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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자 학교> 위기의 순간.. 경배Fam Worship 2024. 4. 20. 10:00
시대가 굉장히 달라지고 있어요. 여러분도 다 아실거에요.
그런데 이 시대에 과연 주어져야 하는 말씀은 무엇이고,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며.. 어떠한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야 되나?
정말 심각하고 절실한 문제인 것 같아요.
주님의 말씀이 천사에게서 직접 주어질 때..
주님의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주어질 때..
특별히 특별한 세대에 하나님이 그 세대에 주시는 말씀.
그래서 그 세대에 그 시대에 있는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은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입에는 단 것 같으나 배에는 쓴 말씀인 것 같아요.
그 말씀을 들어서 말씀을 듣는 중간에 배에서 계속 쓴 물이 나와서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말씀.
어쩌면 사도 요한이 말했던 이것을 지금 먹고 이제 나가서 백성들에게 말을 해야 되는 이 말씀.
그 말씀은 요한이 먹었을 때 배에서 썼거든요.
그러니까 사실 하늘에서 직접 오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받아 먹을 때 입으로는 단 거 같지만 들어가면서 바로 여기서 쓴 거.
그래서 견딜 수가 없는 거. 써서 싫은 거. 써서 뱉어버리고 싶은 말.
그런 말들이었지만 하나님에게서 직접 주어지는 말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내 입에도 달고, 배에도 달고, 귀에도 달고, 생각에도 달고, 그런 말씀들을 사모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하기를 원했어요.
들어서 입에도 달고, 들어서 배에 들어갔는데 배에도 달콤하고, 귀에도 달콤하고, 머리에도 달콤하고.. 그런 달콤함 속에서 달콤한 말들만을 들으면서 있다가 보니까 어느새 내 위는 당뇨병에 걸리고, 내 이빨은 썩어 들어가고, 내 귀는 설탕으로 말미암아 점점 귀가 먹어가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익숙하게 말씀들을 듣고 신앙생활을 해 왔는지 몰라요.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몸에 좋은 약은 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 알 수가 없죠.
하나님은 이렇게 크고.. 우리는 요만큼 밖에 모르니까 요만큼 알고 그 다음에 요만큼 알고, 요만큼 알고 이러면서 조금씩 알아가는데..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린양.. 다친 양을 끌어안고 있는 선한 목자의 모습만이 아니었나.
내가 아플 때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쓰다듬어 주는 그런 예수님만의 모양이 아니었나.
내가 억울할 때 나를 위로하시는 그런 예수님의 모양만이 아니었나.
내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그분의 모습만은 아니었나.
어쩌면 그렇게 내가 보기에 내 마음에 좋은 예수님만을 믿고 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길거리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사진을 봐도 우리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온유해 보이는 얼굴로 그려서 예수님의 모습을 놔뒀잖아요.
그렇게 그런것들을 보면서 그런 그림들을 피아노 앞에 놔두고 막 은혜를 받고. 그 얼굴이 예수님인 줄 알고 막 그러고 있는 우리의 모습 속에..
우리는 우리가 좋은, 내가 소화하기 편한, 내 입에 단, 내 배에도 단, 내가 편안한 나의 유익을 가져다주는 어떤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놓고 그분만을 섬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런데 지금 사도 요한은 이제 말하기를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말씀.
그것이 이 시대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과연 우리가 보아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 얘기를 좀 하고 싶어요.
우리가 이제 앞으로 점점 예수님 오실 날이 가까운 이 때에 우리가 지금 장차 앞으로 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그 모습이 과연 명화에서 나오는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인가?
잃어버린 양을 들고와서 가장 부드러운 모습으로 찾아오는 목자의 모습이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가?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모습을 이렇게 말해요.
우리가 앞으로 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에요.
이 모습을 이사야서 63장에서 이렇게 표현해요.
이 모습이 우리가 앞으로 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할 때 그 앞에 달려나가서 우리가 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이 모습이에요.
여러분 마음 가운데에 이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지금 예수님을 믿고 계신지..
아니면 내가 그려놓은 핑크빛 예수만을 믿고 있는지..
이것이 심각한 시대에 지금 들어왔어요.
여러분 중에 제가 질문하고 싶어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이러한 모습으로 오신다고 한다면 그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그 앞에 담대하게 나가서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나아갈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신지 여쭤보고 싶어요.
만약에 오늘밤에 예배를 드리고 나갔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이 이사야서 63장의 모습으로 “내 노를 갚으며, 내 분을 갚으며, 내 온 옷에 피가 튀어있고, 내가 진노로 여기에 임했다. 내가 심판으로 임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교회 앞에 서서 계신다고 할 때.. 우리 가운데에 그분의 모습을 내가 알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내가 알아서 그분에게 담대하게 손들고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그분에게 달려갈 그런 담대함과 그분을 그렇게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는지..
왜 그러냐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까지 내가 보고 싶은 면만을 보고, 내가 편한 면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왔어요.
그래서 “예수님!” 하고 엎드리면 편안해지는 그분.. 위로하시는 그분.. 맞아요..
그러나 그것이 그분의 다의 모습이 아니에요.
그분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과 33년 반을 살면서 그런 모습으로 계셨어요.
가장 연약하고, 가장 온유하고, 누가 자기를 핍박해도 거기에 대적하지 아니하고, 그런 모습으로 아픈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들을 살리고 그렇게 계셨어요.
그러나 그분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아버지 보좌 옆에 계시면서 이제 그분이 오시기로 준비하고 있는 그분의 모습은 바로 이사야서 63장의 모습이거든요.
지금 그분은 어쩌면 이 모습으로 계실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의 하나님 모습 그대로를 우리가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렇게 받아들이면 우리 뱃 속에 쓰고, 싫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단물로 바꿔버린 것에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그러다가 보니까 심각한 문제는 뭐냐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도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는게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이 복음이에요. 그러나 거기서부터 진짜 복음으로 가는 길이 있어요.
뭐냐면요?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너희는 이렇게 이걸 통해서 너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고, 구원받는 길이 열렸어.
그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길을 내어준 복음의 입문이고요..
하늘에 있는 존재들.. 하늘에 있는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이 말하는 복음은.. 그거하고 달라요.
하늘에 있는 천사들, 하늘에 있는 수많은 증인들이 보고 있는 복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믿으면 ‘나 구원 받았어. 그것이 복음이야.’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복음이 있어요.
지금 천사가 복음을 가지고 날아가고 있어요.
첫번째 천사.
하늘에 있는 천사가 지금 날아다니면서 온 민족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은..
너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아니라요.
여기 나와 있는 이 말씀이에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가 심판하실 시간이 가까웠다.
모든 것들이 그분을 경배할 것이다.
두번째 천사는 또 이렇게 복음을 전해요.
두번째 천사.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하게 했던 원조..
그 바벨론이 무너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세번째 천사는 또 이렇게 말해요.
세번째 천사는 복음을 어떻게 말하냐면?
“복음은 하나님만을 경배할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면 죽는거야.” 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늘에서 말하는 이 큰 의미의 복음과 그 복음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거기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이 작은 의미의 복음에서.. 우리는 여기 머무르고 있는 거에요.
여기까지 나가지를 않고 여기서 만족하고 있어요.
근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데 완성하시는데 거기에 우리를 붙여주시고, 거기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하므로 거기를 들어가게 해 주시는 거에요.
하나님이라 하는 존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거지..
우리를 구원하는게 그분의 전 존재의 이유가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의 전체 이유는.. 성경 전체가 하는 말은..
“하나님 나라” 이지..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하면 구원받을 수 있어.’ 그 얘기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창세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하나님의 나라 속에 있을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싶은데..
사람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드시고, 아들이 오시고, 거기서부터 아들이 돌아가시고 우리들이 그 길에 들어가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까지 가는 것..
그게 복음이에요.
근데 그 길이 열렸는데..
그 길에 대해서 천사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할거야. 그게 복음이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거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거야. 그게 복음이야.
그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했던 바벨론이 무너질거야. 그게 복음이야.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바벨론에 속아서 우상에게 속아서 짐승을 경배함으로 타협하여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있던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해. 그게 복음이야.
너희는 하나님을 경배하라!
천사가요.. 지금 우리가 악을 써서 성전에서 이렇게 막 말씀을 하고, 선교사들이 이라크와 파키스탄에 가서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을 전하고 열심히 열심히 그렇게 하지만..
맨 마지막에 천사가 온 천하와 민족과 방언과 백성들이 들을 수 있게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요. 요한계시록 14장.
날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가 전하는 복음이 뭐냐면?
하나님 나라가 임했어. 너희는 다 하나님을 경배할거야.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할거야.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는 자는 없을거야.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이야. 그게 복음이거든요.
그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가시려 함이거든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서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그 미혹의 단계들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 자리에 머물게 하죠.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나에게 잘해주시는 하나님.’
맞아요.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죠.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맞아요. 그러나 거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대로 어디까지 가야된다고 하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나 구원받은거.. 이 성경책이 그것만을 얘기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하나님하고는 아직도 끝끝내 평행선인 거에요.
“맞아요. 하나님! 하나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내가 복음의 삶에 들어가요. 그리고 복음으로 나아가요.”
근데 그 복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요한계시록 14장에 말하는게..
이 천사들이 말하는 건 뭐냐면?
복음의 삶에 들어가는 그 모습이 뭐냐?
‘경배하는거다’ 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나라에는요.. 둘 밖에 없어요.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경배드리는 자들.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경배를 드리는 자들.. 그게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래서 천사가 지금 말하는 거에요.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렇게 할거야.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은 다 거기에 들어가지 못해. 그리고 그들이 경배하지 못하게 막았던 바벨론은 무너져.”
지금 그 얘기가 세 천사가 날아다니면서 진짜 하나님의 소원에 있는 복음을 이야기 하거든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또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그렇게 말하시죠.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럼 지금 이 시간에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세요?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건 그거였어요.
하늘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뭔지 아세요?
그것이 요한계시록 4장이에요.
그건 기도의 모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지금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것.
그것이 as it is on this earth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뭐냐?
요한계시록 4장에 하나님 보좌앞에서 네 생물이 있고, 24장로가 있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전능하신이여.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그 분.
그분에게 온전히 경배를 24시간 드리고 있는 그것이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에요.
그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사실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그러나 사람들이 경배라는 것을 음악으로 낮춰버렸기 때문에 이 굉장한 비밀을 모르고 있는 거죠.
4절에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법이 뭐냐면?
율법이 아니라 토라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1~3절까지..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는 규례다.”
지금 말씀이 그렇게 연결이 되죠.
앞에 3절을 말씀하시고, 4절째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이스라엘의 규례고,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법인데 그 법이 뭐냐?
1절에서 3절.. “하나님을 경배하라” 에요.
1~3절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요.
그리고 4절에서 이는 이스라엘에게 주는 율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될 것이 바로 이것이었고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해야 되는 모든 것이 바로 이것이죠.
그것이 1~3절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에요.
그것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선포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내가 너에게 이렇게 했다. 내가 이렇게 했다.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를 너에게 이렇게 보여주었다.
그랬으니 그 다음에 너가 할 일이 무엇이냐?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를 너에게 보여주었다.
나만을 경배할 지어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런 말은요..
내가 원하는 기도를 응답해주신다. 너가 입을 크게 열면… 그 소리가 아니거든요.
여기서 문장을 앞에서부터 연결하면 입을 크게 열어서 앞에 1~3절까지 뭐라고 얘기했어요?
하나님을 송축하라. 입을 크게 열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라. 그리하면 내가 나를 너에게 주리라.
그러나 너희가 나를 원하지 않고 니가 원하는 걸 원한다.
니가 원하는 걸 원하지. 나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니가 원하는 거를 얻기 위해서 니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입 크게 열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기도할 때 입을 크게 벌리고 입을 쫙쫙 벌리고 기도해요 안하세요?
안해요.
근데 왜 이걸 기도라고 해석하세요?
왜? 내가 얻고 싶은 걸 얻으려고 하니까.
입을 크게 열어서 소리 지르면 주신다고 생각하는데.. 본문은 그게 아니고요..
앞에서부터 연결해서 입을 크게 열어서 큰 소리로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런데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소리거든요.
그 소리거든요.
그러면서 주님이 이렇게 말하죠.
11절에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자기가 원하는 걸 원하지 나를 원치 않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해요.
뭐냐면? 그래서 걔네들 좋을대로 하게 내버려둔다.
근데 그 백성들이 임의대로 하는 행위가 어떤건지 아세요?
아모스 4장 보세요. 여러분 잘 따라오셔야 해요.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에게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는 법이야. 근데 그 법이 뭐냐면.. 내가 너에게 지키라고 하는 규례야. 근데 그 규례가 뭐냐면? 1~3절까지야. 나를 송축하라. 나를 경배하라. 나의 절일에 와서 나를 높이라. 그것이 너희가 해야 될 너희에게 준 나의 법이야. 그걸 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애굽에서 구하였고, 내가 너를 십자가에서 구원했고, 내가 너를 노예생활하던 세상에서 내가 풀어냈고, 내가 너를 자유케 했어. 내가 너가 배고플 때 광야에서 내가 만나를 주고, 물이 필요할 때 물을 줬고, 홍해를 건너게 했고, 내가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끌고와서 내가 누구인지를 너에게 보여주었어. 왜? 그래서 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해서.
이제 너가 니 입을 크게 열어서 나를 경배하면.. 내가 나를 통채로 줄거야. 그런데 너희가 그걸 원하지 아니하고 니가 원하는대로 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더이상은 내가 원하는 걸 너에게 하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라고 내버려뒀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슬픈이야기인지 몰라요.
그러면서 아모스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가 기뻐하는 게 아니라 그건 너희들이 기뻐하는 거야. 내가 기뻐하는 게 아니야.” 라고 말씀하세요.
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게 아니냐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건.. 시편 81편에 말처럼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들이 여기에 나가서 지금 제사를 드리고 있는 거에요.
제사를 드리고 경배를 하지 않는거에요.
3일마다 가서 희생을 바치고, 번제물을 바치고, 3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바치고, 낙헌제를 하고, 소리내어 선포하고..
이 모든 것이 제사행위거든요.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신 적이 없고요.. 하나님은 경배를 원하셨어요.
제사는요..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갖다줘서 그것을 받는거에요.
내가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오늘 가서 황소 한마리 태움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나를 위해서 드리는 게 제사에요.
제사와 경배는 달라요.
경배는 뭐냐면?
내가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배 드리려고 하는 그 대상이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놀라우니까 그분에게 그냥 그분이 옳다라고 소리 지를 수 밖에 없는 거..
그게 경배에요.
근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이 해왔던거와 죄송하지만 우리 크리스천이 해왔던 것이 이 제사에 머물러 있는 거에요.
왜냐 그 뿌리가 뭐냐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원하는 거죠.
천국가기 원하는 거. 내 문제가 해결되기 원하는 거. 내 죄가 해결되기 원하는 거.
이 모든 것들이 뭐냐면?
사실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가져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길갈에 가서 그렇게 해. 벧엘에 가서 그렇게 해. 너 하고 싶은대로 다 해. 낙헌제 드려. 수은제 드려. 다 해. 그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아.”
너희가 그런식으로 제사지냈던 모든 것들.. 그것들은 허무하게 될 것이다. 이제 경배의 자리로 들어와라.
이것에 대해서 호세아서 6장은 이렇게 얘기해요.
하나님이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은 제사적인 행동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성경 말씀 읽는 것도 제사의 차원에서 있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 뿌리는 뭐냐면?
나에요. 나.
그 모든 것의 이유와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제사가 아니라 경배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요.
만약에 여러분이 십일조를 하는 이유가 너무 기가막히게 좋은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너무나 찬란하게 아름다운 분인데 그분에게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건 경배에요.
십일조가 법이기 때문에 하면 제사에요.
이것은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잘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까지 우리를 끌고 가시려는 하나님의 소원이에요.
“내가 너를 모른다.” 하고 원하지 않으시니까.
마지막에 “내가 너를 모른다” 그렇게 말하시기 원하지 않으시니까.
지금 호세아서 6장에서 말씀하시는 건 뭔가요?
“내가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걸 원한다. 번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주기를 원한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가 보고 싶은 내 모습만을 보고, 너희 마음에 편한 나만을 받아드리고, 너희가 듣기 좋은 말씀만을 듣기 원하고.. 모든 것의 중심이 너희에게 있다. 이제 그 중심을 나에게로 돌려라. 나를 사랑하라. 그것이 내가 원하는 거다.
그것이 경배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창세기 1장서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셔서 경배하는 자로 그를 세우세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하나님께서 땅을 다 만드신 후에 비를 아직 내리지 않으셨는데 ‘아직 경작할 사람이 없음으로’ 라는 말이 있어요.
그런가하면 그 뒤에가서 아담을 만드신 후에 다 만들어 놓은 것을 보시면서 “이것을 다스리라” 라고 말씀하세요.
그 ‘다스리다’ 와 ‘경작하다’ 의 원어가 뭐냐면?
‘work’ 이기도 하고 ‘worship’ 이기도 해요.
일하다. 경배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그것을 해석을 했어요.
일하는 것이 경배다. (사역이 경배다 x)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어진 그의 일이 뭐였냐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였어요.
이런거에요..
아담이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다 만들어졌어요.
하나님이 아담이 눈 떴을 때 흑백으로 있기 원하지 않은 거 아세요?
너무 재미없었을 거 아니에요.
아담이 눈을 딱 떴는데 흑암이 차고 공허하고 혼돈하고 안개가 자욱해.
아담이 “나를 도로 진흙으로 만드소서.” 그랬을 거 같아요. “눈 감은 게 낫습니다.”
하나님이요. 우리 하나님이요. 진짜 자상하시거든요.
푸른 하늘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물고기가 놀게 하고, 새가 있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총 천연색으로 다 만들어놓은 다음에.. 아담을 만들었어요. 아담이 눈을 떴을 때 그게 다 있었어요. 얼마나 놀라웠겠어요.
그리고 땅에서 아담이 먹을 열매가 나고 있었어요.. 그냥 저절로.. 하나님이 나게 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동물이 먹은 풀을 만들고, 인간이 먹을 씨 맺는 열매를 하나님이 그냥 나게 하셨어요.
비도 안오는데 그게 나고 있었어요. 땅에서 이슬이 올라와서 안개가 올라와서.
그러니까 아담이 그냥 먹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경작하다는 뜻은 worship, work 인데.. 그게 무슨 말이냐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해야 될 일은 뭐냐면?
천지를 다 보면서 얘기하는 거에요.
산들아 봐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봐라.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냐.
나무야 봐라!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셨는지.
새들아 봐라!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봐라. 그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게 아담의 일이었어요. 그게 워십이에요.
근데 그게 그 사람의 일이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모든 만물을 다스렸으면..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자가 어린양과 뛰놀고, 표범이 뭐 어떻게 되고,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그거 그대로 다 됐을거에요.
그게 원래의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아담이 받은 죄가 뭐에요?
앞으로 너는 일을 하는데 땀 흘려 일을 해도 땅에서 소산이 잘 안나서 고생할거다.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숭고한 worship 이었다가 땅을 파는 노동으로 전락을 한 거에요.
원래는 아담이 땅을 파는 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저절로 나게 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회복된 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명나무 강가에 사시사철 열매 맺는 나무들이 각종열매를 맺어서 우리가 그것을 먹고, 그 이파리는 힐링이 되고..
그게 원래 있었어야 되는 모습인데..
문제는 뭐냐면?
죄 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경배자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거에요.
경배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게 된 거에요.
근데 그 제사를.. 그렇게 드리는 피 비릿내 나는게 싫으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단번에 제사 드렸잖아요. 단번에 제사를 지내서 다 끝났어요.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제사하면 안 되요.
근데 우리의 속성은 아직도 제사를 해요.
왜냐? 그 뿌리가 뭐냐?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에요.
그러니까 사실은 뭐냐?
내가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욕심인거에요. ‘나’ 인 거에요.
사람은요..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만들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존재로 만들었고..
그 하나님의 이 사람 영안에 경배하는 영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사람은 무엇인가 경배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경배 안하면 무언가 딴 걸 경배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 안에 그런 속성이 있어요.
여러분 그 가수들 나오면 애들이 막 미친듯이 난리하죠.
왜 그런 줄 알아요?
그거 경배하는 거에요.
사도 요한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보좌를 봤어요.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그 모든 것을 다 본 다음에도 사도요한이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실수를 하나 보세요.
다 보고 들었다고요. 하나님의 보좌도 보고, 예수님도 보고 다 봤어요.
사도 요한이요. 하나님의 보좌, 예수님의 모습 다 봤어요.
어떻게 될 건지 다 봤거든요.
다 보고 난 다음에도 천사가 있으니까 천사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려요.
이게 인간의 속성이에요.
그러니까 천사가 말하죠. “잠깐! 그거 아니고 너는 하나님께 경배하기로 만든자야. 하나님만을 경배해.”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요. 내가 하루종일 제일 많이 생각하고 있는 거..
그게 내가 경배하는 대상이에요.
내가 하루종일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만약에 어떤 문제를 생각하고 있으면 그 문제가 내가 경배하고 있는 거에요.
내 마음이 하루종일 사로잡혀 있는 그 무엇인가 그것이 내가 경배하는 대상이에요.
부정적인 경배도 있고, 긍정적인 경배도 있는데.. 그게 내가 경배하는 대상이에요.
우리가 물론 하루종일 24시간 하나님만을 생각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하루의 분포를 봐서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대상이 누군가?
내가 경배하는 대상은 바로 그 존재에요.
하나님의 놀라움은..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사람이 없이는 그림이 맞춰지지 않아요.
왜냐?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은 경배받는 자리에 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그 그림이 맞춰져요.
사람들이 말하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왕같은 제사장으로 모든 것을 다스릴거야.”
맞아요. 하나님과 같이 다스릴거에요.
그러나 영원히 하나님을 경배할 거거든요. 우리의 정체성이 그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에서는 위기 가운데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만드시려고 하나님이 부단히 노력하시는 이야기가 한없이 많이 나와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사단이 하나님 대신 자기가 경배 받으려고 반항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단이 경배 받으려고 난리치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비밀을 사단이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자들을 경배하지 못하게 만드려고 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을 조롱해요.
“저 사람들이 당신을 경배하는 거 왜 그런 줄 아세요? 당신이 이거, 저거, 이거, 저거 해 줬기 때문이에요. 그거 다 걷어가면 저들 하나님 경배 안할 거에요.”
그런 일들이 성경에 있어요. 바로 욥이 그런 경우에요.
사단이 하나님에게 지금 도전하고 있는 거에요.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고 그렇게 보고 있는데.. 사단은 알아요.
사단이요.. 우리의 속을 너무 잘 알아요.
“욥이 당신에게 복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거에요.”
근데요. 그 말이 사실은 맞거든요.
그걸 왜 알 수 있냐면.. 욥이 복을 많이 받았잖아요.
잔칫날 아이들하고 잔치를 하고, 아이들이 돌아갈 때 아이들이 혹시 범죄해서 그 복 받는데서 떨어질까봐 제사를 드렸어요.
그 제사 드린 이유는..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니까 나하고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경배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혹시 이렇게 되면 이 복이 날라가고, 이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봐.. 자기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봐 제사를 드리는 거에요. 번제.. 주님이 말하죠.
나는 인애를 원하고 번제를 원치 아니한다.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
그리고 사단은 이걸 알아요. 사단이 말하는 거죠.
“당신이 홍해에서 건너게 해줬고, 광야에서 만나를 줬고, 지금 물질 축복을 줬고, 지금 가정이 다 괜찮고, 어려운 환경에서 건졌고, 힘든 상황에서 그를 위로했고, 병을 고쳤고.. 그랬으니까 당신을 경외하는 척 하는 거에요. 그거 다 없애보세요. 당신을 경외하나.”
그게 다른 말로 들으면 뭐냐면?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 소리거든요.
너무 하나님이 정말 기가막혀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러지.. 그거 안했으면 당신..
왜 사단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도전하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원하는게 우리에게로부터 사랑이라고 하는 경배를 받기 원하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요 기가막힌건 하나님이 사단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거에요.
여러분 사단이 하나님과 게임이 되요, 안되요?
안 됩니다. 도전을 할 수가 없어요.
근데 사단이 하나님에게 도전을 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어요.
뭔지 아세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두고 하나님에게 도전을 할 수 있어요.
여러분 무서운 이야기에요.
사단은 그 어떤 걸 가지고도 하나님에게 도전을 하거나 딴지를 걸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며, 어떻게 사랑하는가..
그걸 가지고는 딴지를 걸 수 있어요.
왜 그럴 수 있느냐?
사람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요.
근데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그 도전을 받아들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는가에 따라서 하늘에서는 전쟁이 있는거에요.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이 있는거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승리라고 하는 그 놀라운 일을 우리하고 묶어 놓으셨어요.
우리가 아니면 뭘 하실 수 없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낮추셔서..
내 나라가 이루어지기에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함으로 나를 경배하는 것을 통해서 내 나라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겸손하게 우리를 거기 포함시켰기 때문에 사단이 그것을 알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과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묶어 놓으신 거에요.
그래서 지금 욥에게 위기가 왔잖아요.
이런 위기에서 욥이 어느 쪽을 서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조롱을 받으실 수도 있고 사단을 참패를 시키실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감수하시는 거에요.
이것은 욥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위기 가운데 내가 어느쪽을 택하는가에 의해서 사단이 도전을 걸고 하나님은 거기서 승리하시든지 하나님이 힘들어지시든지..
하나님이 사단 앞에서 잠깐 말을 못하실 정도의 입장에 가실 수도 있는 것이 우리가 여기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가에 의해서 이것이… 욥이 지금 그걸 보여주고 있어요.
하나님이 욥이 어떻게 하는가에 자기의 명예를 걸어요.
여러분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이렇게 겸손한데 우리는 그 하나님한테서 무엇인가 끌어내려고 끊임없이 제사를 하고 있죠.
얼마나 우리는 치사하고,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한지 모르죠.
그래서 욥이 이렇게 이야기 하죠.
여러분 이게 경배같이 보이시죠.
그러나 여기 하는 내용을 보면 “주신자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니 당신이 주셨고 당신이 가져가셨으니까 괜찮습니다.”
거기 머물러 있어요.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것에 머물러 있어요.
그러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니까 그 다음 차원에서 계속 친구들하고 변론을 벌이는 거에요.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니까 계속 변론을 벌이는 거에요.
그렇게 변론을 벌이고 그냥 하나님에 대해서 막 떠들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시죠.
욥기 38장서부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제 말씀을 하시죠.
너희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역겹고 역겹고 역겹다. 너희들이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번제가 아니라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죠.
내가 나무를 만들때 어떠한 마음으로 그거 만들었는지 알아?
내가 산을 만들때 내가 어떠한 떨림으로 그걸 만들었는지 너 알아?
내가 악어를 만들때 어떠한 모양으로 어떠한 뜻으로 그걸 만들었는지 너 알아?
니가 아는게 뭐가 있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
그 얘기를 쭉 하시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이기 시작할 때..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들어가요.
그것이 욥기 42장이지요.
이것이 경배에요. 경배는 이게 경배에요.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가 욥의 삶에 이루어지고, 그 후에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축복은 말로 할 수도 없어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리라
여러분이 뛰어 나가서 전도 한명 해서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거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에요.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게 내 안에서 지금 일어나는 걸 이야기해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그래서 드디어 욥은 제사 드리는 자리에서 경배의 자리로 들어가요.
자기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 복을 잊어버릴까 하나님 앞에 범죄할까 두려워서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경영이든지 이루시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인 줄 알고 그 앞에 감격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경배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은 사단을 무참하게 완전히 참패하게 만드시는 거에요.
그게 욥의 이야기에요.
창세기 22장 보시죠.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어요.
아브라함에게도 일생일대의 위기가 왔어요.
아까 욥에게 그게 위기였어요.
위기에서 어떻게 할거냐?
욥이요 거기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거 아세요?
또 이렇게 제사할 수 있었던 거 아세요?
번제물을 어디서든지 구해서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를 구해주세요. 나 여기서 이 원수들 앞에서 나를 높이 드세요. 여기서 나를 해결해주세요. 내 잃어버린 재산을 돌려주세요. 내 아이들을 돌려주세요. 내 생명을 돌려주세요. 나를 고쳐주세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진짜 헌신되게 살께요. 그렇게 해 주세요. 해 주세요.” 할 수 있어요.
그건 경배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무슨 경영이든지 다 이루시는 줄 내가 믿습니다.”
그리고 재 가운데 엎드러지는 거.. 그게 경배에요.
아브라함이 있었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이야기하죠.
근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상한 얘기를 해요.
<아브라함의 위기>
경배하고 (예배하고)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 다음 문장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경배의 내용이 하나도 안 나와요. 보세요.
분명히 종에게 “나 경배(예배)하고 올께” 라고 말하고 산으로 올라가요.
근데 올라가서 경배하는 모양은 지금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결론은 뭐냐면
제가 깨닫고 있는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에 인간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승리하시는데.. 그걸 내가 알고 있는데..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은 뒤에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16절 내가 맹세하는데 내가 맹세하는데 내가 어떻게 할거냐면?
이렇게 말씀하세요.
이게요 아브라함이 복 받는게 아니라요.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아브라함이 복 받는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대적의 문을 밟아버리고 닫아버리는 역사가 이 아브라함의 무엇인가를 통해서 일어났어요.
하나님이 사단에 대해서 완전히 대적의 문을 밟아버리고 완전히 승리하는 그 시작의 열쇠가 아브라함이 무엇인가를 한 것에서 일어났다고요.
그래서 제가 결과를 보니까 위기에서 경배함은 일어나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리고 앞에서 아브라함은 분명히 경배하러 간다고 했는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어?
경배한거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제 속에서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너는 경배가 뭔지 아직도 모르는구나. 아브라함이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는 걸음. 올라가서 나무를 아이에게 지우고 가는 걸음. 한 곳에 도달해서 나무를 쌓아놓고 아들을 결박하는 그거. 그리고 그 아들을 거기에다 누이는 거.
칼을 들어서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그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나를 향한 경배다.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향한 경배다. 그걸 통해서 내가 승리하였다. 내 자가 대적의 문을 취하였다. 내 소원이 그것을 통하여 이제 이루어진다.”
출애굽기 3장 한 번 보세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기가 왔어요.
욥의 위기를 봤고, 아브라함의 위기를 봤고, 이제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를 봐요. 출애굽해서 가다가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한 참 올라가서 없어져 버렸어요. 그랬더니 이제 이스라엘 민족들이 난리가 난 거에요.
모세를 통해서 밖에 하나님이 누군지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게 없어지고 나니까.. “그 하나님이 누구야? 우리를 데려온 하나님은 누구인거야?” 이러면서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니까 이제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기 시작하죠. 금송아지를 만든 그 장면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이 조롱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사단에게 조롱을 받으시는 거에요.
사단이 이 자리에서 뭐라고 하나님에게 이야기하는지 알아요?
“봐요. 이스라엘 백성.. 당신 사랑하지 않아요. 당신이 광야에서 당신을 경배하라고 끌어낸 백성. 당신이 출애굽을 시키고,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구원했고, 다른 애굽 사람 첫째 아들은 죽이고, 그 사람들은 죽이지 않고,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에 발라서까지 구원한 당신의 백성들.. 홍해를 건너서 그들 앞에서 바로를 합법적으로 죽이고 구원한 당신의 백성들.. 시내산에서 당신하고 신부의 약속을 한 그 당신의 백성들.. 만나 주고 물 주고 그렇게 했던 그 백성들.. 그 백성들 당신 사랑 안 해요. 보세요.
잠깐 위기가 오고 자기들의 리더가 없어지니까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우상숭배하고 있잖아요. 당신 경배 안 해요. 당신 사랑 안 해요. 당신이 그렇게 부어줬을 때 사랑하는 척 했어요. ”
조롱하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삶 속에서 경배하고 안 하고..
또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안 하고는요.. 무서운 결과를 가져와요.
그러면서 모세가 이렇게 말하죠.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다 나오라.
그래서 레위자손이 나왔고, 그 레위자손은 그때부터 성막을 짓고.. 성전을 짓는데 그 레위자손들이 경배라는 것을 그 사명을 감당하는 종족이 됐어요.
하나님 편에 서는 거. 하나님 편에 서는 거.
거기서부터 경배는 시작이 되거든요.
내가 하나님 편에 서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이 사단에게 승리를 하시는 거거든요.
이게요 말도 안 되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왜?
하나님이 겸손하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사랑과 경배를 받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러시죠.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그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에서 방법을 찾으려고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
원수는 하나님을 조롱할 거리를 찾아요.
“당신이 그렇게 당신 아들까지 죽였죠.. 그런데 저들이 당신 사랑 안 해요. 저들이 당신 경배 안 해요.”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사무엘상 12장.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만들었죠. 다윗에게 모든 축복을 많이 주셨죠.
그런데 어느 날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죠.
그런 후에 나단이 찾아와서 이렇게 얘기하죠.
예를 들어서 쭉 얘기하고, 다윗이 거기에 대해서 회개를 하기 시작할 때 이렇게 얘기해요.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
하나님을 비방(훼방)할 거리를 얻었어요.
다윗의 어떤 선택 때문에..
다윗에게 모든 걸 다 줬죠.
길거리에 목동으로 있던 아이를 불러서 기름을 부어서 왕을 만들었어요.
그 목동을 데려다가 9척이 넘는 골리앗의 목을 자르게 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이 길거리에 다니면서 사울은 천천을 죽이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다고 다윗에 대해서 노래하게 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축복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밧세바라는 여자 하나를 경배하기 시작하죠.
여러분 우스운 얘기 같지만.. 그 순간에 다윗은 밧세바를 경배한 거에요.
그런데 그 밧세바를 경배한 그 원인이 뭐냐?
사실은 자기의 욕심을 경배했고, 자기 자신을 경배한 거에요.
그리고 범죄하고..
회개하니까 하나님은 용서하시지만 가슴아픈 건 하나님은 사단에게 비방(훼방)할 거리를 주게 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내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수모의 자리는 안 가야 되는 거에요.
나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수모의 자리는 안 가야 되는 거에요.
근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시죠. 보세요.
보세요. 다윗이요.. 7일동안 금식하고 있으면서 “하나님! 내 아들 살려주세요.”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불쌍한 척 한 거에요. 본문이 그렇게 말해요.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보셔서 혹시 내 아이를 살려줄까..’ 솔직한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그건 그 행동 자체가 경배에요.
내 아이를 살려달라고 내가 기도하면 살려주실거라고 믿은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불쌍하게 있으면.. 하나님은 전지전능의 하나님..
혹시 나를 불쌍히 여기실까..
그건 경배의 마음이에요.
그리고 끝난 후에 아이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경배할 수 있었어요.
보세요.. 다윗의 위기는요. 밧세바와 간음한 게 위기에요? 우리아를 죽인 게 위기에요?
더 큰 위기는..
하나님 앞에 그게 들켜서 나단이 와서 혼낼 때 책망할 때 위기였어요.
그러나 가장 큰 위기는 그래서 아이가 죽은 거에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은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택해요.
그리고 하나님은 사단에게 훼방할 거리를 받았던 그것을 순식간에 돌이켜서 사단을 밟아버리신 거에요.
“봐! 내가 왕 되게 했기 때문에 니가 그 아이가 나를 경배한다고 했느냐? 범죄한 후에 그의 아들이 죽었는데도 나를 경배하고 있음이야.”
여러분 경배라는 건..
예배 시간에 하는 순서가 아니고요. 노래가 아니고요.
하나님 앞에 가장 낮은 자로 있어지는 게 경배거든요.
세기의 경배자가 누군지 아세요?
예수 그리스도거든요. 최고의 경배자가..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경배의 모습으로 계셨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는 인간 중에서는 가장 놀라운 경배자인데..
그분의 경배가 바로 이거에요. 경배는 바로 이거에요.
모든 삶에서 이렇게 될 수 있는 거.. 그게 경배에요.
말씀을 하든, 전도를 하든, 기도를 하든, 찬양을 하든, 집에서 밥을 하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이게 경배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이름을,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세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 경배의 모습을 취하고 경배자로 내려갔을 때에.. 하나님은 승리하셔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기를 여러분이 아시죠.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기였어요.
그분께서 기도하시죠.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기도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서 “아버지! 살려주세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라고 말해요.
왜냐?
그 아버지만이 옳은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가장 큰 위기에서 그 분이 경배의 자리를 택하고.. 그를 통해서 십자가까지 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원히 승리하셨어요.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나의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경배의 극치의 모습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어요.
하나님이 영원히 승리하셨어요.
선교하는 거.. 전도하는 거.. 다 경배가 되지 않으면 일이 되고 말아요. 제사가 되고 말아요. 가르치려고 설교를 하면 경배가 아니죠.
하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듣고 싶은 말을 하나님에게 드리면.. 경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상으로 가장 이 세상에 민족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큰 위기요, 축복이 언제였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그 때에도 경배가 있었어요.
목자들이 경배했고..
그런가하면 거짓 경배가 있었어요.
헤롯 왕이 거짓으로 경배하겠다고 이야기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때에 또 경배의 싸움이 있어요.
하나님께 경배하는 자와 적그리스도에게,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의 사이에 싸움이 있어요.
하나님은 항상 그 모든 위기 가운데서 경배라는 걸 통해서..
하나님이 항상 승리하시는 자리에 들어가세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있는 자체..
그리고 그 앞에서 하나님 앞에 진짜 하나님이 하나님이기에 내가 납작 엎드릴 수 있는 거..
그것이 경배인데.. 그 경배의 자리에 갈 수 있는 거..
예수 그리스도처럼 내 뜻과 내 생각을 포기할 때에만 거기에 갈 수 있어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가 알고 있는 생각.. 내가 알고 있는 뜻..
그것들이 포기 되어지지 않으면 경배자가 될 수 없어요.
경배자라고 하는 건..
찬양팀을 데려다놓고 경배훈련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은 누구든지 경배자가 되어야만 해요.
경배자로 존재해야 되요. 그것이 존재의 이유에요.
하나님 나라를 만들때부터 그랬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분 때문에 죽음에서 구원받은..
진짜 사실은 죽어도 마땅한 존재.. 그리고 그분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
그래서 그분을 경배하는 거죠.
더 이상은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거죠.
그냥 그분이 너무 거룩한 거에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기가 언제인지 아시죠.
이제 곧 오죠.
우리 때가 될지, 우리 자손의 때가 될 지, 우리 후대가 될 지 몰라요.
그것이 바로 마지막 재앙이 부어질 때죠.
요한계시록 15장에 나오는 이제 마지막 일곱 재앙이 부어질 때..
그 때가 이 세계에 가장 큰 위기에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께서 오시고, 마지막 재앙이 부어질 때..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은 “바위야, 나를 숨겨라. 나의 위에 덮어져서 나를 숨겨라.” 하고 그렇게 부르짖잖아요.
크고 무서운 여호와의 날.. 그 때가 가장 큰 위기거든요.
그러나 정말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날이겠죠.
그 날 하늘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한 번 보세요.
가장 인간 역사상.. 가장 위기의 시간에.. 이 모든 사람들이 그 수많은 증인들이..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에요.
이것이 뭐냐?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에요.
“하나님! 이해가 안되요. 저 무서운 재앙을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르겠어요. 일곱대접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도저히 모르겠어요. 이 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저 교수는 저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는 건 단 하나 있어요.
여호와여! 당신이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십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길이 의롭고 참입니다. 여호와여! 당신이 의롭습니다. 당신만이 거룩합니다. 모든 민족이 당신을 경배할 겁니다.”
인간의 역사상 가장 큰 위기의 시간에 진짜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은 이렇게 경배하는 거에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렇게 경배하는 걸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거죠.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거죠.
성도들의 인내가 중요한 것이 여기 있다..
사단이 그럴거죠.
“저렇게 힘들게 하면 저들 다 예수님 배반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다 떠나갈 거에요.”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자들을 보면서 사단은 참패하고 하나님은 승리를 하시는거죠.
마지막에 있을 전쟁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아까 보여드렸는데..
그분이 전쟁을 이렇게 하시죠.
친히.. 친히 그렇게 하시고..
보세요.. 예수님께서 전쟁을 하려고 입성을 하시고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뒤를 따라오고 있어요. 같이 전쟁하려고..
칼도 가지고, 창도 가지고 다 가졌겠죠. 전쟁하려고 다 따라오고 있어요.
그런데 전쟁터에 딱 도착했더니 예수님 입에서 검이 하나 나와가지고 전쟁 끝.
본문이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그럼 이 뒤에 예수님을 따라오는 사람들은 뭐에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천년왕국 끝난 후에도 얼마나 웃기는지 보세요.
우리들이 천년왕국.. 마지막에 전쟁이 무섭다 두렵다.. 무서울 게 하나도 없는 게..
전쟁 시작 그러면 주님이 입으로 끝. 전쟁 시작 했대.. 그런데 입으로 끝.
입에서 검이 나와서 그냥 끝. 이렇게 나오시잖아요 지금 본문이..
요한계시록 20장 보세요.. 20장에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이렇게 나와요.
성도들을 해치려고 천년왕국 끝난 후에 나와서 막 미혹시키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되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순식간에 소멸.
하나님이 다 하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쟁에 포함되기를 원하세요.
어떻게 포함되기를 원하냐?
시편 144편에 보면 그 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쟁할 힘을 가르친다고 말해요.
이렇게 고백하는 거 경배거든요. 그러면서 그 다음에 여호와가 전쟁하는 걸 보여주세요.
그러면서 9절에 이렇게 말하죠.
손가락을 가르쳐서 전쟁을 하게 한데요. 1절에 그죠.
여호와께서 내 손가락을 가르쳐 전쟁하게 한다.
그런데 9절을 보니까 내 열 줄 비파로 주님을 찬양하겠다.
그러면 이 손가락을 가르쳐서 뭐하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을 경배하라고요.
근데 그 경배하는 내용이 뭐냐?
“하나님! 당신이 최고입니다. 우리는 헛거에요. 우리는 헛거에요.”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럴때 하나님께서 전쟁하시죠.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될 일이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에게 속한 자로 낮아지는 건데..
낮아지는 것의 가장 큰 증거가 뭐냐면?
내 생각이 버려지는 거에요. 내 생각을 포기하는 거에요.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는지 알아요?
내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위기 속에서 그 상황이 더 크지.. 하나님이 더 크지 않아요.
경배자는요.. 위기 속에서 상황은 우습고.. 하나님이 커요.
여러분 우리 스스로 속지 말자고요.
우리가 경배자라고 이야기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나 경배한다고 말해요.
그러나 우리가 얼마전에 있었던 위기에 여러분을 갔다 놔 보세요.
하나님이 더 컸어요 그 위기가 더 컸어요?
근데 하나님은 우리를 거기서도 자유하게 하길 원하시고, 하나님은 거기서 하나님이 하나님임을 보여주길 원하거든요.
그런데 위기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그게 하나님을 경배 안한다는 표시에요. 그 위기 가운데 생각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습니다.”
그게 경배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죠.
“야! 돈 없어도 돼. 그냥 와. 그냥 와서 내 말을 들어.”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구원의 자리에 초청하셨죠.
“그냥 와서 들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들어. 내가 좋은 것으로 먹여 줄께. 나한테 와. 나한테 와. 나한테 그냥 와.”
그렇게 우리를 초청하셨어요.
그리고 오신 후에 이렇게 말하죠.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복음을 들었더니 우리의 영혼이 살았어요. 그렇죠.
내가 너희에게 그 언약을 줄거야. 그것이 너희에게 주신 은혜야.
그렇게 쭉 얘기하면서 6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내가 너를 초청했고, 내가 너에게 먹을 것을 줬고, 내가 너에게 다윗에게 줬던 언약을 너에게 줘서 너를 구원했어.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너를 구원했으니까 이제는 제발
너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내가 가까이 있을 때 나를 보기 위해서 제발 좀 나를 불러라.
그런데 어떻게 부르냐면?
그 다음에 나와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너희 생각을 제발 좀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너희의 생각으로 나를 믿지 말고, 제발 내 생각으로 나를 믿어라.
너희의 생각을 포기하라.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경배.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니 생각을 포기하면 긍휼히 여기실거야.
나오는데 뭐라고 말하면서 나오냐면? 여호와의 말씀에..
어떠한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하고 다르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
내가 내 생각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옳다고 하나님을 올려드릴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내가 내 생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가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게 왜냐?
그 뿌리가.. 내가 죄인이고, 내가 나를 경배하고 있다는 얘기죠.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짜 자유하는 자리에 데려가려고 하거든요.
하나님이 지금.. 세상에서 크리스쳔들이 말하는 그 모든 복.. 놀라운 진짜 하늘의 복을 줄 수 있는 길을 얘기하시는 거에요.
유치한 복 말고.. 하나님 자체를 줄 수 있는 것..
그게 뭐냐? 나를 경배하라.
나를 경배하는게 뭐냐? 내 생각을 포기하는 거에요.
“내 아들도 그렇게 했어. 내 아들도 가장 큰 위기에서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고, 내 생각이 자기의 생각보다 높음을 알고, 내 길이 자기 길보다 높음을 알고, 내 길을 택했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에요.
그게 경배거든요.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여기서 그렇게 하면..
이 놀라운 축복, 이 모든 만물이 다 구속되며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기에 가는 그 길에 무엇이 있느냐?
그 앞에 우리가 우리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있다.
이게 이사야서 55장이 전체 구원.. 하나님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여기 다 있는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불렀고, 우리를 구원했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여호와께 나아가는데..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생각이 옳고, 하나님의 길이 옳음을 인정하고, 내 생각은 낫고 내 뜻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을 경배하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너에게 평강을 주고 너를 기쁘게 하고 그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이 구속되는 역사를 이룬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예이며, 정녕 영영히 끊어지지 않을 표징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결론을 내는 거에요.
근데 그 중간에 요 부족한 것.. 하나의 생각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중요한 거에요.
요 부족한 것의 하나의 생각에 요것이 방향이 어디로 가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과 사단이 마주서서 조롱할 거리가 되든지.. 하나님이 승리의 깃발을 들고 사단을 무참히 밟던지..
둘 중에 하나가 결론이 나는 거에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죠.. 하나님을 왜 사랑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해서 어떻게 되길 원하세요?
하나님이 승리하시기 원하시죠?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죠.
그러나 내가 70, 80 평생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무엇인가 선택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승리를 하셔야 되는거 아니에요?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표징이 뭐냐?
위기 가운데 내 생각을 버리는 거에요. 그것이 경배에요.
우리 삶 속에 위기가 많이 있죠. 교회에도 위기가 있죠.
위기감과 상황의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사단이 이겨요.
그러나 위기 가운데에 ‘하나님이 크고 기이한 일을 행하고 계시다’ 라고 경배하면..
하나님이 승리하세요.
선택은 우리에게 있어요.
저는 가슴이 아프게.. 하나님이 왜 별볼일 없는 사람이 그렇게 결정하는 것에 의해서 승리하시고 훼방을 받으실 수 있나?
그게요 두렵도록 무서워요.
그런가하면 두렵도록 감사해요. 두렵도록 감격해요.
그 생각을 하면요 절대로 넘어질 수가 없는 거에요.
내가 넘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상황에 먹히고 나갈 때 하나님이 조롱을 받으실 수 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요.
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이 나 하나에 여기서 흔들리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훼방거리가 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죠. 그게 견디지 못하는 게..
그게 견디지 못할 만큼 아프고, 그것 때문에 잠이 안오고..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란 말이에요.
제가 LA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마지막 날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하나님이 경고를 하시는 거였어요. 그분들에게..
그리고 그 전날 밤에 제가 잠을 한 잠도 못 잤어요. 밤새도록 울고 기도하면서 그분들을 놓고 제가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어찌하랍니까. 내가 밤새도록 이 분을 생각하면서 잠을 한 잠도 못잤는데 나보로 어찌하랍니까. 저는 할 말을 했고, 저는 나팔을 불었고, 하나님 나보러 어찌하랍니까. 그리고 돌아왔어요. 그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편에 서기로 결정을 했고.. 근데 그 가운데 한 분이 모든 것을 가진 분이였는데.. 그 분의 마음이 도대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어요.
오늘 아침에 연락을 받았어요. 여러분! 하나님이 벌 줬다고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마지막 기회라는게 있고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게 있거든요.
그분이 오늘 아침에 연락 받았는데 혀암이 걸렸대요.
절대로 이 얘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벌 받는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제가 아는 건.. 그것이 그분에게 기회라고 하는 거에요. 은혜라고 하는 거에요.
거기서부터 잠잠하게 하나님 앞에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을 수 있음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영광의 날이 그의 삶 가운데 이루어 질 것..
말씀을 전하기를 그렇게도 원하는 그 사람이 말씀을 혀로 전하는 게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의 메세지를 가지고 가는 거에요. 날 봐라. 날 봐라. 그 사람 자체가 메세지가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시는 거에요.
온누리 교회 올 때마다 하나님께서 깊은 이야기를 하시면서 여러분에게 토해내듯이 말씀을 하세요.
때가 악해요. 여러분 위기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조금 마음이 흔들어지고, 누구의 말이 맘에 안 맞고 힘들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눈을 크게 뜨세요.
내 삶에서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가게가, 내 교회가.. 이건 문제도 아니에요.
눈을 크게 떠서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보세요. 세계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세요.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세요.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승리하셔야 되는지 보세요.
그러면서 거기서부터 그 세계관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거에요.
그리고요 우리 앞에 분명히 여러분이 예수를 진짜 믿을진데.. 위기는 와요.
우리가 진짜 예수를 믿으면 핍박 받아요. 진짜 예수를 믿으면 우리 고생할 거에요.
왜? 사단이 가만히 안놔둘거죠.
사단이 지금 쫓아가서 망가트리려고 하는 건..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이지..
덜렁덜렁 교회다니는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어요.
욥에게 관심이 있었고, 아브라함에게도 관심이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관심이 있었어요.
왜?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기의 명예를 걸고 있는 걸 아니까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이나 나같이 찌질한 존재에게 하나님의 명예를 여기다 묶어놨는지 전 이해가 안가요. 도저히 이해가 안가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어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드대체 우리가 누구관대, 인자가 누구관대 우리를 생각하셔서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시고 사단의 도전을 오늘도 받아들이고, 내일도 받아들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걸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 편에 안 설 수 없잖아요. 위기가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게 뭐 문제인가요?.. 하나님이 더 크신데.. 하나님이 더 크시다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 위기가 어쩌니 저쩌니.. 이 상황이 힘드니 어쩌니, 누가 나를 힘들게 했니 어쩌니..
그것이 그렇게 내가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힘든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단에게 조롱거리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만약에 생각한다면.. 감히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그렇게 못을 박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렇게 못하죠.
그래서 제가 그 혀암 걸린 사람 아내에게 전화를 했어요. 나랑 같이 기도하죠.
뭐라고 기도하냐? 우리 데이빗을 고쳐주세요. 그거 아니고..
“하나님이여! 당신의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십니다. 당신의 모든 길이 의롭고 참되십니다.”
그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승리하면 곁다리로 따라가는 우리는 자연히 승리해요.
이제는 하나님 보러 우리 편 되어달라고 막 악 쓰는 거 이제 그만하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되요.
제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되요. 하나님이 지치셨어요. 지치셨어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말라기 지나서 예수 그리스도 올 때까지 400년 침묵했던 하나님의 심정이 절절히 느껴져요. 그러면 다른 사람 얘기 하지 말자고요..
나 하나부터 하나님 편에 서자고요. 하나님 보러 자꾸 내 편 되어 달라고..
하나님은요 처음부터 우리 편이었어요. 그건 구하지 않아도 우리 편이에요.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자리에 가야 해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거.. 그게 경배자에요. 그게 레위인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는 위기 때에요.
위기 때 그 자리에 갈 수 있고요.. 위기 때 그 자리에 한번씩 가면서 영적 근육이 생겨요.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세 번 가고 네 번 가면.. 보기에는 연약한 거 같아도..
마지막에 무릎이 짤려도, 칼이 들어와도, 껍질을 벗겨도, 불에 태워도..
“하나님이여! 당신의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합니다.” 그럴 수 있을 거에요.
여러분에게 정말 애원하듯이 부탁해요.
하나님이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을 찾기 위해서 목이 터지게 말라요.
그리고 여기 오늘 찾아오셔서 내 편에 서는 자를 부르고 계세요.
기염을 토하며 내가 주님 앞에 선교하겠습니다. 전도하겠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귀하죠..
그게 아니라 “내 작은 생각 하나를 당신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버리나이다. 내 작은 판단 하나를 당신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버리나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에요.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주님은 찾으시죠.
요한복은 4장.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찾으니 바로 이 때라.
왜 그 자를 찾는 줄 아세요?
전쟁이 가까이 왔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우리 열 손가락을 가르쳐서 싸움을 준비시키고 계신데.. 그것이 뭐냐?
경배자의 자리에 가는 거에요.
제가 여러분께 부탁드릴께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기를 지금 이 시간에 주님 앞으로 가져 오십시다. 그게 뭐래도 좋아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위기가 뭔가요?
내가 지금 가슴에서 해결이 안되는 무엇인가가 뭔가요?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소원이 뭔가요?
내가 하루종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걸 주님 앞으로 가져가십시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실패가 뭔가요? 그거 주님 앞으로 가져가십시다.
도대체 용서가 안 되는 무엇인가가 무엇인가요? 그걸 주님 앞으로 가져가십시다.
해결이 안 된다고 하는 게 뭡니까? 그거 주님 앞으로 가져가십시다.
그것을 주님 앞에 갖다 놓고 주님 앞에 그렇게 말합시다.
여호와여! 당신의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십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길이 의롭고 참되십니다.
다 떠나가고 나 혼자 남아서 아무도 없는 사막에 나 혼자 남았을지라도.. 하나님이여! 압니다.
당신의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십니다. 당신의 모든 길이 의롭고 참되십니다.
당신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당신을 경배할 겁니다.
하나님이여! 그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부족한 것 하나부터 이 위기에서 그 경배의 자리를 선택합니다.
하나님은 더 크고 이 상황은 작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십니다.반응형'Fam Worsh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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