렇게 말하죠. “나를 괴롭게 말라.”
가장 약한 자이지만 가장 담대한 자로 설 수 있는 은혜.
가장 어린아이 같지만 그러나 가장 장성한 자가 되어 있는 자.
그는 그 낮은 자의 그 계곡을 지난 자에요.
예수 믿으면 잘 나갈 줄 알았죠..
교회가 하나님 뜻대로 뭐 이런 거 저런 거 .. 잘 하고 있으면 잘 나갈 줄 알았죠..
그러나 하나님은 잠깐 브레이크를 걸죠.
왜?
교만해지면 안되니까요.
제가요 여러분 마음에 아픈 이야기를 할께요.
우리요 교만해요. 우리 다 교만하다고요. 아는게 너무 많다고요. 들은게 너무 많다고요.
가진게 너무 많다고요. 지긋지긋하게 교만하다고요.
그런데 주님의 은혜는 그것을 책망하시려함이 아니라 돌이키려하심이죠.
그래서 우리를 처단하지 아니하시고, 죽이지 아니하시고, 낮은 자의 자리에 갈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죠.
여러분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있으면 기회가 있는거거든요.
아직 죽지 않았으면 기회가 있는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낮은 자리에 갈 수 있는 은혜가 있는거거든요.
여러분이 다시는 나를 꼴보기 싫어해도 좋아요. 이런 말을 해서..
그런데요.. 우리 교만해요. 아주 많이 교만해요.
어쩌면 우리 교회가 전주에 있는 교회보다 우리 교회가 제일 교만할 지 몰라요.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너와 너의 가족이 교만하다’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아는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영적인 충만함.. 주님이 말하는 진정한 부흥..
올 수 가 없어요.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에요. 먼저 우리를 해결하셔야 되요.
그래서 문제가 생기고요.. 그래서 낮은 자의 자리에 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거에요.
아이서부터 어른까지 다 우리 교만해요. 여기 모인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교만해요.
사람들 앞에서는 겸손한 사람들 많아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 교만해요.
우리요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교만한 자세로 있으면 지금까지 믿은 거 다 허사에요.
마지막에 주님께서 교만하고 자긍한 자를 제하여 버리실꺼거든요. 그럼 안되요. 안되잖아요.
주님이 미리 알려주세요. 미리 알려주시고, 우리를 그 자리에서 낮아질 수 있는 자리에 데려가시고 계세요.
제가 여러분에 부탁드리는 건 그거에요.
각자에게 다 낮아지는 자리가 있는데 그걸 우리 순순히 받자고요..
그 가운데서 원망하고, 누구 편하고, 누가 이래서 그래, 어떤 상황이기 때문에 그래..
그거 아니고요..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양 만들려고 끌고 계신거거든요.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 분 앞에서 순순히 그걸 받고, 그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 앞에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있자고요.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분의 성소에서 우리가 서로서로를 확인 할 거에요.
‘아! 집사님도 여기 계시네요. 아! 전도사님도 여기 계시네요. 드디어 우리가 교만하고 자긍하는 자리에서 풀려났나 보네요. 드디어 주님이 우리 주인이신가 보네요. 드디어 우리가 주님에게 항복했나 보네요.’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그 낮아짐의 자리가 앞에서 볼 때 너무 가슴 아프지만 그러나 영광스러운 자리에요.
그게 아니면 우리는 양이 못 되요.
우리 근성이 양이 되지 않고, 커지고자 하는 근성이 있어요.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낳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모든 생각은 누구를 판단하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불평을 하거나 어떤 상황을 분석하는 그 논리가 어디서 나왔냐면?
선악과에서 나왔어요. 그것이 커지고자 함이거든요.
이제 우리가 주님 앞에 도살 당한 양처럼 그렇게 앉아 있자고요.
주님이 허락하시는 낮아짐의 은혜를 순순히 받고..
거기서부터 주님을 새로 만나서..
진짜 주님이 주인 된 삶.
그분 앞에 가장 겸손한 자들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게 되길 원해요.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해요. 그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길 원해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가슴에 주님의 말씀을 새기기 위해서 오셨고..
이 자리에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낮아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장에 말씀을 새기실 거에요.
거기서부터 우리는 자원하여 주님에게 항복하는 자들이 될 거에요.
드디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
하나님! 과연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과연 하나님의 생각은 높고 우리의 생각은 한없이 낮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길은 의롭고 우리의 길은 불의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것이 크고 기이하시고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은 보잘 것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우리의 생각으로 무엇을 이룰 것처럼 했던 모든 것..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론들.. 우리 머릿 속에 있는 이 배설물 같은 것들..
사도바울이 그것을 버려야 했듯이.. 하나님! 이제 우리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이끄는 낮은 자의 자리에 하나님이여! 순전하게 끌려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도살당한 양같이 되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했나요.
하나님!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 당신의 이끄심에 감격할 수 있는 은혜가 있어지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우리를 마지막 순간에 성소에서 쫓아내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이여 지금 이렇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내가 가졌다 하는 거, 내가 안다하는 거, 내가 본다하는 거..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조금씩 교만하여 졌음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우리가 아는게 너무 많았습니다. 가진게 너무 많았습니다. 보는게 너무 많았습니다.
하나님! 그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심장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낮아진 자리..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더 낮은 자리로 데려간다 하실지라도 그것을 순전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드디어 하나님의 양이 되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껏 움직이는 목자로써 그렇게 주인으로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가소서.
그 어떤 환경에도 하나님 앞에 이유를 들이대며 왜 이랬냐고 말하기 보다는 원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이여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길에 동의하며,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며, 하나님 앞에 항복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자원하게 항복하게 하시고, 이 모든 상황에서 항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이여! 진정으로 그런 교회로 주님 만들어 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 마지막때에 주님의 성소에서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거기서 우리가 서로 서로 다 만나게 하시기 위하여 지금 우리를 데려가시는 이 작은 낮은 자리..
하나님! 나를 아직 살려두셨기에 기회가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 순순히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문둥이처럼 여겨지는 그 순간이라도 별궁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환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크고 기이하시며 당신의 모든 일은 의롭고 참되시나이다. 하나님을 경배합니다.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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